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물을 마시면, 굳세어지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지혜가 너희를 영원히 들어 높이리라. 알렐루야.
하느님,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저희를 치유해 주셨으니 천상 선물도 풍성히 내리시어 지금 세상에서 맛보는 기쁨과 자유를 하늘에서 온전히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4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4월 22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2,36-41)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 오늘 복음
(요한 20,11-18)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2,36-41
오늘 제1독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오순절에,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요한 20,11-18
오늘 복음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22일
조정래 시몬 신부
✚ 미사시작 00:38
✚ 강론시작 08:46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로 주님의 부활이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희망이 되는지, 또한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지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 앞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였던 그는 슬픔 때문에 빈 무덤이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뜻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빈 무덤은 누군가 자신의 주님을 꺼내 간 절망의 공간일 뿐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 앞에 서 계셔도 그저 정원지기로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시자 비로소 주님을 알아 뵙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상실의 슬픔 가운데 예수님을 찾아 나섰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먼저 찾아오시어 그의 이름을 부르심으로써 슬픔을 낫게 하시고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찬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의 이름 “마리아”(20,16)를 불러 주시며 그를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군중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로 기억하시는 그 모습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슬픔에서 부활의 기쁨으로 넘어갑니다.
주님께서는 이렇듯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유명한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로 끝맺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러하였듯이 우리도 잊히지 않는 한 사람으로 예수님께 기억되고, 또 예수님을 그렇게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의 형제이며 희망의 순례자인 우리
어제에 이어 오늘도 막달라 마리아 얘기입니다. 어제는 마태오복음이고 오늘은 요한복음인데 차이점도 있고 공통점도 있습니다.
어제 마태오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주님의 발을 붙잡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붙잡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 차이점입니다.
요한복음의 주님께선 왜 붙잡지 말라고 하셨을까? 아직 하늘에 오르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당신이 하늘에 오르는 것을 막지 말라는 뜻에서 붙잡지 말라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마리아가 인간적으로 의지하고 집착하기에 그러지 말라는 것이었을까요? 그건 그렇고 두 복음이 똑같이 얘기하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점입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여라.”
부활 전 그러니까 최후 만찬 때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부활 전에는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이 부활 후에는 왜 형제라고 부르실까요? 제 생각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사람은 이제 동급이 됨이 마땅하다고 하심이 아닐까요?
신성을 체험한 사람은 신이 된다는 뜻으로. 그래야 마땅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자신도 부활하는 체험을 한 사람은 신화(神化)해야 마땅합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부활 체험하고도 여전히 인간성에 머문다면 그런 사람은 진정 부활 체험을 한 것이 아니거나 불완전한 체험 또는 얼치기 체험을 한 것일 겁니다.
부활 체험하고도 주님의 형제가 아니라 죄의 종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부활 체험하고도 여전히 세상일의 종사자로서 살아서는 안 되고, 부활 체험하고도 여전히 세상일에 집착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모두 주님의 형제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 순례자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제 우리는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선종하신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위중한 중에도 부활 미사에 모습을 나타내 부활절 메시지를 내셨습니다. 교황께선 부활 대축일 미사로 마지막으로 당신을 봉헌하고 싶으셨던 것 같았고 남아있는 힘을 모두 끌어모아 메시지를 내신 것 같이 제게는 느껴졌습니다.
이 교황께서 올해 희년의 기도를 우리에게 남기셨는데 여기서 주님을 우리의 형제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복음의 씨를 뿌리는 성실한 일꾼과 희망의 순례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을 추모하며 그리고 희망의 순례자가 되기로 결심하며 이 기도를 바칩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 형제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믿음과 성령을 통하여 저희 마음에 부어 주신 불타는 사랑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리라는 복된 희망을 저희에게 다시 일깨워 주소서. 악의 세력이 패배하고 아버지의 영광이 영원히 드러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확신에 차 기다리며 온 인류와 우주가 떨쳐 일어나도록 아버지의 은총으로 아버지의 은총으로 저희가 복음의 씨를 뿌리는 성실한 일꾼이 되게 하소서. 희년의 은총이 희망의 순례자인 우리 안에서 천상 보화를 향한 갈망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우리 구원자신 주님의 기쁨과 평화가 온 세상에 흘러넘치게 하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사랑하는 일 멈추지 말기
나는 죄인이어도
당신이 사랑이어서
또다시 나를 살게 하는
찬미의 힘찬 노래
거듭나게 하는 노래
알렐루야 알렐루야 !!
(이해인, 부활소곡 중에서)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부활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 마리아의 사랑이야기 2탄입니다. 사랑의 장소는 동산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처음 준비되고 이루어진 곳도 동산(에덴)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에서 사랑으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 또 다시 동산에서 사랑으로 부활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그렇게 에덴동산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두 제자는 이미 돌아갔건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차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울다”의 원어의 뜻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큰소리로 통곡하여 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사랑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무덤을 들여다보고 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두 천사를 봅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습니다.”(요한 20,12)
성 그레고리우스는 천사가 있었던 “머리맡”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는 사실을, “발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곧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또한 그녀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랬고(루카 24,13-35),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의 일곱 제자들도 그랬습니다(요한 2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곧 부활 체험은 ‘낯선 이’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낯선 이’의 요청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고 ‘눈이 열리어’(루카 24,31)야 할 일입니다. 그분이 나를 이집트에서 불러내듯, 동굴에서 불러내듯 나를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요한 20,17).
이는 당신이 더 이상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자신이 모르는 낮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든다.’고 말합니다.
결국, 부활은 다름 아닌 사랑의 승리이며, 동시에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20,17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오니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늘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늘 사랑하는 일에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활을 만나는 사람 : 죄 문제로 참사랑을 갈망할 줄 아는 사람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의 기쁨이 가득한 팔일 축제 화요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누구보다 먼저 만나는 영광을 누린 마리아 막달레나를 만납니다. 그녀는 왜 이 특별한 은총을 받았을까요? 무엇이 그녀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만들었을까요?
우리가 아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신 여인입니다. (루카 8,2; 마르 16,9 참조) 일곱 마귀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온 존재가 악의 세력 아래 고통받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어두컴컴한 감옥에 갇혀 빛 한 줄기 없이 절망 속에 살아가는 죄수의 심정을 말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그 감옥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오직 누군가 밖에서 문을 열어주고 그를 끌어내 주어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분을 만남으로써 그녀는 끔찍한 죄와 악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참된 생명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죄에서 멀어지고 참된 생명을 누리는 유일한 길임을 그녀는 온몸으로, 온 영혼으로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 안에 있던 ‘착한 뜻’입니다. 죄가 얼마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알기에,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체험했기에, 그분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 착한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가리옷 유다입니다. 그 역시 예수님과 3년이나 함께 먹고 자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왜일까요? 그에게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었던 ‘진리를 찾는 마음’, 그 ‘착한 뜻’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마음은 다른 것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돈과 세상의 명예,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거짓된 믿음을 그는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습니다. 목마른 나그네에게 시원한 오아시스처럼 보이지만, 다가가면 갈증을 해소시켜 줄 물은 온데간데없고 뜨거운 모래뿐인 허상처럼, 세상의 부와 명예는 참된 행복을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우리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는 헛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것들이 우리를 얽매는 고통의 원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가르치셨고, 당신 친히 가난하고 겸손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으며,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갈 힘과 은총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 앞에서, 그분의 진리 앞에서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던 세상의 가치들은 마치 가을 들판의 마른 지푸라기처럼 힘없이 스러져 버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예수님, 자신의 생명과도 같았던 그분을 잃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시고 이제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녀에게 죄에서 멀어지게 하고 참된 생명의 기쁨을 주었던 유일한 사랑의 근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누가 그녀를 악의 세력에서 지켜주고, 누가 그녀에게 참된 평화와 자유를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그녀는 다른 제자들이 다 떠나간 빈 무덤 가에 홀로 남아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찾아 그 곁에 머물고 싶었던, 그 간절한 사랑과 착한 뜻이 그녀를 그곳에 머물게 한 것입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고 구빈원이라는 차갑고 비정한 세상에 던져진 소년 올리버의 이야기입니다. 올리버가 처한 현실은 그 자체로 혹독한 시련이자, 그를 끊임없이 죄와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는 힘이 작용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악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구빈원과 장의사 집에서의 학대를 피해 런던으로 도망쳐왔지만, 보호자 없이 홀로 남겨진 그는 자연스럽게 페이긴이 이끄는 소매치기 소굴(죄의 환경)에 머물게 됩니다. 올리버는 본성이 선했지만, 악한 환경의 힘은 강했고, 그곳에 머무는 한 원치 않는 범죄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시 자신이 소매치기하려던 친절한 브라운로 씨를 만나 선한 환경의 따스함을 맛보지만, 그곳에 굳건히 '함께 머물' 힘이 없었기에 페이긴 일당에게 쉽게 다시 끌려가 악의 소굴로 돌아옵니다. 이는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머물지 않으면, 아무리 선한 의지가 있어도 결국 죄의 환경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강도질에 동원되었다 총에 맞고 메일리 부인과 로즈 양의 보살핌을 받게 되면서, 올리버는 진정한 사랑과 안전을 경험합니다. 그는 이 선하고 사랑이 넘치는 환경이야말로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임을 깨닫고, 그들과 '함께 머물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는 이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임을 직감합니다.
결국 올리버가 사랑 안에 머물기로 선택하고 노력했기에, 그는 페이긴과 악당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브라운로 씨에게 입양되어 진정한 안식과 구원을 얻습니다. 올리버의 이야기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머묾'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 머묾이 없다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죄와 고통의 환경에 머무르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예화는 ‘피노키오’가 죄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기 위해 제페토 아버지를 찾는 과정이나, ‘엄마 찾아 삼만리’를 가는 아이에게서 잘 나타납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용서를 체험하고 그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맛보았다면,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그분을 찾지 않을 수 없고 그분과 함께 머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의 유혹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우리가 그 죄에 완전히 속박될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은 오직 그분과의 머묾을 통해서입니다.
그분 곁에 머물 때, 그분의 사랑은 우리 존재 깊숙이 스며들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죄보다 더 큰 존재라는 믿음을 심어줍니다. 이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고 따스한 사랑을 느끼며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는 엄마 품 안에서 자신이 안전하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며 생명의 양식을 얻습니다. 아기는 엄마 품을 떠날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영은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다만 거짓말은 이 그리워하는 영의 울림의 입을 막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오직 창조자만이 자신을 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음을 본성적으로 압니다.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처럼 창조자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그 양식을 찾고 머뭅시다. 그러면 천사도 만나고 반드시 그리스도께서도 만나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마리아야!
많은 이들, 특히 나이 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병은 치매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지 장애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 잊어버려서 제대로 지금을 살 수 없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짐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어느 책을 읽어 보니, 치매는 당신을 놓아주라는 신호라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냥 놔버려요. 당신이 가진 기억, 당신 인생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들, 별 대단치 않은 실패들, 성공들 모두 다요.”
슬플 수밖에 없는 병이지만, 슬픔 안에만 머물러서는 주님 뜻에 제대로 살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냥 놔버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을 사는 것입니다.
함께 지내는 아버지의 기억 혼란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형제님을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서는 치매 초기라면서 증상 완화 등의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아버님께서는 자기가 무슨 치매냐고 하면서 인정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65세 이상 노인 치매 유병률이 9.25%로 높은데도 자기는 아니라면서 화만 내신다는 것입니다. 치료받지 않으니 점점 증세는 안 좋아졌고, 계속된 아버지의 불평불만으로 가족 전체가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힘들어집니다. 치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 삶을 불평불만으로 바꿀 수 있다면, 열심히 불평불만 안에서 살면 되겠지요. 그러나 바뀌지 않는 것이라면 불평불만이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할 것이고, 무엇보다 스스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온 힘을 다해서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커다란 슬픔에 빠집니다. 죽음이 절대로 있을 수 없다면서 시간 전체를 부정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죽음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텅 빈 무덤을 발견합니다. 이제는 누군가가 주님을 꺼내 갔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정원지기로 생각합니다. 부정적 마음이 더 확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은 죽음에 그냥 머물지 않고 부활이라는 희망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바로 그때 “마리아야!”라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으로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사랑의 말씀은 우리를 진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해야 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말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꿀 수 없는 것은 인정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바꾸는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삶이라는 것은 길입니다.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사랑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은 부활을 이루는 가장 큰 힘입니다. 다시 나누는 기쁨이 사랑이고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계셔도 예수님이시고 언제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고마운 부활입니다. 고마운 마음을 잊고 살았습니다. 소중과 존중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 체험의 고유한 개별성과 숭고함입니다. 부활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가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여전히 부활은 진심으로 사랑한 이들의 부활입니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부활의 시간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랑의 부활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오늘도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지켜줍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5가지 성경 말씀, 지금 만나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04/24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4.24 |
---|---|
25/04/23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4.23 |
25/04/21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5.04.21 |
25/04/20 (일) 부활절 낮미사 평화방송 명동성당 생중계 (0) | 2025.04.20 |
25/04/19 (토) 파스카성야 부활절 미사 평화방송 명동성당 생중계 (0) | 2025.04.19 |
25/04/18 (금) 성금요일 미사 평화방송 명동성당 생중계 (0) | 2025.04.18 |
25/04/17 (목) 성목요일 미사 평화방송 명동성당 생중계 (0) | 2025.04.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