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당송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나는 보았네.
하느님, 몸소 뽑으신 살아 있는 돌로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하느님의 교회에 은총의 영을 더욱 풍성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천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평신도 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평신도 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제 47,1-2.8-9.12)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 - 제 2독서
(1코린 3,9ㄴ-11.16-17)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 오늘 복음
(요한 .2,13-22)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에제 47,1-2.8-9.12
오늘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1코린 3,9ㄴ-11.16-17
오늘 제2독서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형제 여러분,
9 여러분은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10 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로서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저마다 잘 살펴야 합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인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6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7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요한 .2,13-22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9일
이낙희 이냐시오 신부
✚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소개 00:06
✚ 도림동교육센터 소개 01:30
✚ 미사시작 02:53
✚ 강론시작 17:5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살아 있는 성전, 우리 자신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지어 봉헌한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입니다. 성 베드로 대성전만큼 웅장하지는 않지만, 가톨릭 교회의 오랜 역사와 전통 안에서 교회 일치의 구심점 구실을 톡톡히 한 성전이지요. 오늘 우리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전은 겉으로 보이는 건물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6)이라는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시는 살아 있는 성전입니다. 그렇게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귀합니다. 우리 교회, 곧 하느님의 성전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사도들을 바탕으로 지금도 지어지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한편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사도직을 크게 강조하면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이야말로 세상을 복음화하는 참된 주역임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적 위로와 공동체의 돌봄에만 기대고, 한편으로는 사제들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교우들의 모습을 볼 때 조금 안타깝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 복음을 실천하고 복음화에 앞장서는 주역이 되어 보면 어떨까요?
한국 천주교회는 스스로 진리를 찾아 나아가다, 신앙이라는 보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높이 치켜든 평신도들이 키워 낸 교회입니다. 그들은 가진 것을 다 팔아, 목숨까지 바치며 그 보물을 지켰습니다. 신앙 선조들에 대하여 공부하고, 우리 신앙이 왜 그리 귀하고 소중한지 새롭게 발견합시다. 그리고 그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지만 큰 성당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당신이 다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우리는 왜 이 말씀을 듣습니까? 라테라노 대성전을 허물라는 것입니까? 다시 세우라는 것입니까? 축일을 지내며 아무렴 그 성전을 허물라는 뜻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내용처럼 정화할 것이 있으면 정화함으로써 제대로 지으라는 것이고 그것은 진정 주님께서 머무실 집이어야 한다는 거겠지요. 저는 이런 묵상을 하면서 주님의 집을 재건한 프란치스코를 생각했습니다.
먼저 프란치스코처럼 가슴의 성전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묵상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세 성당을 세웠을 뿐 아니라 성당에 대한 신앙심이 대단했습니다. 유언에서는 주님께서 성당에 대한 신앙심을 주셨다고 몸소 고백하고, 전기는 성당에 대한 사랑으로 늘 빗자루를 가지고 다니며 청소했다고 전하지요. 그런데 프란치스코의 전기 작가 첼라노는 그의 기도에 대해 이것도 전합니다.
“그는 가슴에 성전(聖殿)을 만들었다. 그는 몰아(沒我)에 들어갔기에 거기에는 흐느낌이나 한숨이 없었다.”
저는 오늘 이 축일에 이 가슴에 성전을 세우는 것을 먼저 묵상했습니다. 밖의 성당도 중요하지만 안의 성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이 중요성을 더 느낍니다. 굳이 어디를 찾아갈 필요도 없고 수시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는 화살기도처럼 시간과 공간의 구애받음 없이 주님을 만나는 것이니 얼마나 효과적이고 얼마나 탁월하게 전 삶을 성사로 만드는 것입니까?
두 번째는 작은 성당을 세우는 것입니다. 포르치운쿨라 성당에 가 보신 분은 알고 계시는 바이지만 프란치스코가 다시 짓고 너무도 사랑하여 그곳을 작은형제들의 못자리로 삼은 성당은 아주 작은 성당인데 후대에 그 위에 꽤 큰 성당을 지었기에 현재 포르치운쿨라 성당은 큰 성당 안에 작은 성당이 있는 구조입니다.
저도 큰 성당 속의 작은 성당을 지을 수만 있어도 큰 만족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주님의 대리자들이 있는 라테라노 대성당 안에 우리는 작은 성전을 세워 거기서 작은 교회를 이루면 충분하고도 좋습니다. 큰 성당은 신자들이 본당신부를 따로 한번 보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 작은 성당은 목자와 신자들이 자주 그리고 가까이 만나는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저는 작지만 큰 교회를 세우고도 싶습니다. 건물과 인원 면에서는 작지만 품이 큰 교회입니다. 진정 큰 성당은 건물이 크고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성당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모두 들어갈 수 있는 성당이 큰 성당이고, 피부색과 언어가 달라도 다 들어갈 수 있는 성당이 큰 성당입니다.
얼마 전 새로 되신 레오 교황께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말씀들을 하셨지요.
"안전한 항구를 바라보는 저 배들과 불안과 희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해안을 찾는 그 눈들이 냉담함과 차별의 낙인을 마주해서는 결코 안 된다."
"선교란 단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머무르며 환대와 연민, 연대 안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며 교회는 팔과 마음을 열어 이들을 형제로 맞이하고 위로와 희망의 현존이 되어야 한다."
이는 트럼프의 배타적이고 극우적인 반이민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지만 성 소수자나 이민자들에 적대감을 드러내는 국내 극우적 세력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며 또 우리 교회는 이들과 달라야 할 뿐 아니라 이들에 대해 예언적인 자세와 적극적 입장표명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여기 선교 협동조합>을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선교란 꼭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와 있는 이주민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와 환대와 연대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라테란 대성당은 큰 성당이고, 우리는 개인이나 공동체로서 작지만 큰 성당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기도하는 집
일찍이 다윗은 주님의 현존인 “궤약의 궤”를 모실 집을 짓고 싶어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유다의 멸망과 더불어 파괴되었고 백성들은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 온 유다백성들은 기원전 515년에 제2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 역시 그리스시대와 로마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기원전 167년과 63년) 다시 유린당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 이후, 기원 후 70년에 유대인들의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로마군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난 후, 324년에 황제는 자신의 별궁을 성전으로 세우고 봉헌하였습니다. 이 성전은 가톨릭교회의 모교회로서, 전 세계에 퍼져있는 주교좌성당 전체와 대등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첫째로 꼽히는 성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로마의 주교좌성당인 바로 이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와 <화답송>의 <시편> 나오는 ‘성전에서 흘러나와 하느님의 도성을 기쁘게 하는 강물’은 교회의 생명을 지탱하고 자양분을 제공하는 은총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전정화는 교회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은총의 물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쇄신하는 표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성전 파괴를 예고하시고 진정한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제시하십니다. 곧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성전으로 내어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이신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을 당신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새가 나무에 둥지를 틀듯, 우리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신비한 동굴을 파고 들어와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는 존재요, 그분의 소유요, 그분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이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결코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려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면,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타인을 위해, 교회와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몸은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는 교회요,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이 고귀함과 존귀함 앞에 겸허하게 경배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몸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 형제 안에 계시는 그분을 경배하는 일,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대성전의 봉헌을 기념하는 이날, 우리는 성전과 교회의 축복과 더불어 ‘우리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축복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 살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2,16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주님!
성령의 채찍을 휘두르소서.
아버지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삼키게 하소서.
당신이 세우신 성전의 뜰이
장사치와 도둑들의 소굴이 아닌
사랑의 열매를 나누는
나눔 터가 되게 하소서.
저의 영혼이
당신의 사랑을 경배하는
예배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경배하는 일
그 아름다운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전과 평화와 나는 하나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 성당’이자 ‘머리’가 되는, 최초의 성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하느님의 집’을 기념할까요?
사람은 자기가 사는 ‘집’에 의해 형성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단순히 잠자는 건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집’이란, "지금 나에게 최고로 평화를 주는 것, 그래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품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술병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성전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머무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 곧 ‘자존감’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 '브룩스'라는 노인이 나옵니다. 그는 50년이라는 세월을 쇼생크 교도소 안에서 보냈습니다. 50년 만에 '자유'를 얻어 가석방이 결정되자, 그는 기뻐하는 대신 공포에 질려 절규합니다. 칼을 들고 동료를 위협하며 발버둥 칩니다.
"제발 나를 내보내지 말아 주시오!"
그에게 자유는 주어졌지만, 세상에 그가 마음 둘 '집'은 없었습니다. 그가 잠시 머물 숙소는 있었지만, 그의 영혼이 에너지를 회복하고 참된 평화를 얻을 '집'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진짜 '집'은, 역설적이게도, 50년 동안 살았던 '교도소'였습니다.
산속의 짐승들에게도 옹달샘이 필요하지만, 천적의 위협 없이 조용히 쉴 수 있는 그들만의 '굴'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브룩스는 나오기는 원했어도, 세상에 자신의 '굴', 즉 새로운 '집'을 마련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차가운 여관방 벽에 "브룩스, 여기에 머물다 감(Brooks was here)"이라는 쓸쓸한 유서를 남기고, 교도소라는 '집'을 잃어버린 상실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우리는 모두 '집'이 필요합니다. 집에서 힘을 회복하고 다시 세상에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진짜 '집'은 건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라는 지옥의 '집'에 갇히게 됩니다. 그곳은 인간의 모든 자존감을 파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강제 노역을 하던 어느 날, 그는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절망감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문득 '아내'를 떠올렸습니다. 함께 있지 못했지만, 그는 의식적으로 '아내'라는 '사랑의 집'에 머무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훗날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그때 '사랑'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궁극적이고 가장 높은 목표임을 깨달았다. ...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빼앗긴 최악의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그녀의 미소를,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원과 평화를 경험할 수 있다."
빅터 프랭클에게 '집'은 아우슈비츠가 아니었습니다. 수용소는 세상이었습니다. 그에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에게 영원한 평화를 주는 존재, 그의 '아내'가 곧 그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이 거친 환경을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다시 ‘쇼생크 탈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주인공 '레드' 역시 브룩스와 똑같이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똑같이 가석방되었습니다. 그 역시 브룩스처럼 혼란스러웠고, "브룩스, 여기에 머물다 감"이라고 쓰인 그 방에 머물게 됩니다.
그 또한 브룩스와 같은 비극적 결말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레드에게는 그를 기다리는 '친구', 앤디가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늘 대화하며 희망을 나누던 그 친구가 그의 '집'이 되어 주었습니다.
브룩스에게는 돌아갈 교도소 외에 아무런 '집'이 없었지만, 레드에게는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한다'라는 새로운 '집'(목표이자 평화)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친구'라는 집을 찾아 태평양의 작은 해변으로 떠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내며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큰 평화를 주는, 나의 진짜 '집'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에게 집은 '통장 잔고'일 수 있습니다. 잔고가 늘어날 때 평화를 얻습니다. 어떤 분은 '자녀'나 '아내'일 수 있고, 어떤 분은 '술'이나 '운동'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궁극적인 '집'이 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아이들의 집은 부모입니다. 다리 밑에서 살아도 부모만 있다면 집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집은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줄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것으로는 세상 것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집으로 삼는 자만이 세상을 이기는 힘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위대한 집은 '하느님의 집'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집 안에서조차 '돈'과 '명예'(상거래)를 그들의 더 큰 평화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집'이 오염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집'을 정화하셔야만 했습니다.
모든 집은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로부터 탈출하여 쉬는 곳입니다. 그 집의 주인이 부활하신 분이시라면 그 집에 사는 이들은 죽음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부모가 아래 있으면 무조건 부모가 받아줄 줄 알고 뛰어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관련된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1912년 타이타닉호의 침몰과 함께한 이시도르와 아이다 스트라우스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메이시스 백화점의 소유주였던 이시도르는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아이다에게는 당연히 구명보트의 자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곁을 지키던 하녀 엘렌에게 자신의 비싼 모피 코트를 벗어주며 보트에 태워 보낼 만큼, '물질'이라는 집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선원들이 그녀를 재촉했지만, 아이다는 구명보트에 오르기를 단호히 거절하고, 남편 이시도르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는 긴 세월을 함께 살아왔어요.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어요."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아이다에게 '참 평화를 주는 집'은 구명보트가 아니라, 바로 그녀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하느님이라는 영원한 '집'에 머물렀기에, 이 세상 가장 큰 '집'(타이타닉)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생명'이라는 집착을 넘어서 타인에게 생명을 양도하면서도 죽음 앞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자기 생존을 의탁하는 집이 있고 그 집과 같은 운명을 맞습니다. 하느님의 집에 살면 이시도르와 아이다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고, 그리스도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나 세상 것에 의탁하면 그것들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하느님을 집으로 여겼습니다. 그분 안에 머물렀더니 그분이 성모님 안에 잉태되셨습니다. 내가 머무는 집이 나의 새로운 정체성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을 품은 또 다른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이 자기 정체성에서 오는 자존감에 있습니다.
위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생토록 세상의 쾌락과 명예라는 '집'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참된 '집'을 찾고 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기에, 저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머물기)까지 평화를 누리지 못하나이다." (고백록)
'쉼', '머무름', '평화'. 이것이 바로 '집'의 본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가장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빈다." (요한 20,19)
이 평화를 주시는 분, 우리가 영원히 머물러야 할 '집'이신 그분께서, 지금 바로 저 '감실'에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삶이 힘든 데 왜 찾아오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지쳐 있으면서, 평화 그 자체이신 당신의 '집'에 머무르지 않습니까? 각자 자신의 본당(성전)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성체조배'를 하십시오. 성체조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참 집'이신 주님 앞에 조용히 '머무는' 연습입니다. 그분의 평화를 내 마음 깊이 새기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그 '집'을 내 안에 품고 사는 사람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하느님의 집을) 당신 안에 모시고 당당하게 엘리사벳에게 걸어가셨던 것처럼, 이 세상 누구도, 그 어떤 절망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어느 성공한 사업가의 책을 읽다가 망하는 사람과 망하는 기업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공통점을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하고 건방지다.”
건방지면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되는데, 무시라는 말은 없을 무(無)와 볼 시(視)라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볼 수 없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누군가를 무시한다는 것은 ‘앞이 안 보인다.’, 즉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에 판단할 수 있는 지표도 없고, 따라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기에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무시당했다는 사람을 또 누군가를 무시하고 있다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무시’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시당하고 있다면서, 똑같이 무시한다면 함께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무시하는 것은 이 메시지를 제대로 따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를 망하지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구원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무시’라는 단어를 자기 삶 안에서 지워야 합니다. 대신 눈을 뜨고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랑’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삶을 성공의 삶으로 분명 이끌어줄 것입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베드로 대성전이 건립되기 이전에 교황님께서 거주하신 공간으로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이라는 영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라테라노 대성전을 중심으로 전 세계의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 안에서 한 몸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와 복음도 ‘하느님의 성전’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으로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는데, 장사하는 집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이제까지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지만, 예수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무시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인 사랑에 집중하면서 진정한 성전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성공의 삶,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견뎌냄으로써 더 단단해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그 과정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성장해 나가는 용기다(전승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성전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평신도는 그 몸 안에서 사랑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성전입니다. 세상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더더욱 평신도는 세상의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고 복음을 증거합니다. 성(聖)과 속(俗)은 분리된 두 세계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만나는 하나의 현실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세상 안에서 사랑을 실천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평신도는 사랑의 사명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소중한 지체입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평신도의 거룩한 소명입니다. 성당 안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흘러나가는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거룩함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안에 숨어 있음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우리의 하루가 주님의 미사가 되고 우리의 삶이 주님의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거룩하게 바꾸는 것입니다. 밥을 짓고, 아이를 돌보고, 일터에서 성실히 일하는 모든 순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봉헌이며 참된 기도입니다.
우리 평신도는 세상 속에서 그분의 빛과 생명을 드러내는 작은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성전인 평신도의 노고에 진심으로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평신도와 성직자 모두는 하느님 사랑의 사명에 동참하는 소중한 동반자들입니다.
코린토1서 3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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