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오시어, 어둠 속에 숨은 것을 밝히시고, 모든 민족들 앞에 당신을 드러내시리라.
전능하신 하느님, 주 그리스도 오실 길을 마련하라 하셨으니 나약한 저희가 천상의 영약으로 힘을 얻어 구원의 길을 닦아 나아가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2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40,25-31)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신다. - 오늘 복음
(마태 11,28-30)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이사 40,25-31
오늘 제1독서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신다.
25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8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9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마태 11,28-30
오늘 복음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2월 10일
정재웅 마티아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48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은총이 나를 지고 간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는 모든 사람을 향한 보편적 초대이지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다른 초대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11,29)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마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과 말씀을 설명하는 내적 원리입니다. 온유는 외적 유순함과 소극성, 무른 성품과는 다르며, 겸손도 자기 비하가 아니라 남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고 남을 돌보느라 자신을 잊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온유와 겸손은 그분께 배워야 할 내용일 뿐 아니라 그 동기로 드러납니다. 곧 온유하고 겸손하시니 그분께 배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 멍에”(11,29)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만이 아니고 그분께서 지고 가시는 멍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세상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지켜 줄 것입니다. 그분의 짐은 세상의 짐보다 가볍습니다.
“세상 주인들의 짐은 종들의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줍니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그리스 교부 총서』(Patrologia Graeca), 56, 780).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대리 만족과 대리 안식을 경계하며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대림절 독서와 복음은 오실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속 얘기하는데 오늘은 주님께서는 안식을 주러 오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안식을 주러 오시는데 나는 그분께 가서 안식을 얻는가?
우리는 당연히 이런 질문과 성찰을 오늘 하게 되겠지요? 다시 말해서 오라고 하시는 주님께 가서 안식을 얻는가? 아니면 다른 데서 안식을 얻는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친구나 부모 또는 애인에게서 안식을 찾고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점쟁이나 무당에게서 안식을 찾곤 하지요.
어제는 음악 방송을 들으면서 어딜 갔는데 듣고 싶은 음악을 청하면서 자기 사연도 전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요즘 한창 유행인 독감을 앓는 분들이 밤새 끙끙 앓은 고통을 방송에 호소하면서 음악의 위로인지 아나운서의 위로인지 그런 것에서 위로받으려는 거였습니다.
이런 고통은 이렇게 위로받으며 안식을 얻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위로는 이런 정도로도 충분하겠습니까? 주님의 위로를 아니 받고도 안식을 얻을 수 있겠으며 이러한 위로와 안식에 안주해도 되겠습니까?
왜 이런 얘기하는지 여러분도 즉시 감이 올 것입니다. 이런 묵상을 하면서 제게 즉시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대리만족’이나 ‘언 발에 오줌 누기’ 같은 말들이 그것이고, 어쨌거나 참 안식이 아닌 것들로 대리 안식 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리만족이 나쁘다고 하는 이유는 그 만족이 나쁜 것이기에 나쁜 것도 있지만 그 만족은 나쁘지 않지만 참 만족을 찾지 않게 하기에 나쁜 것이 더 큰 이유지요. 그러니까 남을 괴롭히는 것으로 만족하면 그 만족은 자체로 나쁜 것이지만 사랑의 만족 대신 먹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니어도 사랑의 만족을 추구하지 않게 하기에 나쁜 것입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위로와 안식을 찾는 것도 바로 이런 문제, 곧 대리 위로와 대리 안식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나쁘지 않고 필요하겠습니다. 곧 인간의 위로를 통해서 하느님의 위로를 느끼게 되는 위로, 그의 인도로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서 안식을 누리는 안식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서 평안을 누리는 안식이 오늘 주님께서 주시겠다는 안식이며 겸손과 온유라는 멍에로 짐을 지라는 오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따를 때 주시겠다는 안식인데 주님의 이 안식 초대에 우리가 응할 것인지, 다른 안식으로 대리만족할 것인지 도전받는 오늘 우리입니다만, 우리는 당연히 대리만족과 대리 안식을 깨어 경계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품어야 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멍에를 멘다.”는 말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멍에’란 등에 메어 짐을 질 수 있게 하여 짐을 편하고 가볍게 해 주며, 소나 말 등의 동물에게 쟁기를 채우거나, 써레나 수레를 끌게 하기 위해 목과 등에 감아 거는 기구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위에 걸쳐지지만, 짐을 편하게 지거나 끌게 합니다. 그것은 짐 아래에 눌리지만 짐을 가볍게 합니다.
이토록, ‘멍에’는 짐을 함께 지거나 함께 끌며 동행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 위에 놓이지만 온유하고, 짐 아래에 놓여 겸손합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에,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그러기에,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는 말씀은 단지 ‘당신을 모방하라’ 혹은 ‘당신의 경험을 배우라’는 의미를 넘어서, 당신과 함께 ‘멍에’를 메고 ‘짐을 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길”을 제시하는 스승인 것이 아니라, 함께 길을 가시는 동행자요 안내자이며, 동시에 바로 “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 됨”이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한 ‘멍에’를 잡고 함께 밭을 가는 것입니다. 함께 수레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곧 구원의 ‘멍에’를 메고 공동으로 구원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멍에’로 우리 몸에 감아 두르는 것입니다. 이토록,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시고,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마음을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신 이 마음을 우리 마음에 품어야할 일입니다. 곧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품는’(필립 2,5 참조) 일입니다. 아니,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그러니,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 마음”에서 사랑을 퍼 올리는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보고 사람들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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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고
묶지만 옭아매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야생마가 날뛰는 동안 조련사는 등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도입] 복수심에 먹힌 영혼, 에이합 선장
허먼 멜빌의 고전 소설 『모비 딕』에는 거대한 흰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합 선장이 등장합니다. 다리를 잃은 상실과 육체의 고통은 그에게 겸손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래에 대한 광기 어린 복수심에 사로잡혀, 선원들의 만류와 불길한 징조들, 그리고 하느님의 경고를 모두 무시했습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치며 하느님의 질서에 대항했습니다.
"태양을 쳐서 떨어뜨릴 수만 있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칠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작살 밧줄에 목이 감겨 고래와 함께 바닷속 깊은 곳으로 끌려들어 갔고, 그의 배와 선원들을 모두 파멸시켰습니다. 고난을 수용하지 못한 분노는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까지 침몰시킵니다. 고난 앞에서 온유해지지 못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든 결과는 파멸이었습니다.
[전개 1] 신을 죽이고 미쳐버린 초인
이러한 비극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체는 평생 극심한 편두통과 시력 저하, 위장병에 시달렸습니다. 육체의 가시는 그를 겸손한 신앙으로 이끌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주는 신을 거부하고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고난받는 인간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을 나약함으로 치부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초인(Übermensch)'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신이 어디 갔느냐고? 내가 말해 주지!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 나와 너희들이!"
그러나 하느님의 멍에를 벗어던진 인간 정신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광기에 사로잡혀,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매질 당하는 말을 끌어안고 울부짖다가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멍에를 거부한 자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파멸이었습니다.
[복음]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그 안식의 조건이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안식은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는 데서 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분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
하느님의 아드님조차 고난을 통해 순종을 완성하셨다면, 하물며 우리에게 고난은 하느님의 뜻에 길들여지기 위한 필수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신명기 말씀은 광야의 고통이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합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시험하시어, 뒷날에 너희가 잘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2.16)
광야의 고통은 우리 교만을 꺾고 낮추어(겸손), 복을 받을 그릇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입니다.
[전개 2] 이곳이 나의 대성당이다
고난 앞에서 온유해질 때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분이 있습니다. 베트남의 반 투안 추기경입니다. 젊은 주교였던 그는 공산 정권에 체포되어 빛도 없는 독방에 갇혔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제가 밖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왜 여기에 썩게 두십니까?"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바꿨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원한다. 이곳이 그분이 원하시는 자리라면 여기가 나의 교구다."
그는 몰래 들어온 포도주 세 방울과 물 한 방울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감옥이라는 현실에 온유하게 순명하자, 그 더러운 독방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대성당이 되었고, 그를 감시하던 간수들은 그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고난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때, 고난은 더 이상 그를 가두지 못했습니다. 안식이 시작된 것입니다.
[심화] 야생마와 야곱
몽골의 초원에서 야생마를 잡아 길들일 때, 조련사는 말의 등에 올라타 끝없이 날뛰게 둡니다. 말은 자유를 뺏기지 않으려고 뒷발질을 하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저항합니다. 이것은 말에게 엄청난 고통입니다. 하지만 말이 탈진하여 거품을 물고, 조련사의 뜻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고 멈춰 서는 순간, 비로소 '교감(Joining up)’이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말의 야성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신호에 따라 천 리를 달리는 '명마의 능력'으로 승화됩니다. 고난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힘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재갈입니다. 구약의 야곱도 평생 잔꾀와 자신의 힘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뽁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 씨름하다가 엉덩이뼈(힘의 근원)를 얻어맞고 나서야 깨어집니다. 더 이상 제 힘으로 설 수 없게 된 야곱은 천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집니다.
"당신이 저에게 축복하지 않으시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창세 32,27).
자기 힘이 꺾인(위골된) 그 순간, 그는 '사기꾼 야곱'에서 '하느님과 겨룬 자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만을 의지하도록 때로는 우리 힘의 근원을 치십니다.
[결론] 온유해지면 고난이 멈춘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지금 감당하기 힘든 고난 속에 계십니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나" 억울하고 분하십니까? 그렇다면 아직 훈련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야생마가 날뛰는 동안 조련사는 등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고난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에이합 선장처럼 저항하면 파멸하지만, 반 투안 추기경처럼 온유하게 받아들이면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품 안에서 쉬게 하려고 길들이시는 중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제 고집을 꺾으소서. 당신의 뜻이 제 안에서 이루어지소서. 이제 저항을 멈추고 당신의 멍에를 메겠습니다."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해지는 바로 그 순간, 고난의 폭풍은 멈추고 주님의 안식이 우리 영혼에 깃들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몸이 아프면 자리에 눕습니다. 마음이 아프면 어떨까요? 역시 눕게 됩니다. 의욕이 사라지고 불안 증세가 심해지면서 그냥 누워있게 됩니다. 이렇게 누워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많은 생각 안에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이때 많은 생각이 들러붙게 되고, 더 힘든 상태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어떻게든 일어나 움직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부정적인 생각들,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마음은 먼지와 같아서 가만히 있으면 쌓이지만, 움직이면 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아프면 더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몸에 붙은 부정적인 마음을 털어내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스스로 일어날 힘을 갖지 못합니다. 그냥 주저앉아 절망하면서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세분화하여 613개의 계명으로 만들고, 이를 사람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사실 계명은 구원의 기쁨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지키지 못하면 벌을 받는다’라는 공포와 억압의 짐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고생하며’는 단순히 피곤한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탈진할 정도로 힘들게 일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진’은 스스로 진 것이 아니라 남에 의해 강제로 짐이 지워진 상태입니다. 바로 죄의 무게와 삶의 고통에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께 오라고 하십니다. 율법이 아닌 사랑이신 주님께 오라는 것이지요.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소나 말의 목에 걸어 쟁기나 달구지를 끌게 하는 나무 들보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을 말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편하겠습니까? 이 주님의 멍에는 목을 조이는 것이 아니라 딱 맞아서 일하기 좋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짐은 결코 실천하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가벼운 이유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처럼 사랑으로 하는 고생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께 가야 합니다. 나를 늘 좋은 쪽으로 이끌어주시는, 부족한 나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주님께 빨리 가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에서 벌떡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실제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기는 우리가 어렵고, 불행하고, 불만족스러울 때 도래한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과 진정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때문이다(M. 스캇 펙).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하느님께 내맡기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의 초대는 온유합니다. 먼저 안식의 은총에 우리를 머물게 하십니다. 마음의 짐을 덜어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은 업무량이나 환경보다 자기비난적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내어주는 것이 휴식입니다. 도피가 아니라 관계 회복을 통해 얻는 휴식입니다.
짐을 벗는 길은 그 짐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매달리는 마음을 내려놓는 데 있습니다. 마음의 중심을 잃을 때 삶의 무게는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짐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원래의 고요로 돌아갑니다. 힘을 뺄 때 비로소 참된 힘이 생깁니다. 우리의 힘으로 짐을 지는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는 삶입니다.
쉼은 우리의 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짐을 지는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지친 우리를 하느님의 힘으로 다시 일으키는 가장 좋은 쉼의 은총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내어맡기는 휴식이 참된 믿음입니다.
이사야서 40장 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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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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