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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1/12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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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거룩한 이들은 주님의 가르침과 아버지의 법을 따라 끝까지 한마음 한 믿음으로 형제들을 사랑하였네. 

주님, 복된 요사팟 주교가 성령을 충만히 받아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성령의 힘으로 형제들을 위하여 기꺼이 생명을 바치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1월 12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12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지혜 6,1-11)
    임금들아, 들어라. 지혜를 배워라.

  • 오늘 복음
    (루카 17,11-19)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지혜 6,1-11
오늘 제1독서

임금들아, 들어라. 지혜를 배워라.

1 임금들아,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아, 배워라. 

2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수많은 민족을 자랑하는 자들아, 귀를 기울여라. 

3 너희의 권력은 주님께서 주셨고 통치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셨다. 그분께서 너희가 하는 일들을 점검하시고 너희의 계획들을 검열하신다. 

4 너희가 그분 나라의 신하들이면서도 올바르게 다스리지 않고 법을 지키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5 그분께서는 지체 없이 무서운 모습으로 너희에게 들이닥치실 것이다. 정녕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6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 

7 만물의 주님께서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누가 위대하다고 하여 어려워하지도 않으신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8 그러나 세력가들은 엄정하게 심리하신다. 

9 그러니 군주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10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11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7,11-19
오늘 복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12일
박진형 비오 신부

 

✚ 성 요사팟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2

✚ 강론시작 07:57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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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나 같은 사람과 살아 주어서 고마워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아버지가 정년퇴직을 몇 년 앞두고 위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수술 뒤에도 힘겹게 투병하시면서 퇴직 때까지 성실히 근무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못지않게 수고하신 분은 어머니셨습니다. 날마다 아버지의 점심 도시락과 간식을 준비하셨고, 가려움으로 잠 못 이루시는 아버지와 늦게까지 화투를 치시고는 하였지요. 그러다 졸음이 쏟아지면 가까스로 잠드셨습니다.

어느 날 새벽 어머니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뜨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당신을 내려다보고 계셨는데, 연신 눈물을 쏟으셨답니다. “왜 그래요?” 하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울먹이며 말씀하시더랍니다. “나 같은 사람하고 지금까지 살아 주어서 고마워!” 그날 이후 아버지는 전혀 다른 분이 되셨습니다.

아버지는 많은 이의 인정과 신뢰를 받으셨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참 좋은 분이셨지만, 가족들에게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당시의 여느 아버지처럼 가부장적이셨고, 술기운을 빌려 자녀들에게 손찌검을 하시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그런 분이 하루아침에 바뀐 것입니다. 아버지는 퇴직 뒤에 어머니와 함께 날마다 미사를 다니시고, 두 분은 매리지 엔카운터(ME) 부부가 되어 날마다 열심히 기도하셨지요.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루카 17,15-16). 아버지의 모든 변화는 어느 날 새벽, 이러한 ‘감사’가 아버지의 마음에 찾아들며 시작되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하고 지금까지 살아 주어서 고마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착각적 만족

우리가 인생무상이라고 하듯 권력도 무상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오늘 지혜서가 말하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권력이 있을 때는 권력이 항상 있으리라고 착각합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권력에 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술을 좋아하는 것은 술에 취하게 되면 그때만은 세상이 다 내 것 같고 안 되는 일 없이 다 될 것 같듯 권력에 취해도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을 저는 ‘착각적 만족’이라고 명명하겠습니다.  

권력에 취하면 이 착각적 만족으로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상하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새 정권이 그러지 않는지 염려합니다. 지난 정권이 그러다 망한 것을 보고도 권력에 취해가는 조짐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힘의 속성과 권력의 속성 때문입니다.  

힘이 없으면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데 힘이 있으면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힘이 있는데도 자기 뜻대로 하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난과 겸손이 없으면 자기 뜻대로 하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난과 겸손이란 돈 또는 재력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힘과 권력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고 어쩌면 힘과 권력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가난이고 겸손입니다.  

그런데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 것이 아니라고 하기 쉽지 않듯이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 것이 아니라고 하기 쉽지 않지요. 하느님 앞에서의 가난과 겸손이 아니라면 그렇습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하고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진정한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 있는 겸손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느님 앞에 있을 때 겸손하기가 쉽지 사람들 앞에 있을 때 겸손하기가 쉽습니까? 나보다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할 것이며, 그런 뜻에서 지혜서는 오늘 권력자들에게 이렇게 경고를 날립니다.  

“너희의 권력은 주님께서 주셨고 통치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셨다. 그분께서 너희가 하는 일들을 점검하시고 너희의 계획들을 검열하신다.” 

평범한 우리는 이런 권력자의 착각적 만족은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인생무상이란 것을 생각지 않는다면 마찬가지입니다. 인생무상입니다. 주먹 속의 모래처럼 힘이 점점 빠져나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셨던 건강도 하느님께서 도로 가져가실 겁니다. 이것을 머리로 알뿐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노년의 지혜요 신앙인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감사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오늘 <복음>에서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단 한 명만이 돌아와 감사를 드렸고, 그것도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7)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머지 아홉은 돌아와 감사드리지 않았을까? 또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열 명의 나병환자와의 인터뷰”라는 존슨 그나나바라남의 꽁트에서 한 기자는 ‘시간의 기차’를 타고 그 당시로 돌아가 그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이들 중에 한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치유된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그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소. 혹시 재발할지 모르지 않소. 그래서 나는 되돌아가지 않았소.”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시는 선행에 대해 사람들에게 감사를 기대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나는 감사드리는 일을 그만두었소.”

또 다른 사람은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에 감사하는 일을 까맣게 잊었소.”

또 다른 사람은 “나는 감사를 드리고 싶었소. 그런데 대부분이 돌아가지 않았소. 나는 언제나 다수를 따르오. 그래서 나도 돌아가지 않았소.”

그런데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단지 치유되어 건강을 회복한 사실에 대한 기쁨에 머물며, ‘치유를 주신 분의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은 건강을 회복하게 된 것보다, 오히려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었고, 그것은 ‘치유를 주신 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들의 차이는 ‘돌아옴’과 ‘새로운 출발’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베풀어진 자비를 입고, 그에 합당한 ‘응답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그를 새로운 구원의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에 합당한 삶으로의 변화된 삶이 바로 믿음의 삶이요 기적이요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 나병의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은 ‘감사’를 불러오고 감사에 합당한 삶으로의 전환을 가져옵니다.

이처럼, 감사하는 일은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의식하면서, 모든 삶을 지속시켜주고 있는 많은 기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그분을 볼 줄 아는 눈이야말로, 바로 감사의 눈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7,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주님!
감사하게 하소서.

청하기도 전에 듣고 계시는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베풀어지기도 전에 
이미 품으신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치유보다 치유시키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 깃든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무감각하지 않게 하시고
치유를 받고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은 말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

찬미 예수님

경기도 성남시 단대동에는 작은 개척교회인 '샬롬교회'가 있습니다. 이곳의 김정하 목사님은 루게릭병을 앓고 계십니다.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가고, 결국엔 숨 쉬는 근육마저 멈춰버리는 무서운 병입니다. 목사님은 이제 휠체어에 앉아 겨우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 컴퓨터 마우스로 세상과 소통하십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에게는 아주 특별한 다섯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필리핀 등지에 사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컴패션 후원 아동들입니다.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였던 그는 이 아이들을 도울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구두닦이’였습니다.

건강했던 시절, 그는 매일 새벽 기도를 마치면 구두 통을 메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의 구두를 닦아 번 돈, 그 피 같은 돈을 모아 아이들에게 보냈습니다. 루게릭병이 찾아와 손이 굳어가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구두솔을 놓지 않았습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구두약이 온통 옷에 묻어도,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몸도 성치 않으신데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목사님은 어눌해진 발음으로,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눈빛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 아이들은… 제 심장입니다. 심장이 멈추면 죽는 것처럼, 이 일을 멈추면 저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아이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 아이들이 목사님에게 무엇을 해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그들을 위해 자신의 ‘피’와 ‘땀’을 쏟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아이들은 그에게 남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요?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줄 때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나의 ‘피’를 쏟을 때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목숨보다 사랑하는 이유는, 자녀 안에 자신의 피와 살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가르쳐 준 비밀도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 왕자가 지구의 수많은 장미꽃을 보고 실망했을 때, 여우는 말합니다.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바친 시간 때문이야.”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에 있는 장미를 위해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바람막이를 씌워주었습니다. 그 수고와 희생의 시간이 있었기에, 그 장미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과 ‘책임’이, 어린 왕자가 지구의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의 별로 돌아갈 수 있게 한 ‘구원’의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고, 모두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뛰어난 ‘치유자’, ‘문제 해결사’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왜 그만 돌아왔을까요? 나머지 아홉 명에게 예수님은 그저 ‘병을 고쳐준 고마운 분’ 정도였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치유’라는 선물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선물을 가지고 각자의 삶으로, 세상 속으로 바쁘게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더러운 몸을 깨끗하게 해주신 분,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을 그냥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치는 ‘예배’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선언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9)

아홉 명은 ‘치유’를 받았지만, 이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치유는 육신의 문제 해결이지만, 구원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그분은 우리의 ‘문제 해결사’입니까, 아니면 ‘구원자’이십니까? 많은 신자가 성당에 와서 청합니다.

“주님, 이 병을 낫게 해주십시오. 이 사업이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우리 자녀가 잘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치유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단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아홉 명의 나병 환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주님을 잊고 세상 속으로 떠나버릴 것입니다.

김정하 목사님의 후원 아동들이 목사님의 도움만 받고 끝난다면, 그들은 목사님을 ‘이용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목사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면, 그들도 목사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편지를 쓰고, 기도하며,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신부님의 사랑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 그들은 신부님의 뜻을 이어받아 의사가 되고, 약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부님을 위해 자신들의 ‘피’와 ‘땀’을 쏟았습니다. 그러자 그들 안에서 이태석 신부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전부’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내어드렸을 때, 비로소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관념적인 신’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살아계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피를 쏟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심장’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분께 응답하고 있습니까? 주일 미사 한 시간 참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감사, 예배, 봉헌, 기도는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분께, 나의 ‘피’와 같은 소중한 것(시간, 재물, 마음)을 쏟아붓는 시간입니다. 이것 없이는 우리는 그분을 ‘구원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문제 해결사’로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위대한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도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구나. 내가 너에게 어떤 보상을 주면 좋겠느냐?” 세상의 부와 명예, 지혜, 무엇이든 청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Non nisi Te, Domine. (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문제 해결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부’였고, 그의 유일한 ‘구원’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당신이 베풀어 주신 치유와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선물보다, 선물을 주신 당신을 더 원합니다. 당신만이 저의 참된 구원자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방송인 최화정 씨는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입꼬리를 올리면 세상에 못할 일은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자세 하나 바꾸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달라지고, 마음이 바뀌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변한다는 것입니다. 크게 공감되는 말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너무 추웠습니다. 그래서 이불에 들어가 누워서 책을 읽기도 했고 또 공부했습니다. 책상은 그저 책, 공책 등을 쌓아두는 곳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무조건 책상에 앉아 공부해야 했습니다. 1, 2학년 때는 공동 침실(한 방에 16명이 잤습니다)을 사용해야 했고, 그래서 잠자는 시간 외에는 무조건 공동 연학실에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추우면 두꺼운 잠바를 입고, 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물을 채운 대야에 발을 담그고 책상에 앉아 공부했습니다. 
 
이 습관 때문일까요? 이제 누워서는 책을 읽지 못합니다. 무조건 책상에 앉아 있어야 했고, 그래야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자세가 중요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자세가 중요합니다. 미사 때,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분을 봅니다. 이분들은 대체로 계속 무엇인가를 합니다. 스마트폰을 보고, 주보를 보고, 또 두리번거리기도 합니다. 주님께 집중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손을 모으고 집중하시는 분을 보면, 온전히 주님 앞에 나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외적인 자세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자세도 중요합니다. 그 자세를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치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병 환자들이 율법에 따라 ‘멀찍이 서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그들은 부정한 존재로 낙인찍혀서 건강한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라고 말씀하시면서, 치유 자체보다 공동체에서의 회복을 위해 사제에게 보내십니다.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진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방인, 이단자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신앙의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선물을 받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자기의 은혜받은 것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드리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의 구원이라는 더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을 배울 수 있다(아이리스 머독).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모든 것에 영광을 돌리며 감사로이 내려앉는 낙엽입니다. 열 명 모두 치유되었지만, 단 한 사람만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치유는 우리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치유는 욕망으로 마무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돌아감을 잃어버린 우리들 삶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되돌아가야 할 감사의 삶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완성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방식이 감사의 삶입니다.

감사는 교만을 녹이고, 공동체를 살립니다. 감사 없는 신앙은 죽어있는 신앙입니다. 감사는 신앙의 부활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감사가 진정한 믿음입니다. 감사는 존재의 회복입니다.

감사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렇듯 은총 안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감사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진정한 감사는 오늘 이 순간에 깨어있는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가장 좋은 은총인 감사를 놓치지 마십시오.

 

 

 

지혜서 6장 11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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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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