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그와 평화의 계약을 맺으시어, 백성을 다스리는 영원한 사제직을 주셨네.
하느님, 사도들의 반석 위에 세우신 교회를 저승의 세력도 결코 이기지 못하게 하셨으니 복된 레오 교황의 전구를 들으시어 교회를 하느님의 진리로 견고하게 하시며 언제나 평화로이 지켜 주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10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지혜 1,1-7)
지혜는 다정한 영이고, 주님의 영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 - 오늘 복음
(루카 17,1-6)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지혜 1,1-7
오늘 제1독서
지혜는 다정한 영이고, 주님의 영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
1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2 주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 주시고 당신을 불신하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3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의 권능을 시험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로 드러난다.
4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5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거짓을 피해 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리며 불의가 다가옴을 수치스러워한다.
6 지혜는 다정한 영, 그러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그 말에 책임을 지게 한다. 하느님께서 그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7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루카 17,1-6
오늘 복음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10일
박민호 요셉 신부
✚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25
✚ 강론시작 08:20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우리의 지혜는 어디쯤 와 있습니까?
이번 한 주간 평일 독서로 지혜서를 읽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지혜서는 욥기, 잠언, 코헬렛, 집회서와 더불어 지혜 문학으로 분류됩니다.
이스라엘은 바빌론 유배에 이어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통치라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다양한 문화와 만나면서 이스라엘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학적 결실이 두 가지 생깁니다. 지혜 문학과 묵시 문학이지요. 그 가운데 지혜 문학은 중동의 여러 지역과 문화에서 발견되는데, 유다의 현자들은 주변 나라들의 지혜 문학에서 영향을 받았고, 반대로 그들의 저서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은 크게 세 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단계에서는 주로 세상의 질서 파악에 집중합니다. 인간 행위에는 반드시 갚음(상벌)이 따르는데, 선과 악에 대한 갚음은 현세에서 이루어진다는 관점을 보입니다. 잠언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은 이러한 현세의 인과응보와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일이 원리 원칙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의 제기,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인간의 지혜로는 한계가 있다는 고백을 담은 두 번째 단계가 등장합니다. 욥기와 코헬렛이 대표적 작품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능력으로는 지혜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는 한계에 맞닥뜨리고 마침내 현자들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것이 지혜 문학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출발하였지만 결국 하느님의 계시로 돌아오게 된 것이지요. 주님에 대한 깊은 경외심 그리고 현세를 넘어 내세의 인과응보를 말하는 집회서와 지혜서가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의 지혜는 어디쯤 와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과 용서의 순서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죄지은 사람이 회개하면 용서해 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용서해 주기 전에 죄를 지적하며 꾸짖고 꾸짖기 전에 내가 남을 죄짓게 한 것은 없는지 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랑과 용서의 순서는 오늘 말씀하신 순서와 반대입니다.
누구의 죄를 꾸짖기 전에 그를 죄짓게 한 나의 죄는 없는지 봐야 합니다. 이는 옛날에 고백성사 볼 때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와 남이 나로 인해 지은 죄 있을 터이니 신부는 죄인을 도무지 벌하고 사하소서’라고 고백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남을 죄짓게 하고, 그가 내게 죄지은 경우에도 내가 원인 제공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몰랐다가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죄짓게 했고 내가 더 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닫고 고백성사 보곤 했지요. 그러니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그를 용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에게 용서 청해야겠지요?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의 첫 번째 순서는 용서받아야 할 나의 죄는 없는지 먼저 반성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꾸짖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죄짓게 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스스로 죄를 깨닫지도 뉘우치지도 않는다면 죄를 깨닫도록 일러주고 꾸짖어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사실 사랑하지 않으면 죄짓거나 말거나 꾸짖지 않을 것이고, 사랑할지라도 그 사랑이 크지 않으면 그냥 눈감아 버리고 말 것입니다. 꾸짖을 때 돌아올 그의 미움을 감수하고 감당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고, 그 미움의 고통을 내가 괜히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꾸짖는 것은 사랑 때문에 사서 고생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꾸짖기 전에 반드시 사랑 때문인지 성찰해야 하며,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분노 때문이니 꾸짖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꾸짖기 전에 봐야 할 또 다른 것은 나의 겸손입니다. 겸손한 자세로 꾸짖는 것인지 그걸 봐야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모두 이렇게 권고합니다. ㅇ
“형제들은 자기 형제의 잘못을 겸손과 사랑으로 바로잡아 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제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그래서 그가 회개하기를 바란다면 용서할 것이고, 나의 꾸짖음 때문에 회개해 준 그가 오히려 고마울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사랑이게 해 준 것이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문제는 회개하지 않을 때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니 용서할 수도 없겠지요? 그러나 이 경우에도 용서해야 합니다. 회개만 하면 언제고 즉시 용서할 마음이 있고 채비가 되어 있는 것이니 나는 미리 용서하는 셈이고, 적어도 회개하지 않는다고 분노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랑도 없고 겸손도 없을 경우 우리는 종종 분노하지요. 내가 얼마나 어렵게 얘기한 것인데 그 사랑을 무시하고 몰라 준다고. 그러므로 우리가 겸손과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려고 한 것이라면 회개치 않을 때 분노할 것이 아니라 회개의 때가 그에게 오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진정한 믿음
오늘 <복음>은 제자들에게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하여 있는 시선에서 타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대전환’ 입니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자!”(루가 17,1)
이는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타인의 구원도 바라보라는 요청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도 우리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나아가 타인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자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타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하는 우리가 오히려 타인을 죄짓게 하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가 17,3)
형제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죄가 아닌 ‘교정’을, 형제의 뉘우침에 대해서는 채벌이 아닌 ‘용서’를 하라고 하십니다. 곧 무턱대고 질책하거나 무작정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꾸짖더라도 혹은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마음으로 꾸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픔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프더라도 구원의 길을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는 이 말씀을 바꾸어, 제 자신에게 이렇게 적용해 봅니다.
“내가 죄를 지었거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여 용서를 빌어라.”
그렇습니다. 나는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는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입니다. 타인의 잘못으로 내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내 잘못으로 타인이 상처를 입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먼저 용서 받은 자’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결국, 용서받은 자가 용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용서받았음에 대한 ‘믿음’이 동반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이는 마치 자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면서 그 믿음을 늘려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물질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믿음을 늘려달라는 그들에게 양적인 믿음이 아닌, 질적인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곧 ‘진정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겨자 씨”같은 ‘생명이 있는 진정한 믿음’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자신의 구원보다 남의 구원을 먼저 찾고,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를 청하며, 꾸짖거나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고, 많은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7,5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주님!
왜곡된 믿음을 없애시고
순수하고
진실 된 믿음을 주소서.
오늘도 쉬이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신께 신뢰를 두지 않고
의탁하지 못함이오니
진정으로 믿게 하소서.
오늘도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당신을 향하여 있지 못함이오니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오늘도 제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놓치는 흔들림이오니
믿음을 지켜주소서.
이제는 더 이상은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용서하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되어라.
찬미 예수님
우리가 '용서'라는 주제를 만날 때마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는 절망이 먼저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나는 절대로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는데'라는 현실의 벽 때문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께서는, 바로 그런 '불가능한 용서'에 대한 당신의 가정사를 이렇게 나누어 주십니다.
한 신부님의 아버님은 평생을 알코올 중독으로 사셨다고 합니다. 술에 취하지 않으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옆을 지키는 '아내'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는 단 하나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절망의 세월 속에서도 매일같이 성전을 찾으셨고,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어머니는 성전에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계셨습니다. '환희의 신비'였습니다. 1단, 2단, 3단을 지나, 4단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함"
어머니는 이 신비를 깊이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라 정성껏 아기를 바치는 성모님의 마음을 따라가던 바로 그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묵상 중에, 문득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술에 취해,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던 '남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남편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남편'이나 '웬수'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니다. 저 사람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나의 '큰아들'이다."
이것은 엄청난 인식의 전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다른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는 '남편'을 원망할 수 있고, 지치면 이혼하고 떠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떻습니까? '어머니'는 병든 '아들'을 버릴 수 없습니다. 낳아준 자식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영적으로' 맡기신 '큰아들'임을 깨닫는 순간, 어머니의 마음은 원망에서 '연민'으로 바뀌었습니다.
남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드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변했습니다. '상처받은 아내'가 '기도하는 어머니'로 변하자, 놀랍게도 그 가정이 평화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평화로워졌기 때문입니다.
한 신부님께서 고백하셨듯, 용서는 '지금의 나'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다른 존재'로 바꾸십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용서에 이른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11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는 '복수'가 법이자 명예였던 시대였습니다. 가문의 누군가가 살해당하면, 그 피를 갚는 것(Vendetta)은 아들의 신성한 의무였습니다. 귀족 기사였던 '요한 구알베르토'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제가 정적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자, 그는 복수심에 불타올랐습니다.
몇 년 동안 그는 원수를 찾아 헤맸습니다. 마침내 1028년, '성 금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그는 피렌체 외곽의 좁은 길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원수와 마주쳤습니다.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외길이었습니다.
요한은 승리에 찬 복수심으로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이제 저 자의 심장을 찌르면, 가문의 명예도, 자신의 분노도 모두 해결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무기도 없이 홀로 있던 원수는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두 팔을 벌려 '십자가'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날, 온 교회가 "보라, 십자가 나무"를 노래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던 바로 그 성 금요일에, 원수는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형상화하며 그의 '믿음'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긴 것입니다.
칼을 든 요한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습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위해, 그리고 지금 이 원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복수하는 자'에서 '십자가를 목격한 자'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차마, 십자가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를 찌를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용서해야지'라고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형상 앞에서, '복수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칼을 칼집에 꽂고 말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무릎 꿇은 원수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바로 이 '불가능한' 명령을 듣습니다.
"그가 하루에 일곱 번 너에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일곱 번'이라는 것은 '무제한의 용서'를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나를 한 번 속인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일곱 번이나 나를 배신하고 돌아와 "미안해, 회개할게"라고 말하는 사람을 어떻게 또 용서합니까? 그것은 정의가 아니며,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제자들도 이것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상처받은 나'로서는 '용서하는 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간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놀라운 통찰입니다. 그들은 "예, 주님. 저희가 더 노력해서 용서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 그것은 저희 힘으로 안 됩니다. 그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다른 힘, 즉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은 '큰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작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겨자씨'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이 '겨자씨'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체'입니다.
뽕나무는 뿌리가 깊고 질겨서 도저히 뽑히지 않는 나무입니다. 우리 마음속의 '용서할 수 없는 증오심'이 바로 이 뽕나무와 같습니다. 내 노력으로는 절대 그 뿌리를 뽑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체'라는 이 작은 겨자씨가 내 안에 심기면, 즉 내가 그분을 받아 모시고 '그분 때문에 나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그 믿음이 불가능해 보이는 증오의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던져버리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 믿음은 11살의 작은 소녀에게서도 똑같이 증명됩니다. 성녀 마리아 고레티입니다. 그녀는 이웃 청년 알레산드로의 추행을 거부하다가 14번이나 칼에 찔려 죽어갔습니다.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던 소녀에게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마리아, 너를 찌른 알레산드로를 용서하느냐?" 우리는 이 질문이 얼마나 잔인한지 압니다.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압니다. 하지만 이 11살 소녀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네! 저도 그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저도 그가 천국에 오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마리아 고레티는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불과 몇 달 전, 생애 처음으로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그녀는 '성체'라는 겨자씨를 가슴에 품고 있던 아이였습니다. 그녀는 이미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용서해야지'라고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미 '용서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알레산드로의 구원을 바라며 용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를 용서하려고 노력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네가 용서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와서 '겨자씨'를 받아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용서의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시는 성체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증오의 뽕나무를 뽑아내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심는 오늘이 되시기를 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산책하다가 귀여운 강아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어디에 있는 보이지 않았고, 강아지만 잔디밭 위에서 킁킁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다가가 사진을 찍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이 강아지는 어떻게 했을까요?
1) 최대한 귀여운 포즈를 취했다.
2) 도망쳤다.
맞습니다. 2번, 도망쳤습니다. 만지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단지 그 귀여움을 사진에 담으려고만 했을 뿐인데도 도망쳤습니다. 그렇다면 도망쳤다고 제가 화를 내며 강아지를 쫓아갔을까요? 아닙니다. 도망치는 것은 동물의 본성이니, ‘그러려니’ 했습니다. 문득 의문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왜 도망치면 비겁하다고 말할까?’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보았던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어서일까요? 도망치면 ‘비겁하다, 못났다, 쓸데없다’ 등의 부정적인 말이 쏟아집니다. 모든 동물의 본성은 도망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역시 도망쳐도 본성에 맞춰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아닐까요?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본성 이상의 지위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성만을 유지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로 가득 찬 상태로 들어갈 수 없어서 영혼이 정화되는 시간, 또 나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본성을 뛰어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도 우리 본성을 뛰어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로 남을 죄짓게 하는 것과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죄짓게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이를 저지르는 사람에게 단호한 경고(‘불행하여라’)를 하십니다. 특히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하시지요. 이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가장 치욕적이고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또 용서도 그렇습니다. 한 번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라고 말씀하시지요.
남을 죄짓게 하는 것과 용서 모두 우리가 실천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냥 본성을 따르면서, 남이 죄짓든 죄짓지 않든 상관없이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에, 주님께 도움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만 있어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뛰어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오늘의 명언
삶이란 아주 미묘해서, 열리기만을 고대했던 문을 이미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브리아나 위스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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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지혜서 1장 1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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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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