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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2/09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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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주님이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리니, 그날에는 큰 빛이 비치리라.

하느님, 온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셨으니 구세주의 영광스러운 성탄을 저희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2월 9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9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40,1-11)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 오늘 복음
    (마태 18,12-14)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이사 40,1-11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1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2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3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4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5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6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7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9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18,12-14
오늘 복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9일
전진 도미니코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52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위로는 하느님이 오시는 순간 시작된다.

‘위로의 책’이라고도 불리는 이사야서는 오늘 독서에서 희망을 주는 위로가 무엇인지를 뚜렷이 보여 줍니다. 이 위로는 아주 강력해서 죗값을 치르느라 유배살이에 지치고 실의에 빠진 하느님 백성을 새롭게 일으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권능으로 새롭게 하시면서 직접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은총은 타인을 통하여 배달되지 않고 당신께서 몸소 가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아니, 그분께서 모든 은총의 총합이십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이사 40,10).

하느님의 상급과 보상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주시는 희망이 아닐까요? 세상에서 인간적 기대는 어긋날 수 있겠지만, 하느님 안에서 희망은 어긋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희망을 잃어버리면 그의 삶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희망으로 존재합니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도 희망을 존재의 필수라고 보았습니다. 비슷하게 사람은 음식 없이는 40일, 물 없이는 4일, 공기 없이는 4분, 그러나 희망이 없으면 단 4초도 살 수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특히 이 대림 시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희망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새끼 양들을 안으시며,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시는 그 다정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을 만나러 기쁨과 희망으로 걸어갑시다.

“그분이 오신다.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민족들을 진리로 다스리신다”(화답송).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께서 내 집에 오실 때 나는?

오늘 복음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끝까지 찾으시는 주님을 얘기하는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이 복음을 읽는 뜻은 성탄절에 우리에게 오실 주님이 바로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목자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시는 주님은 또한 이사야가 오래전에 메시아에 관해서 예언한 바로 그분이라는 뜻이며, 그래서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그러니까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오실 분이 이런 분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오늘 저는 이렇게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나는 기다리고 있는가? 이런 관점으로 초점을 돌리고 오늘 저를 성찰해봤습니다.

극단적으로 주님께서 나를 찾아 내 집에 오시는데 그 소리를 듣고 주님을 피해 집을 비우는 나는 아닌가? 옛날 저는 본당신부 대리를 몇 달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냉담자가 많다는 얘기를 듣고 새 신자 모집도 중요하지만 냉담 교우를 먼저 찾자고 그래서 냉담 교우 방문을 계획했지요.

그런데 가정 방문을 하니 그 얘기를 듣고 냉담 교우들이 집을 비우고 어디로 가 버려 아주 속상했던 적이 있지요. 이처럼 성탄절에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는데 내가 기다리지 않거나 심지어 도망쳐버린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속상하시겠습니까? 물론 저는 도망쳐버리지는 않을 것이고 여러분도 그러실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저도 무성의하게 맞이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청소도 안 한 채로 주님을 맞이하고, 음식 장만은 고사하고 차라도 준비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않는. 왜 이런 얘기를 하냐 하면 요즘 제 내적 상태가 어지럽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아니 무척 사랑하지만, 19일에 있을 음악회에 저의 신경이 온통 가 있는 것입니다.

음악회 때문에 저의 내적 상태가 어지럽고 음악회 때문에 정신이 나간 것이니 주님이 오실 때 저는 청소가 안 된 상태이고, 주님이 오실 때 저는 집을 나간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러므로 올해 저의 깨어 있음은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곧 음악회로 신경 쓸 것이 많을지라도 그런 가운데서도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잃지 않고 주님께 깨어 있는 것 말입니다. 아무튼 올해 저는 이런 면에서 길잃은 양인데 그런데도 저를 찾아오실 주님께 죄송해하며 감사드리는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는 어디에서 기쁨을 찾고 있는가?

참 묘한 일입니다. 나무들은 걸치던 옷들을 다 벗고서 겨울을 나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옷을 겹겹이 덧입고서 겨울을 납니다. 겨울나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채웁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자신을 그렇게 채우는 바람에 그분이 들어오시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도 자신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요? 비워진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에 대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의 ‘목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인류라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이 비유는 “목자의 기쁨”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리고 그 이유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마태 18,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비록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의 기쁨’ 입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결국, 이 비유의 정점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사랑’을 행함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이 지극하신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목숨을 바쳐 ‘이 사랑’을 행하셨고, 바로 그 일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자이신 ‘당신의 소명’이요,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사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보다 우리 ‘자신의 뜻’과 ‘자기 기쁨’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대체 어디에서 기쁨을 찾고 있는가?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8,14
아버지의 뜻

 

주님!
당신 기쁨이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너 어디 있느냐?”하고 
먼저 찾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당신처럼, 
저도 먼저 형제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제 사랑의 소중함보다 
당신 사랑의 소중함을 
먼저 보게 하시고,
‘당신 뜻’의 소중함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야생마가 날뛰는 동안 조련사는 등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도입] 복수심에 먹힌 영혼, 에이합 선장

허먼 멜빌의 고전 소설 『모비 딕』에는 거대한 흰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합 선장이 등장합니다. 다리를 잃은 상실과 육체의 고통은 그에게 겸손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래에 대한 광기 어린 복수심에 사로잡혀, 선원들의 만류와 불길한 징조들, 그리고 하느님의 경고를 모두 무시했습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치며 하느님의 질서에 대항했습니다.

"태양을 쳐서 떨어뜨릴 수만 있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칠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작살 밧줄에 목이 감겨 고래와 함께 바닷속 깊은 곳으로 끌려들어 갔고, 그의 배와 선원들을 모두 파멸시켰습니다. 고난을 수용하지 못한 분노는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까지 침몰시킵니다. 고난 앞에서 온유해지지 못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든 결과는 파멸이었습니다.


[전개 1] 신을 죽이고 미쳐버린 초인

이러한 비극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체는 평생 극심한 편두통과 시력 저하, 위장병에 시달렸습니다. 육체의 가시는 그를 겸손한 신앙으로 이끌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주는 신을 거부하고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고난받는 인간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을 나약함으로 치부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초인(Übermensch)'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신이 어디 갔느냐고? 내가 말해 주지!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 나와 너희들이!"

그러나 하느님의 멍에를 벗어던진 인간 정신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광기에 사로잡혀,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매질 당하는 말을 끌어안고 울부짖다가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멍에를 거부한 자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파멸이었습니다.


[복음]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그 안식의 조건이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안식은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는 데서 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분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

하느님의 아드님조차 고난을 통해 순종을 완성하셨다면, 하물며 우리에게 고난은 하느님의 뜻에 길들여지기 위한 필수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신명기 말씀은 광야의 고통이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합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시험하시어, 뒷날에 너희가 잘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2.16).

광야의 고통은 우리 교만을 꺾고 낮추어(겸손), 복을 받을 그릇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입니다.


[전개 2] 이곳이 나의 대성당이다

고난 앞에서 온유해질 때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분이 있습니다. 베트남의 반 투안 추기경입니다. 젊은 주교였던 그는 공산 정권에 체포되어 빛도 없는 독방에 갇혔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제가 밖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왜 여기에 썩게 두십니까?"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바꿨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원한다. 이곳이 그분이 원하시는 자리라면 여기가 나의 교구다." 

그는 몰래 들어온 포도주 세 방울과 물 한 방울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감옥이라는 현실에 온유하게 순명하자, 그 더러운 독방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대성당이 되었고, 그를 감시하던 간수들은 그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고난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때, 고난은 더 이상 그를 가두지 못했습니다. 안식이 시작된 것입니다.


[심화] 야생마와 야곱

몽골의 초원에서 야생마를 잡아 길들일 때, 조련사는 말의 등에 올라타 끝없이 날뛰게 둡니다. 말은 자유를 뺏기지 않으려고 뒷발질을 하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저항합니다. 이것은 말에게 엄청난 고통입니다. 하지만 말이 탈진하여 거품을 물고, 조련사의 뜻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고 멈춰 서는 순간, 비로소 '교감(Joining up)’이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말의 야성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신호에 따라 천 리를 달리는 '명마의 능력'으로 승화됩니다. 고난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힘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재갈입니다.

구약의 야곱도 평생 잔꾀와 자신의 힘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뽁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 씨름하다가 엉덩이뼈(힘의 근원)를 얻어맞고 나서야 깨어집니다. 더 이상 제 힘으로 설 수 없게 된 야곱은 천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집니다. "당신이 저에게 축복하지 않으시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 자기 힘이 꺾인(위골된) 그 순간, 그는 '사기꾼 야곱'에서 '하느님과 겨룬 자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만을 의지하도록 때로는 우리 힘의 근원을 치십니다.


[결론] 온유해지면 고난이 멈춘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지금 감당하기 힘든 고난 속에 계십니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나" 

억울하고 분하십니까? 그렇다면 아직 훈련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야생마가 날뛰는 동안 조련사는 등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고난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에이합 선장처럼 저항하면 파멸하지만, 반 투안 추기경처럼 온유하게 받아들이면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품 안에서 쉬게 하려고 길들이시는 중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제 고집을 꺾으소서. 당신의 뜻이 제 안에서 이루어지소서. 이제 저항을 멈추고 당신의 멍에를 메겠습니다."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해지는 바로 그 순간, 고난의 폭풍은 멈추고 주님의 안식이 우리 영혼에 깃들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어떤 말을 제일 많이 듣느냐고 물었더니, 한 아이가 간단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잔소리”
 
다음은 2015년 미국의 ‘사회적 인지 및 감정 신경 과학’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 의과 대학과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 공동 연구팀이 평균 연령 14세의 청소년 32명에게 엄마의 잔소리를 녹음한 음성을 30초쯤 들려주고 뇌의 활성도를 측정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 엄마의 잔소리를 듣자마자 아이들 뇌의 부정 감각 처리 영역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감정적으로 즉각 과민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반면에 감정 조절이나 공감, 사고력을 담당하는 전두엽, 측두엽의 접합부는 비활성화되었습니다. 즉, 아이들이 생각을 멈추고 감정에 잠식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이해와 지지다.”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감정적이지 않고, 사랑으로 함께하는 아이로 성장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감정적으로 또 세상의 관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게 사랑하며 살 수 있게 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양 백 마리는 개인이 소유하기에 꽤 큰 규모의 재산입니다. 여기서 목자는 예수님을, 양 떼는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습니다. 이는 연약함이나 유혹으로 인해 공동체에서 멀어진 신자를 의미합니다. 
 
경제적 타산(99 vs 1)을 초월한 ‘사랑의 논리’를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목자이신 주님에게는 사랑으로 그 ‘하나’가 전체만큼 소중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마리를 찾게 되면 기쁨이 가득 차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죄인이나 방황하는 신자가 돌아왔을 때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형제가 길을 잃었을 때, “어쩔 수 없다”라며 방치하지 말고, 끝까지 찾아 나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양이 스스로 목자를 찾아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보여주셨던 사랑의 논리를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오늘의 명언

포기하면 그 순간 경기는 끝나는 겁니다(이노우에 다케히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을, 되찾음에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뜨겁게 다시 만납니다. 하느님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구원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은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아픈 곳을 그냥 두지 않고 아픈 곳을 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잃은 이가 누구인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대체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양 한마리입니다. 그분은 기다리는 하느님이 아니라 움직이고 찾아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잃은 양 한마리를 다시 찾으신 하느님의 기쁨은 잔치를 여는 축제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잃었던 사랑이 돌아오고, 아파했던 관계가 치유되는, 구원이 완성되는 우리 삶의 참된 기쁨입니다.

이것이 잃은 양을 다시 찾으신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잃은 양이 돌아오는 순간은 단순한 위치 이동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방향이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바뀌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관계적 자각에 눈뜨는 회개입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의 뜻은 단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모두가 사랑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기쁨입니다.

아버지 사랑으로 돌아오는 우리 마음의 참된 변화가 진정한 회개이며 진정한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한 영혼을 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보고 배우는 기쁜 은총의 날 되십시오.

 

 

 

이사야서 40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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