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시온 백성아. 주님이 민족들을 구원하러 오신다. 주님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고, 너희 마음은 기쁨에 넘치리라.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가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기꺼이 성자를 맞이하여 천상의 지혜로 성자와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7일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11,1-10)
그는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리라. - 제 2독서
(로마 15,4-9)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여 주십니다. - 오늘 복음
(마태 3,1-1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사 11,1-10
오늘 제1독서
그는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리라.
그날
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3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4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5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8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로마 15,4-9
오늘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여 주십니다.
형제 여러분,
4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5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6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8 나는 단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조상들이 받은 약속을 확인하시고,
9 다른 민족들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칩니다.”
마태 3,1-12
오늘 복음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1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3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4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7일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
✚ 서울 창5동성당 소개 00:20
✚ 미사시작 01:27
✚ 강론시작 15:3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기다림이 아니라 다가오심을 바라보는 시간
대림 제2주일에 듣는 복음의 주제는 광야의 세례자 요한이 재촉하는 회개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하늘 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다는 것을요.
우리말로 ‘대림’(오기를 기다림)이라고 옮겨지는 라틴 말 ‘아드벤투스’는 다가옴, 가까워짐, 도착, 도래를 뜻합니다. 누가 오시나요? 누가 도착하시나요? 하느님이십니다. ‘대림’이라는 우리말에서는 기다린다는 ‘우리’의 행위가 드러나는데, 라틴 말은 ‘오시는 분’께, ‘하느님께서 오심’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지난 4월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기다리는 우리 자신보다 오시는 분께 초점을 맞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첫걸음이 바로 회개입니다. 나를 만나러 오시는 그분께서 나를 쉽게 찾아 만나시도록 숨지 말아야겠지요. 하느님께서 오실 때 두려워 숨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담입니다. 그가 숨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찾으실 수 있게 하려면 깨끗한 마음으로 자기 자리에 충실히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 회개의 구체적 표현 하나가 제시되는데, 바로 형제적 일치입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로마 15,5-7).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존재적 회개
오늘 대림 제2주일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런 것 같습니다.
이 대림절에 우리가 오시길 기다리는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오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에 가져오는 분이시다.
그분과 함께 오는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그것은 오늘 첫째 독서가 얘기하는 그런 나라이다.
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개이며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대림절에 오시길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가져오는 분입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려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하느님 나라는 정말로 Fantastic/환상적이고, 이 하느님 나라의 평화는 완벽한 평화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완벽한 평화는 완벽한 정의에 바탕을 둡니다. 이 세상의 정의와는 천지 차이 곧 하늘과 땅 사이만큼 차이 납니다. 이 땅의 정의, 이 세상의 정의는 타락했습니다.
저마다 정의를 외치는데 그것이 다 자기식의 정의입니다. 자기가 정의롭다고 하고 자기 기준이랄까 자기중심의 정의입니다. 그래서 정의는 좋은 것이지만, 타락했다고 하는 것인데 모든 권력자가 다 정의를 얘기했지만, 그 반대였습니다.
힘 있는 자들의 정의이고 그래서 힘없는 사람들은 법의 이름으로 억압받고, 고통받고, 희생당하였지요. 제 식구 감싸기가 전 정권에 이어 지금 정권에서도 이어지고, 그래서 정의는 이 땅에서 계속 타락하는데 그것은 사랑이 없으면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죽이고 남을 이기려는 세력들에게 정의는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힘이 있으면 정의이고, 힘이 없으면 불의가 되고 말며, 법도 힘이 있는 사람들 편이지 없는 사람들 편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늘의 정의는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의 정의에 입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고”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치십니다.” 그 결과는 완전한 평화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한쪽으로 기울어짐이 없고, 그래서 경쟁도 싸움도 없고 사랑과 상생과 평화만 있습니다. 인간끼리만 평화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짐승 사이에도 상생과 평화가 있고, 짐승 사이에도 약육강식이 없습니다.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이런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우리 모두 바라고 모든 이가 바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 생각에 호전주의자와 평화주의자 사이에 누가 더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평화주의자들이 더 많을 것 같지만, 지금 평화가 없는 것을 보면 전쟁광은 아니더라도 호전주의자들이 더 많기에 평화가 없습니다.
제 생각에 싸움은 힘 있는 사람들이 일으키고 이익을 보는 사람이 일으킵니다. 싸워서 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싸움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보시고, 중국과 대만을 보십시오. 누가 전쟁을 일으켰고, 누가 전쟁을 일으킬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진정 평화주의자이고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까? 세례자 요한은 오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아주 심한 욕을 하는데 우린 독사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음수성유(牛飮水成乳) 사음수성독(蛇飮水成毒), 소도 물을 먹고 뱀도 같은 물을 먹지만 소는 우유를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들지요. 뱀에게는 남을 살리는 우유를 줘도 남을 해치는 독으로 만들 것입니다.
지금 나는 이웃을 살리는 사람입니까? 죽어가게 하는 사람입니까? 내 입에서 사랑의 말이 나갑니까? 독설(毒舌)이 나갑니까? 뱀과 같은 나라면 소와 같은 나로 존재적 회개를 해야 할 시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주일이고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대림 제1주일>에 ‘그분이 오시니, 기뻐하고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다가 온 주님을 맞이할 채비를 서둘러라 하십니다. 곧 그분을 맞이하는데 합당한 자가 되라 하십니다. 동시에,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주님의 영이 머무르는 분”(이사 1,2)으로 소개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오신 그분이 “할례 받은 이들의 종”(로마 15,8)이 되셨음을 말합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분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11)
<첫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사실 “뒤”가 아닌, “지금” 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뒤”지만, 시점으로는 “지금”입니다.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분이 ‘드디어 오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분이 지금 ‘막 오고 계신다.’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줍니다. 곧 그분께서 미래가 아닌, ‘지금 오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우리의 관심을 자기 자신이 아닌, ‘지금 오시는 분’에게로 집중시킵니다. 자신은 단지 그분의 ‘길을 닦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곧 ‘주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입니다. 자신을 주변으로 밀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 바로 여기에 우리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둘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곧 “종” 될 자격마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인격을 만납니다. 사실, 타인을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이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어리고 후배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종’의 자격마저도 없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영웅적인 겸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깨달은 데서 나오는 겸손입니다.
그래서 <셋째 증언>에서 요한은 그분께서는 당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분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곧 ‘신원의 차이’와 ‘사명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은 그분께서 ‘용서할 수 있는 분이요,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그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대림 제2주일을 맞으면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세례 때 이미 받은 “새로운 생명”과 “용서”를 선포하고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는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준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곧 이 세상과 이 시대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외침입니다.
이를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7 참조).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3,3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회개의 영을 불어 넣으시어
굽은 데를 곧게 하소서.
낮아지고 작아지고
무력해지고 가난해지는
당신의 길을 걷게 하소서.
당신을 위하여 걷고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교회는 ‘희망’을 길들이는 새로운 세례자 요한
태국의 한 감동적인 광고 영상이 있습니다. 사춘기 소녀가 엄마와 다투고 가출을 합니다. 배는 고픈데 수중에 돈은 한 푼도 없습니다. 볶음밥 가판대 앞을 서성이는 소녀를 보고 주인아줌마가 갓 볶은 따뜻한 밥을 내어줍니다.
"돈은 됐다. 그냥 먹어라."
소녀는 허겁지겁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멈추고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볶음밥에 양파가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양파를 싫어해서 엄마는 늘 양파를 빼고 볶음밥을 해주셨거든요. 이상하게 여긴 소녀에게 아줌마가 말합니다.
"네 엄마가 다녀갔단다. 혹시 네가 오면 밥을 해 먹이라고 돈을 맡기고 갔어. 양파는 빼고, 계란 후라이는 반숙으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더라."
소녀는 밥을 먹으며 깨닫습니다. 내 뜻대로 살기 위해 집을 나왔지만, 엄마의 사랑이 있는 집이 여기보다 훨씬 행복한 곳이라는 것을요. 소녀는 밥그릇을 놓고 아줌마에게 핸드폰을 빌려 엄마에게 전화를 겁니다. 이 광고 속의 '볶음밥 아줌마'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아줌마는 자신이 엄마인 척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소녀에게 엄마의 사랑을 맛보게 해 주고,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주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세례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반 대학을 다니던 시절,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더 큰 행복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려 5년 동안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 속에 묘사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은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책은 저에게 볶음밥 아줌마였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을 버리고 사제가 되면, 제자들처럼 저런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겠구나."
그 희망을 보았기에 저는 세상의 행복(대학, 성공)을 미련 없이 버리고 신학교라는 광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왜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고 행복을 찾아 떠나는데, 왜 어떤 이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은 "행복하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행복을 찾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처지에서 불평만 하며 주저앉아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익숙한 불행에 중독된 것'입니다.
어느 나그네가 툇마루 밑에서 계속 낑낑거리는 개를 보고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개는 왜 저렇게 웁니까?"
주인이 무심하게 답합니다.
"아, 깔고 앉은 자리에 삐죽 튀어나온 못(Nail)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럼 일어나면 되지 않습니까?"
"일어날 만큼 아프지는 않으니까요. 그냥 낑낑대며 불평할 정도만 아픈 겁니다."
우리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사는 게 힘들고 허무하다고 불평하지만, 박차고 일어나 세례자 요한을 찾아갈 만큼 간절하지는 않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40년 넘게 복역한 장기수 레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감옥 벽이란 게 참 웃기지. 처음에는 미워하다가, 차츰 익숙해지고, 세월이 지나면 결국 의지하게 되거든. 그게 바로 '길들여진다(Institutionalized)'는 거야."
세속의 삶은 감옥이지만, 우리는 그곳에 길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와서 "회개하라, 더 큰 행복이 있다!"고 외쳐도, 그 변화가 두려워 귀를 닫아버립니다. 불평하는 것이 도전하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기력을 깨고 일어날 힘은 어디서 올까요? 바로 '희망'입니다. 그런데 이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내가 이미 맛보았던 행복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에서 나옵니다.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서 부대가 전멸하고 홀로 남은 병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도 죽었으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 뒤, 그 병사가 혈혈단신으로 밀림을 헤치고 구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손에 꽉 쥐고 있던 꼬깃꼬깃한 지도를 보고 감탄했습니다.
"역시 지도가 있어서 살았구나!"
하지만 그가 펼쳐 보인 지도는 밀림의 지도가 아니었습니다. '런던 지하철 노선도'였습니다. 그는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그 지도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런던에서 저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었지. 주말에는 저 역에서 내려 데이트를 했었지. 나는 그 행복을 안다. 나는 반드시 살아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에게 런던 지하철 지도는 종이 조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미 살아보았고 체험했던 '확실한 행복의 증거'였습니다. 그 행복의 기억이 정글의 고통을 이기게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작은 희망의 성취를 맛본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더 큰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기력이 학습되듯이, 희망도 학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학습시키는 곳', 곧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꿀과 메뚜기만 먹으며 절제했듯이, 교회는 우리에게 세속, 육신, 마귀(삼구)를 끊어보라고 가르칩니다.
"십일조를 내어보십시오. 돈에 대한 집착을 끊으면 더 자유로워집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해 보십시오. 자존심을 꺾으면 평화가 옵니다."
"봉사하고 나누어 보십시오. 몸은 힘들어도 기쁨이 솟아납니다."
이런 가르침이 부담스럽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런던 지하철 노선도를 쥐여주는 훈련입니다. 세속, 육신, 마귀를 끊고 노력하면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이 없는 신자는, 단팥빵을 먹어보지 못한 아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지금 교회가 위기인 이유는, 세속·육신·마귀를 끊으라는 세례자의 가르침은 사라지고, "복 받으세요, 부자 되세요"라는 세상의 희망만 팔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세상과 똑같은 행복을 주는 교회라면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희망을 주지 못하는 부모가 버림받듯, 세속적 희망만 주는 교회는 필요 없어집니다.
'체나콜로(Cenacolo) 공동체'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전 세계의 마약 중독, 알코올 중독 청년들이 모여 사는 가톨릭 공동체입니다. 이곳엔 TV도, 핸드폰도, 약물 치료도 없습니다. 오직 '기도'와 '노동'뿐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감옥입니다.
그곳에 페데리코라는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고, 삶의 의미를 잃은 채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그곳의 규칙을 견딜 수 없어 도망치려 했습니다. "왜 나를 가두느냐"고 반항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형제들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위해 밤새 기도해주고, 묵묵히 밭을 갈며 땀 흘리는 기쁨을 보여주었습니다. 페데리코는 형제들의 눈빛에서, 마약이 주는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평화'를 보았습니다.
그는 세속의 쾌락(마약)을 끊고, 육신의 편안함을 끊고(노동), 마귀의 유혹을 끊는(기도) 치열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 고통의 과정을 통과했을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세상은 나에게 마약을 주며 잠시의 쾌락을 팔았지만, 이곳은 나에게 고통을 통해 영원한 기쁨을 얻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교회는 이런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못 위에 앉아 낑낑대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세속, 육신, 마귀를 끊으면 진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대림 시기, 세상의 쾌락을 끊고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불편함'을 감수하십시오. 그 작은 승리의 체험들이 모여, 여러분을 구원자 예수님께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희망의 지도가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 우정이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들어가고 신부가 된 후에는 그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환경과 성장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도 있듯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면 서로 통합니다. 하지만 환경과 성장이 다르게 되면 만남이 어색해집니다. 애벌레와 나비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계속 친해지는 방법은 둘 다 성장하거나 둘 다 퇴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릴케는 자기 책에서 ‘같이 있는 게 사랑이 아니라 서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게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것만이 같이 성장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그토록 강조하셨던 것도 우리가 모두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성장해야 하느님 나라에 함께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그 대상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진정 그의 성장을 위해 사랑하고 있나요? 자기 성장을 막는 사람과는 계속 함께할 수 없고, 그래서 멀어집니다. 하지만 나의 사랑으로 그의 성장을 도와주고, 실제로 성장하면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가 생활한 유다 광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광야’는 시련의 장소이자,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처음 계약을 맺고 사랑을 속삭였던(호세 2,16) 영적 쇄신의 장소입니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요한을 구약의 예언 전통(특히 이사야와 엘리야)을 잇는 인물로 묘사하며, 예수님이 구약의 성취임을 강조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라고 선포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죄의 뉘우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완전히 돌리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제 ‘하늘 나라’, 즉 하느님의 통치권이 이루어지는 시기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마태 3,7)라고 비난합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속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위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서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선민사상에 빠져있어서 자동으로 구원의 특권을 얻을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을 꾸짖고, 삶의 변화인 회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 시간은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마태 3,10)라고 말하면서, 아주 임박했음을 강조합니다.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요한이 요구한 것은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합당한 열매’였습니다. 신부님, 우리가 신자들에게 강조해야 할 회개는 고해소에서의 고백을 넘어, 일상에서 맺어지는 정의와 사랑의 구체적인 열매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커지셔야 한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고백을 기억하면서, 지금 당장 삶의 방향을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함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랑을 통한 성장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분노를 품고 사는 것은 독을 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틱 낫 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열매 없는 신앙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회개는 단순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는 삶의 새로운 방향 전환입니다.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새롭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묻는 은총의 대림입니다. 요한의 회개는 새로운 삶을 향한 우리의 결단입니다. 이와 같이 삶의 변화, 선택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열매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맺게 하는 은총의 열매입니다. 하느님께 내어 맡긴 존재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입니다. 회개의 열매란 우리의 존재가 다시 하느님 사랑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생활 속 사랑의 실천이 그만큼 중요한 생활의 열매입니다. 곧 마음의 변화이며 관계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의 탄생입니다.
참된 회개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인권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인간 존엄을 보호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며, 사회적 정의와 약자를 위한 선택을 통해,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신앙의 사회적 실천이 회개의 구체적인 열매입니다. 생활 속에서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은총의 대림 제2주일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회개의 열매는 나날이 성숙하는 우리의 인격입니다. 하루하루 복음의 빛 아래 익어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로마서 15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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