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승리하신 당신 손을 한마음으로 찬양하나이다. 지혜는 말못하는 이들의 입을 열어 주고, 아기들의 혀도 또렷이 말하게 하였나이다. 알렐루야.
하느님, 뭇 백성을 한데 모으시어 하느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셨으니 세례로 새로 난 이들이 같은 마음으로 믿고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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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4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4월 24일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3,11-26)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24,35-48)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사도 3,11-26
오늘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 무렵 치유받은 불구자가
11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온 백성이 크게 경탄하며 ‘솔로몬 주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12 베드로는 백성을 보고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13 여러분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그분을 놓아주기로 결정한 빌라도 앞에서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이사악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16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17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19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20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정하신 메시아 곧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21 물론 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예로부터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만물이 복원될 때까지 하늘에 계셔야 합니다.
22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야 한다.
23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이다.’
24 그리고 사무엘을 비롯하여 그 뒤를 이어 말씀을 전한 모든 예언자도 지금의 이때를 예고하였습니다.
25 여러분은 그 예언자들의 자손이고, 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희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여러분의 조상들과 맺어 주신 계약의 자손입니다.
2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루카 24,35-48
오늘 복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24일
조승현 베드로 신부
✚ 미사시작 00:36
✚ 강론시작 12:06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 가운데에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 (루카 24,36) 하고 인사를 건네십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가득하였던 제자들의 마음이 주님을 만나 뵙고 차츰 평화와 확신으로 채워지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깊은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예수님이라는 희망을 잃고 엠마오로 떠나던 두 제자를 되찾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다른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몸소 체험한 이들에게 그 일을 전하여 듣고도 여전히 두려워하였기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음에도 바로 알아 뵙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놀란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음식을 드시며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임을 확인시켜 주시니, 그제야 제자들은 기쁨을 누리고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평화를 미리 베풀어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그리고 그들이 평화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구원을 위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루카 24,46) 이루어짐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미 주신 평화의 삶을 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도 두려워하고 때로는 의심하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갈팡질팡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불안과 혼란 그리고 닫힌 마음속으로 오셔서 평화를 주십니다.
그분의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세상의 평화를 넘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낫게 하고 새로이 살게 하는 은총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느끼는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오늘 제자들은 기쁨과 두려움 두 가지 감정 상태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감정이 격하게 출렁이고 널뛰기를 합니다.
지옥에 갔다가 천당까지 간다고나 할까요? 이것을 오늘 복음은 ‘너무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또는 ‘너무 기쁜 나머지’라고 합니다.
이렇게 감정이 극단적으로 널뛰기하면 일반적으로는 병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조울증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이렇습니다.
“정신 질환의 하나로 감정 변화의 기복이 심하여 상쾌하고 흥분된 상태와 우울하고 억눌린 상태가 번갈아 가며 또는 한쪽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증세”
어쨌거나 너무 두렵거나 너무 기쁘거나 하면 일반적으로 정상적이지 않거나 불안정하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자들의 감정 기복은 인간적으로는 비정상이지만 하느님 체험에 있어서 흔히 보이는 현상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할 때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이 두려움과 기쁨이고, 그 감정이 실로 어마어마하고 압도적이라고 신비가들은 말합니다.
이런 압도적인 두려움 때문에 어떤 때는 유령이라고 느끼게도 되는데 오늘 복음에서도 그랬지만 풍랑과 싸우는 중에 주님이 나타나실 때도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두려워하였지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런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만 하면 유령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났을 때 두려움만 있다면 그것은 유령 또는 악령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을 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하느님 체험입니다.
그런데 두려움과 기쁨은 동시에 느낄 수도 있고, 두려움이 먼저 기쁨은 나중에 느낄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내가 만난 것이 악령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면 두 감정을 같이 느껴야 한다는 것이고, 이때의 두려움은 나쁜 두려움이 아닐뿐더러 필요한 감정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지혜의 시초라거나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나 하느님의 두려움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기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말 그대로 대상적인 두려움이고, 앞서 봤듯이 다른 두려움과는 다른 것으로서 이 두려움이 없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체험하지 못하기에 필요합니다.
이 말은 두려움 없이 하느님을 만난다면 하느님을 만나고도 우린 하느님으로 체험치 못하기에 그래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두려움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필요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하느님의 두려움은 하느님을 체험한 뒤 우리가 하느님께 동화되고 신화됐을 때 지니게 되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느끼시는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두려움을 느끼신다고요? 물론 우리의 두려움과 다르지만 하느님도 두려움을 느끼십니다. 사랑의 두려움이고 우리가 잘못될까 봐 두려워하시는 것입니다.
어제 수녀원을 걸어오는 길에 어린아이를 봤는데 세워져 있는 자전거가 신기한지 그리로 다가가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저 자전거가 넘어지면 큰일 나는데 하는 두려움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남의 애인데도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사랑이고 하느님의 두려움입니다. 맹자도 이런 마음을 예로 들면서 성선설을 주장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우리의 체험이 하느님 체험이 되려면 이런 두려움들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기쁨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기쁨이 없는 하느님 체험은 하느님 체험도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 체험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부디 두려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는 하느님 체험하시길!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온다.
주간 첫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루카 24,34)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다가 되돌아온 두 제자들도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는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건만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이 뻣뻣하여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특히 성체성사를 매일 거행하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보고 만져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전히 친교를 이루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토록 보여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갑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어야 했습니다. 진정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성경말씀”을 들려주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루카 24,45)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 속 깊은 곳을 여시어, 침묵의 언어로 새겨진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깨달은 바를 제 삶으로 인쇄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꽃피우소서..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4,45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주님!
제 마음 속 깊은 곳을 여시어,
침묵의 언어로 새겨진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깨달은 바를
제 삶으로 인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는 잉크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질서,
당신의 뜻과 지혜,
형언할 수 없는 당신의 신비들을
온몸에 새기며 살아가는
당신의 복음서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주님의 일꾼인 것 자체로 존중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드디어 당신 사도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이들은 정말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음식을 드시고, 성경까지 설명을 해 주십니다. 이렇게까지 당신을 드러내신 사람들이 없습니다.
사도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당신 부활을 믿게 하셔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파견된 자라는 뜻입니다. 심부름시키는데 무엇을 하라고 알려주지 않을 수 없듯, 파견하는데 사명을 주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문제는 주려고 하는 마음과 그 사명을 받아들인 사람의 차이입니다. 마음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제든 생각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받아들인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그것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됩니다.
이것이 사명을 받아들임과 아닌 사람의 차이이고 그에 따라 주어지는 은총도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은 맹세까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절실함이 은총을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이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더 많은 표를 얻고도 급장을 하지 못하고 부급장이 됩니다. 이 사실을 안 애순이 어머니는 가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급장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자녀가 억울한 것은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밭을 갈아주고 진주목걸이를 차고 떡과 봉투까지 넣어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담임 선생에게 화를 내도 모자랄 판에 머리를 깊이 조아리며 애순이를 잘 부탁한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다른 건 다 봐도 자녀가 억울한 것은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는 것도 마찬가질 것입니다. 은총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공표하여 그렇게 여겨지는 사람에게 더 주어집니다. 그러니 그 은총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런 존재가 아니게 자신을 몰아붙여야 합니다. 부모가 계신 데도 그런 억울한 상황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증인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면 억울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파견된 자로 섰습니다. 모세는 “두려워하지 마라. … 주님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탈출 14,13‑14)라고 백성 앞에서 선포한 뒤, 물러설 곳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지팡이를 들었습니다.
그 즉시 홍해가 갈라져 길이 열렸습니다. 홍해 앞에서 사실 모세보다도 하느님께서 기적을 주지 않으시면 안 되는 막다른 상황에 몰렸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나아가십시오. 이스라엘 모든 군인이 두려워 떨던 거인 골리앗 앞에 어린 목동 다윗이 나섭니다. 그는 하느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이스라엘을 대표해 싸우겠다고 '자원'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갑옷도 거절하고 평소 쓰던 물매와 돌멩이만 들고 나갑니다.
이는 인간적인 힘이 아닌,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자신의 역할(하느님의 용사)에 대한 확신을 보여줍니다. 이 절실한 믿음과 공표된 역할 수행 의지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용기와 기술(은총)을 주셔서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하셨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인도 콜카타 빈민가 한복판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서약하자, 단돈 5루피로 시작한 사도가 전 세계 130개국으로 퍼졌고, 살아있는 동안 500여 곳의 선교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주님으로 나아가는데, 주님은 사람들을 실망시켜 당신의 능력이 약하게 보임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서원하십시오. 선포하십시오. 파견되십시오. 그렇게 자신을 막다른 곳으로 모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은총을 주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니 본당에서도 ‘선교사’란 이름을 다십시오. 그러면 더 큰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본당의 봉사자로서 이름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도록 은총을 주시지 절대 실망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당 봉사자 건, 선교사 건, 수도자 건, 사제 건, 주교 건, 교황이건 그 맡은 직무 자체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일을 하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 자체, 그리고 그 결단에 합당한 은혜를 주시는 하느님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자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 하고, 부모는 부모가 바라는 길을 자녀가 가길 원합니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심한 갈등을 겪는 부모와 자녀를 종종 보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답은 결정되어 있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기에 자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포기하세요. 결국 애가 이기리라는 것을 아시잖아요? 강요하지 말고 자유를 주세요.”
속이 타겠지만, 하고 싶은 것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사이 안 좋은 상태에서 부모 원하는 것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조금만 상황이 안 좋아져도 부모 탓을 하게 됩니다.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이런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물론 훗날 “왜 더 강하게 반대하지 않으셨어요?”라면서 원망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또 부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 짐을 알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 이 말의 함정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더 많은 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속적 성공 여부를 떠나 진정한 행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으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과 대화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대화라고 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분명히 지혜와 힘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고 세상의 판단 기준만을 내세워서 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살펴주시지 않는다면서 불평불만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의지는 기도를 통해서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사도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유령이 아니라 살과 뼈를 가지신 부활하신 당신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자 함께 음식을 잡수시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삶 안에서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믿고 또 주님과 함께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삶 안에서 누리면서 살게 됩니다. 주님 ‘따로’, 나 ‘따로’의 삶이 아닌,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 안에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됩니다.
오늘의 명언
청렴은 백성을 이끄는 자의 본질적 임무요, 모든 선행의 원천이요, 모든 덕행의 근본이다
- 다산 정약용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손과 발이 부활을 드러냅니다. 분명 예수님의 손과 발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내놓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상처(傷處)가 만들어내는 사랑입니다. 상처와 죽음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상처가 우리의 상처를 위로합니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은 분명 예수님의 살아계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상처로 우리가 살아갑니다. 상처난 손과 발에는 용서와 기도가 있습니다. 사랑과 상처는 한 몸입니다.
아픈 상처를 보듬어 주라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로 우리 상처를 보듬어 주십니다. 상처의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상처라는 공통점에서 공동체는 다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사랑의 상처는 헛손질과 헛발질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위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뿐입니다.
상처에서 나오는 부활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천의 증인들입니다. 실천의 부활이며 부활의 실천입니다.
루카복음 24장 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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