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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1/11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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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믿음직한 사제를 세우리니, 그는 내 마음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리라.

하느님, 복된 마르티노 주교는 그 삶과 죽음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으니 저희에게 놀라우신 은총을 새롭게 베푸시어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1월 11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지혜 2,23―3,9)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 오늘 복음
    (루카 17,7-10)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지혜 2,23―3,9
오늘 제1독서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23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24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3,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7,7-10
오늘 복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11일
김세영 파비아노 신부

 

✚ 투르의 성 마르티노 소개 00:06

✚ 미사시작 01:26

✚ 강론시작 08:10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은총 앞에서 겸손하게 섬기기

“겸손하게 섬겨라.”라는 소제목이 달린 오늘 복음은(루카 17,7-10 참조) 조금 모질게 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에 비유하십니다. 종은 모름지기 주인의 호의를 기대하기보다는 철저히 종으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라고 하신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왜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잘못된 전제를 바로잡으시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본 전제의 오류’라는 것이 있습니다. 논리가 옳게 전개되지만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경우에 자세히 살펴보면 기본 전제가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인과응보 사상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하느님께 그에 맞는 보상을 받겠다는 것이지요. 크게 나무랄 만한 태도는 아닐 수 있지만,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크나큰 호의에 바탕을 둔 계약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어릴 적 세뱃돈을 많이 받아 어머니에게 맡긴 적이 있습니다. 며칠 뒤 그에게 돈을 달라고 하였더니 다 쓰고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울며 따졌더니 어머니는 “그래, 그러면 그동안 내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준 거 다 내놔!” 하셨습니다.

어린 저였지만 어머니가 그동안 키워 주신 은혜가 더 큰 것을 알기에 눈물을 닦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이라 하신 것에 섭섭해하기보다는 먼저 나에게 부어진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돌아보면 어떨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리석은 눈과 지혜로운 눈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과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오늘 지혜서는 어리석은 사람의 눈을 얘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어리석은 사람의 눈과 다른 지혜로운 사람의 눈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리석은 눈과 지혜로운 눈을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는 공통으로 어리석음과 지혜를 얘기하면서 이것들이 보는 것 곧 관상과 관련이 있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도 바로 혜안(Eye of Wisdom)을 얘기하는데 혜안은 육신의 두 눈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다 봅니다. 꿰뚫어 보고, 너머를 보고, 올려다보고, 내다봅니다. 지혜는 먼저 죽음 너머를 보고 불멸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런데 지혜가 죽음 너머 인간 불멸을 보는 것은 불멸의 시작인 하느님의 창조를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만 보면 불멸을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넘을 수가 없고 그래서 죽음 너머가 없으며 죽음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눈은 하느님까지 보고, 어리석은 눈은 인간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죽음과 불멸뿐이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리석은 눈은 고통과 시련을 인간이 당할 때 그것만 보고 그것밖에는 보지 못하는데 그것 밖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고통만 보는 어리석은 눈은 자기 고통 밖에 그것을 지켜보시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밖에서 같이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눈은 위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밖을 내다보지 못하며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눈이고, 오로지 그것만 보고 그것밖에는 보지 못하는 눈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롭다면 한번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볼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뻗쳐 밖도 보고 미래도 내다볼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보는 것은 다 지혜가 하느님을 관상하기 때문임을 지혜서를 통해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이미 주어진 섬김의 삶을 살아가기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인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사도들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말하자,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라고 하시면서, 믿음을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을 잘 지켜 공덕을 쌓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겠다는 인과응보사상과 공로주의에 젖어 있는 사도들에게 “종”의 비유를 통해, ‘겸손하게 섬겨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일을 하고 그에 따른 보수를 요구하는 품꾼과는 달리 주인의 분부대로 일을 마치고서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여전히 “쓸모없는 종”일뿐이라고 말하는 겸손히 주인을 섬기는 “종”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선 “분부 받은 대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상을 받으려고 주인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종”으로 삼아주신 주님께 대한 헌신일 뿐입니다.

사실, “주님의 종”은 <이사야서>에서는 말하고 있는 ‘주님의 종의 첫 번째 노래’에서 ‘주님께서 붙들어주는 이, 주님이 선택한 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이’,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주는 이’(이사 42,1)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에게 분부가 내려지고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를 신뢰하여 해야 할 일을 맡기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종”은 보상을 바래서가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여 분부 받은 일을 수행할 뿐입니다. 따라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부 받은 대로 다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쓸모없는 종”이란 무익하고 불필요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의 봉사가 전혀 보상이나 사례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의미의 겸손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한 일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대한 감사요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랑하려거든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분부를 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자랑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신원을 정확하게 알고, 주인의 뜻을 따라 분부대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섬김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곧 “주님의 종”으로서 ‘자유로이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며 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7,10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분부 받은 일이 
바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부하신 대로 섬기게 하소서.

혹 그대로 하였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않게 하소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 다 하지 못하였다 해도,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분부해 주심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쓸모 없는 종의 행복

찬미 예수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일의 위대함과 그 허무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은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어부로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먼바다로 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배보다 더 큰 거대한 청새치를 만납니다. 그는 사흘 밤낮의 처절한 사투 끝에 그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성취해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는 상어 떼의 습격을 받습니다. 그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의 배에 묶여 있던 것은 살코기 한 점 없는 거대한 '뼈'뿐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지쳐 쓰러져 잠이 듭니다. 이 노인의 모습은, 이 소설을 쓴 작가 헤밍웨이 자신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며 세상의 모든 '일'을 성취했지만, 그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엽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열정적인 '일'을 했지만, 세상은 그의 '일'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귀를 잘랐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이토록 위대했지만, 왜 그 '일'은 그들에게 구원을 주지 못했을까요? 

영화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 마트에서 '일'을 하지만, 그 '일'은 누구라도 '대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그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주지 못하고, 그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일 뿐이었습니다. 

여기, 이들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세 시대,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는 공사장을 한 여행자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똑같은 벽돌을 나르고 있는 세 명의 인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보면 모르시오? 빌어먹을 벽돌을 나르고 있소." 

그에게 '일'은 그저 고통스러운 노동이었습니다. 두 번째 인부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땀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에게 '일'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브룩스나 헤밍웨이의 일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비록 남루한 옷을 입었지만, 눈을 빛내며 환한 미소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서 머무실 위대한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 사람은 정확히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사람은 고통 속에서, 두 번째 사람은 의무감 속에서 일했지만, 세 번째 사람만이 완벽하게 행복했습니다. 그의 '일'은 더 이상 '대체 가능한'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하느님께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비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밭에서 돌아온 종에게 주인이 "얼른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하고 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명령한 것을 다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 종에게 고마워하겠느냐? ...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9-10) 

이 말씀은 언뜻 들으면 굉장히 차갑게 들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고작 '쓸모없는 종'이라니?"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노예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일'을 합니다. 그 일이 그 자체로 즐거울까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압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그 '일'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임을 압니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이 부모님께 '꼭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100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부모님께 달려가며 행복해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 벽돌공이 "나는 성전을 짓고 있다"고 행복하게 외쳤을 때, 그가 나중에 하느님께 가서 "제가 이렇게 위대한 일을 했으니 상을 주십시오"라고 자랑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는 "주님,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그 '일'을 하는 내내 제가 가장 행복했습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고백의 진짜 의미입니다.  

"주님, 저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그 '일' 자체가 저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고 상급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주님, 오늘 제가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찾아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그날의 행복도는 매우 높이 상승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세 번이나 배신하고 '쓸모없는 종'이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죄책감에 빠져 자신의 옛 '일', 즉 생존을 위한 고기잡이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실패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단 하나의 관계를 확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와 살아갈 힘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의 스승으로, 목자로 불림 받았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설거지이든, 운전이든, 아이를 돌보는 일이든,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헤밍웨이의 허무함이 아니라 세 번째 벽돌공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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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바람이 불고 때가 되면 가을잎은 저절로 떨어집니다. 떨어지는 단풍잎은 왜 자신을 밑으로 떨어뜨렸냐고 묻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길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먼저 바라봅니다.

쓸모없음은 무가치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순수한 봉사의 자세를 회복하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충실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신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비울 때 충만해지는 우리들 삶입니다. 억지로 성과를 만들려 하지 않고, 하느님께 맡기며 자연스럽게 흐르는 삶을 살아갑시다. 하느님께 맡기고 흘러가는 삶이 평화와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삶입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때, 우리는 스스로를 속박합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낙엽이 또 하나 조용히 땅으로 내려앉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지혜서 3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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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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