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알렐루야.
하느님, 해마다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며 기뻐하게 하시니 저희가 이 세상에서 지내는 축제로 영원한 파스카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4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4월 23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3,1-10)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 오늘 복음
(루카 24,13-35)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사도 3,1-10
오늘 제1독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루카 24,13-35
오늘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23일
이상진 아모스 신부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10:28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오늘 복음은 부활의 환희와 생명의 은총을 깊이 묵상하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어떻게 찾아오시는지 묵상하게 합니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 동안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 다가오셔서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하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예루살렘을 떠나는 속사정을 털어놓자 예수님께서는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날이 저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묵으시며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시자 그들은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봅니다. 이미 어두운 저녁이었겠지만 그들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자신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이야기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더 이상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떠난 이들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고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제자들의 증언을 들었음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데 마음이 굼뜬 어리석은 이들입니다.
세상을 밝게 비추는 예수님의 빛이 완전히 꺼져 버려 마음이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에게서 떠났는데 길 잃은 어린양을 찾는 착한 목자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시지 않고 찾아오십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슬픔과 두려움 때문에 떠났지만, 예수님을 만나 뵙고 용기를 얻어 돌아와 문제의 상황을 다시 마주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더라도 그분만큼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언제나 말씀과 성찬으로 우리 곁에 함께하시며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가진 것이 하나도 없을 때
어제는 어떤 분과 삶의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보다 좀 젊은 분인데 진이 빠진다는 표현을 하셨고, 그전에 코헬렛의 ‘허무로다!’가 마음에 와닿는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진맥진할 때가 성령의 때이고,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기 시작할 때라고 제 체험을 가지고 말씀드렸습니다.
내 힘, 내 능력으로 안 될 때 우리는 한계 체험이라는 것을 하지요. 한계 체험이란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제자들로 말하면 예수님 없이 호수를 건너다 거센 풍랑을 만났는데 자기들끼리 풍랑을 헤쳐가려고 하였지만 결국 기진맥진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기진맥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을 때 나타나시는데 시간으로 치면 어두운 밤을 지새운 새벽입니다.
새로운 해가 뜨고 새날이 시작되는 새벽은 이렇게 어두운 밤을 지새우고 오는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이때 주님을 만나게 되고,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도 이 시점을 거친 후 기적을 행합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은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는데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던 분이 돌아가시자 깊은 절망을 하고 가는 중입니다.
이들은 아직 주님을 하느님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절망하고 낙향할 때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주님이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실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엠마오의 제자들과 달리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을 주님이라고 하는데 이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제자들을 찾아가니 제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이렇게 죽었던 주님께서 시몬에게 나타나 베드로 안에서 부활하시자 베드로는 오늘 주님께서 서른여덟 해를 앓던 불구자를 고쳐주셨던 같은 주랑에 나타나 불구자를 고쳐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세상 욕망이 살아있고 자기 힘이 팔팔 살아있을 때는 주님께서 베드로 안에 죽어계셨습니다. 그러다 욕망이 좌절되고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힘이 쫙 빠져있을 때 주님께서 베드로 안에서 살아나시고, 베드로는 주님의 힘으로 불구자를 고쳐줄 수 있게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를 먹어 힘이 빠질수록 주님께서 제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성삼일 강론 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갈수록 주님과 함께 삽니다.
주님께서 제 안에 계시고 주님 안에 제가 있음을 늘 느끼며 삽니다. 저의 건강이 전만 못하고 제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떤 때는 슬프기도 하지만 그래서 기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때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 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 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그들의 희망과 믿음은 변화되고 깊어지고 정화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때가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할 때입니다. 바로 이때가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요,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떼어내다’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글자 그대로는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 곧 신비를 보는 눈은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는 일일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4,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주님!
곁에 함께 걸으시건만
당신을 알아 뵙지 못한
저를 용서하소서.
길동무가 되어 주시건만
곁에 없는 것처럼
무시하였음을 용서하소서.
뼈 속 깊이 계시고
입술에 가까이 계시고
발등에 등불이신
당신을 알게 하소서.
제 안에서 숨 쉬시며
함께 걸으시는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의 본모습은 그 숨은 희생이다.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 줍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체험합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우리가 만약에 이들처럼 성체 안에서 빵에 떼어 나누어주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뻐서 부활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결국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 하시는 것은 말씀을 이해시키는 일입니다. 어떤 성경 말씀을 이해시키려고 하셨을까요? 당신이 빵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성체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 안에서 그분의 수난에 대한 묵상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 아주 특별한 영화 ‘시네마 천국’이 있습니다. 성공한 영화감독 살바토레, 우리는 그를 '토토'라고 부를 겁니다. 어느 날 밤, 토토는 고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아버지 같았던 존재, '알프레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죠. 굳게 닫아두었던 기억의 문이 열리고, 이야기는 수십 년 전,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공간, '시네마 천국' 극장이 있던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호기심 많고 장난기 가득했던 꼬마 토토에게 '시네마 천국'은 온 세상과도 같았습니다. 영사 기사 알프레도는 까칠한 듯했지만, 몰래 영사실을 드나드는 토토를 내치지 못하고 결국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 부재했던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영사 기술뿐 아니라 인생의 지혜와 따스한 정을 가르쳐주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죠. 당시 마을 신부님은 영화 속 키스신이란 키스신은 모조리 잘라내라고 명령했고, 알프레도와 토토는 몰래 그 잘린 필름 조각들을 모으곤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된 토토는 알프레도가 사고로 시력을 잃자 그의 뒤를 이어 영사 기사가 됩니다. 아름다운 엘레나와 첫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군 입대와 엇갈림 속에 사랑은 아프게 끝나버리죠. 실의에 빠진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작은 마을을 떠나라. 네 재능을 펼쳐. 그리고 절대 돌아오지 마라. 편지도 하지 말고, 나를 찾지도 마라. 네가 성공했다는 소식만 기다리겠다."
마치 냉정하게 등을 떠미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토토의 더 큰 미래를 위한 알프레도의 가장 큰 사랑이자 희생이었습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습니다. 성공했지만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중년의 토토는 알프레도의 장례식을 위해 마침내 고향 땅을 밟습니다. 모든 것이 변해버린 마을, 폐허가 된 '시네마 천국' 극장 앞에서 그는 알프레도가 남긴 유일한 유품, 녹슨 필름 통 하나를 건네받습니다.
로마로 돌아온 토토는 혼자 영사실에 앉아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을 돌립니다. 화면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수십 년간 신부님의 검열로 잘려나갔던 그 모든 키스 장면들이, 알프레도의 손길로 마법처럼 이어붙여져 하나의 긴 키스 몽타주로 상영되는 것이었습니다! 입을 맞추는 연인들의 모습이 쉴 새 없이 이어지자, 토토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그것은 단순한 필름 조각이 아니었습니다. 토토의 성공을 위해 기꺼이 그를 떠나보내고,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일한 친구였던 토토를 보지 못하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감내해야 했던 알프레도의 깊은 사랑과 희생이 고스란히 담긴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 냉정하게 등을 떠밀었던 알프레도의 아픔, 그 긴 시간 동안 토토를 향했던 변치 않는 애정. 그 모든 감정이 키스 장면에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토토는 그제야 알프레도의 진심을 온전히 깨닫고,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사랑의 장면들을 통해 오랜 세월 묵혀두었던 슬픔과 그리움을 씻어내며 마음의 정화를 경험합니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서야, 토토는 알프레도가 남긴 가장 특별한 선물을 통해 진정한 그의 사랑과 희생을 마주하고, 가슴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하는 행위를 단지 ‘게임’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은 자신이 그 게임을 해서 살아났는지 압니다. 그러나 차차 깨닫게 되겠지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는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음을. 이것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아버지를 만나는 과정입니다. 선물의 가치는 그 속에 스며있는 피를 볼 때 알게 되고, 그 가치를 알 때 그 주는 이를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구약에서 ‘요셉’은 왜 형제들에게 일부러 고통을 느끼게 하였을까요? 형제들에게 그가 주는 식량으로 그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도둑이라는 오해를 받고 멸시받음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면,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식량이 자신들이 팔아넘긴 요셉의 피가 스며있음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식을 먹으면서도 진정한 요셉을 만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주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기도는 곧 성체 안의 예수님을 알아볼 준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알 수 있는 마음은 사실 실제의 1/7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빙산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빙산에서 물 위에 있어서 사람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1/7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 6/7은 물 밑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대로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실제로 불안과 갈등이 계속 있는 것이고, 또 각종 문제로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꼭 100% 알아야만 할까요? 알 수 없는 것을 알려면 커다란 힘이 필요합니다. 만약 중국어를 잘 모르는 사람이 중국 책을 공부한다면 쉬울까요? 당연히 엄청난 힘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남의 마음을 아는 것도 이렇습니다. 그래서 겸손의 덕, 즉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갖춰야 합니다. 이를 통해 충분히 지금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겸손과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자기 마음도 제대로 알 수 없는데,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알 수가 있을까요? 오랫동안 부부의 연을 맺고 사는 분들도 상대 마음을 몰라서 싸우지 않습니까? 특히 무엇보다 내 마음인데, 상대방이 내 마음을 평가하고 저울질하면 속상하고 억울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싸우게 되고, 여기에 엄청난 힘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나도 내 마음을 100%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좋고, 다른 때는 저것이 좋다고 말하는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마음을 몰라준다고 억울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모르겠다고 힘들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과 사랑을 통해 우리는 마음에 상관없이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제자들이 왜 엠마오로 가고 있었을까요? 박해를 피해서 도망치는 중이라면, 예수님인 줄 모르는 상태에서 함께 걷는 예수님에 대해 말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예수님 죽음 이후 자기 생업으로 돌아가려 했던 베드로(요한 21,3 참조)처럼 실망감으로 가득 차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몇몇 여자의 증언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증언입니다. 문제는 당시 여자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았던 분위기를 따라 몇몇 여자의 증언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마음이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특히 빵을 떼실 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주님께 대한 마음이었지만, 제자들도 예수님 죽음 이후 변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들은 충분했고, 주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뒤돌아볼 때 비로소 이해되지만, 우리는 앞을 향해 살아야만 하는 존재다
- 키르케고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갇혀있지 않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열려 있기에 타오를 수 있습니다. 함께하기에 더욱 뜨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소는 뜨겁게 타오르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말씀과 빵으로 뜨겁게 깨닫는 부활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우리에게 늘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를 다시 살게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기쁨의 부활입니다.
다시 우리의 자리로 돌아갈 부활의 힘입니다. 우리 마음자리에 예수님을 모십니다. 부활은 기쁘게 마주 앉아 듣고 마시고 함께 먹는 따뜻한 머무름입니다.
노을도 타오르고 마음도 타오릅니다. 함께하는 식탁에서 함께하는 여정에서 익어가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루카복음 24장 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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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오늘도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지켜줍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5가지 성경 말씀, 지금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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