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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4/20 (일) 부활절 낮미사 평화방송 명동성당 생중계

by 평화다방 2025.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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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시 살아나, 여전히 당신 안에 있나이다. 알렐루야. 제 위에 당신 손을 얹어 주셨나이다. 알렐루야. 당신 지혜는 놀라운 일 이루셨나이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하느님, 오늘 외아드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저희가 주님의 부활 대축제를 지내며 성령의 힘으로 새로워지고 생명의 빛을 받아 부활하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부활절 낮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4월 20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4월 20일
부활절 낮미사
평화방송 명동성당
생중계

주님부활대축일 낮미사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4월 20일 주님부활대축일 낮미사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0,34ㄱ.37ㄴ-43)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 제 2독서
    (콜로 3,1-4)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 오늘 복음
    (요한 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사도 10,34ㄱ.37ㄴ-43
오늘 제1독서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여러분은 

37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39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1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콜로 3,1-4
오늘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요한 20,1-9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부활절 미사 생중계

 

 

2025년 4월 20일 12시
주님부활대축일 낮미사
평화방송 명동성당 생중계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으로 향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심을 슬퍼하며 그리워하던 그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급히 달려가 이 소식을 전하자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가는데, 그 안에서 예수님 대신 아마포와 잘 개켜진 수건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보고 믿었습니다(요한 20,8 참조). 다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13,23)조차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20,9) 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베드로와 요한의 것과 닮아 있습니다. 깊은 슬픔 속에서도 주님 곁에 머무르고자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는 데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어도 무덤에 가서 보고 믿었던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가 의심이나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향하여 끝까지 나아가야 함을 알려 줍니다. 보고 믿었고 이제 깨닫게 될 그들처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란 보고 깨달으며 점점 깊어지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어 있는 무덤을 통하여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과 희망을 선포하십니다. 빈 무덤은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아가고, 슬픔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코 포기하시지 않는다는 약속의 증거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 우리는 오늘 제2독서에서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라고 말하는 것처럼, 세상의 것들만을 추구하거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대신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정신을 살리는

주님 부활 대축일이니 크게 기뻐해야 함이 마땅한데 솔직히 저는 그리 기쁘지 않고 아주 무덤덤합니다.

부끄럽게도 사순시기가 부담스러운 점이 있었는데 사순시기가 끝나서 기쁜 정도이고 더 문제인 것은 그러면서도 그리 죄의식이나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요. 주님께서 제 안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야 기쁜데 주님께서 제 안에 살아계시니 다시 말해서 죽어 계시지 않으니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시는 기쁨이 제게 있을 리 없지요.

또 주님께서 제 안에서 죽어 계심으로 저도 죽음의 상태에 있다가 주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저도 다시 살아나야 기쁜데 그렇지 않으니 기쁨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요.

게다가 저의 공동체 생활도 참으로 만족스럽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정도의 세대 차이가 있음에도 그런 세대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주님 사랑이 저희 안에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 관구장님이 법적 방문을 오셔서 저의 영적인 상태를 물으셨을 때 나중에 더 늙고 건강이 나빠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현재 저는 주님이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을 느끼며 살기에 아주 기쁘고 즐겁게 살고 있고 공동체도 서로 잘 지내고 있기에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우리 공동체만 이래도 되나 미안하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일까 이번 사순절과 부활절에 크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것이 제가 저의 행복에 안주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저의 부활 강론은 시대 상황 안에서 부활의 의미를 담는 내용이었고, 올해처럼 산불이 크게 나면 만사를 제쳐놓고 산불 현장에 갔을 것입니다.

이유들이 없지 않지만 어쨌거나 저는 저의 평화와 행복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지 않고,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는, 나와 내 공동체의 행복과 평안함에 안주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자로의 비유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름 없는 부자의 불행이고, 교황 프란치스코가 복음의 기쁨에서 지적하신 현대인의 불행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이름 없는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오히려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라자로는 오늘날의 노숙인처럼 이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불행에 담을 쌓고 담장 안에서 이 세상 행복에 안주하다가 천국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에서 내적 생활이 담장 곧 자기 안에 갇히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자리가 없기에 하느님께 오는 기쁨도 없고, 이웃에 대한 열정도 사그라들어 자기 안에 불만과 분노만 있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제가 저와 저의 공동체 얘기를 길게 한 것이 이 뜻입니다. 저도 공동체도 신자유주의의 풍요를 누리고 즐기면서 부지불식간에 신자유주의에 점령당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소비주의와 쾌락주의에 프란치스칸 정신 곧 가난, 작음, 형제애 정신이 죽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욕망을 합리화함으로써 욕망은 살고 사랑은 죽게 만듭니다.

신자유주의는 고립의 정신을 심화시킴으로써 혼밥과 혼족은 늘게 하고 형제적 삶은 시들하게 만듭니다. 욕망은 펄펄 살아있고 사랑은 죽어있습니다. 육의 정신은 살아있고 프란치스칸 정신은 죽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부활에 해야 할 것은 죽어있는 정신들을 살려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기도와 헌신의 정신, 우리의 영성을 살려고 하는 정신을 되살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부활하신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알렐루야! 부활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달려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그렇다면, 그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혹 여러분도 그분이 어디에 모셔졌는지 모르십니까? 진정, 부활하신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디에 모시고 계십니까?

‘부활하신 분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를 보기 위해, 먼저 ‘부활은 대체 어디에서 벌어지는지?’를 들여다봅니다. 그것은 당연히 ‘무덤’에서 벌어집니다. 곧 ‘죽음’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니 죽음이 있는 곳에 부활이 있습니다. 이는 죽음 없이는 부활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내 삶 안에서 죽음을 맞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냥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으로 건너가는 죽음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대체 왜 죽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우선 모든 죽음의 공통적이고 일차적인 이유는 ‘태어났음’에 있습니다. 그 누구도 태어나지 않고서는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탄생이 죽음의 제1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단 한 분’ 예외가 있습니다. 부활의 신비는 바로 이 분에게서 드러납니다.

이를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분의 탄생의 결과라고 말하기보다, 그분이 죽을 수 있도록 탄생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탄생’이 발생했다는 것은 탄생이 죽음의 원인이 아니라, 죽음이 탄생의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이 탄생의 원인이라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분명 이 죽음에는 탄생이 있습니다. 곧 탄생에 죽음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탄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죽음이 부활의 새로운 탄생이 됩니다.

여기서는 탄생, 죽음, 부활이 하나로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이 참 생명을 인간에게 건네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이 얼마나 크고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랑의 신비인지요!

이를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시고 잉태되셨다. 그리고 세상은 만들어졌다.”

그러니 ‘못 박힘’은 성령으로 날인되어 잉태됨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잉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무덤으로부터 부활한 ‘새로운 창조’를 말합니다. 그렇게 세상은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비로소 부활과 함께 새로운 생명,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삶의 방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살아야 합니다. 곧 우리는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를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사도 10,41-42)

그러니 우리에게는 부활을 삶으로 증거 해야 하는 소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해 봅니다. ‘이 부활’, ‘이 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이러한 삶을 파스칼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끝 날까지 고통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고통과 죽음 가운데 부활의 생명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고통 받고 죽으면 부활을 맛볼 것입니다. 고통 받기를, 죽기를 거부하면 부활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 안에 사랑의 순교가 자리 잡으면, 곧 사랑하여 자신을 내어주면 그 안에서 함께 죽으시면서 함께 살아계신 그분의 생명을 체험할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지금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죽음 가운데 있고,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의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고통과 죽음의 삶 한가운데 모셔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 안에 살아계신 야훼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희의 고통과 죽음 속에서 동행하시며 저희와 함께 부활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알렐루야!!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20,4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주님!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가듯
목동들이 구유로 달려가듯
고귀한 경쟁에서 질세라 
빨리 달리게 하소서!

무덤을 들여다보지만 말고, 
안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비어져 나오게 하소서. 

비어진 맑은 눈으로 
당신 부활을 보게 하시고, 
본 바를 믿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부활을 전하는 자의 행복

영국에서 이런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사별하고 설움을 느끼며 살던 어떤 영국 어머니는 외아들 ‘티모스 베이커’를 무시 받지 않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1등을 하라고 교육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하였고 영국 옥스퍼드는 물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도 합격 통지서를 보내왔습니다. 그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저녁 어머니는 아들과 그의 여자 친구 문제로 큰 싸움을 벌였습니다. 어머니는 공부를 마친 후 더 좋은 환경의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으니 당장 헤어지라고 했고, 화가 난 아들은 어머니를 야구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하였습니다. 기자회견 때 티모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어머니로부터 무조건 1등을 하도록 강요받고 살았다. 그리고 나의 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쟁취해야 한다고 배웠다. 나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의 꿈을 막는 자는 누구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의 꿈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장애물이 어머니일지라도 내 앞에서 치워버려야 했다. 그래서 내 꿈을 막는 어머니를 죽여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이 아이의 어머니는 왜 행복해질 수 없었을까요? 아이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죽어도 사는 완전히 다른 신과 같은 존재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성자께서 사람이 되셔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사람이 부활을 믿지 못하면 티모스 베이커의 어머니처럼 모기를 키우게 됩니다. 사람이 나빠지는 이유는 다 죽는 게 두려워서 그럽니다. 어차피 죽어도 사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기에 나빠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부활을 믿나요? 부활을 믿으면 어떤 표징이 따를까요? 부활을 전합니다. 이 믿음을 전할 때 내 주위에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로 둘러싸이게 됩니다. 예전에 ‘선덕여왕’이란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고현정이 연기한 ‘미실’이란 캐릭터는 악역이었지만, 나름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화랑의 최고 수장으로서 미실은 왕을 폐위시키는 데 화랑들을 이용합니다. 자신이 밀려날 위기에 처하자 미실은 화랑들이 자결하게 만들어 왕을 폐위시킵니다. 자신을 위해 죽어줄 사람들이 자기 주위에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께서 사라지셨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확인합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많은 이들의 증언과 자신들이 직접 체험하고 나서는 믿게 됩니다.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인 막달레나는 점점 부활의 증인들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어미를 잃은 호랑이들을 젖이 나오는 리트리버에게 맡겼습니다. 리트리버는 어미가 없어 두려움에 떠는 새끼 호랑이들의 걱정을 줄여줬습니다. 리트리버의 젖을 먹고 자란 호랑이들은 커서도 리트리버를 어미로 여깁니다. 리트리버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합니다. 리트리버는 개로서 할 수 있는 이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개보다도 행복한 개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 입으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호랑이들을 키웠습니다. 젖은 주는 일은 자기 살과 피를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 일을 통해 부활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 존재일까요?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믿음을 주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물 위를 걷고 죽어도 부활하는 존재라고 가르칩니까, 아니면 생존을 위해 돈이나 명예,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까? 예수는 예수를 낳고 모기는 모기를 낳습니다. 모기를 낳으면 내 주위에는 모기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낳는 이들은 참 행복을 누립니다. 예수를 낳는다는 말은 우리는 죽어도 사는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서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와 경쟁을 합니다. 나비가 되는 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누에고치를 통과하는 죽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고 죽어봅니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 곧 호랑나비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랬더니 자기 주위엔 다른 나비들이 모여듭니다. 애벌레들에게 부활을 선포하지만, 정작 자신은 꽃의 꿀을 먹으며 나비들 사이에서 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수영 배울 때가 생각납니다.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을 배운 상태에서 가끔 잠영을 해서 누가 더 멀리 가나를 시합하곤 했습니다. 최대한 숨을 들이마신 뒤 잠영을 했습니다. 처음 했을 때는 중간 정도밖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끝까지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숨을 더 오래 참아서 그런 것일까요? 그보다는 발차기의 힘이 더해지면서 또 중간중간 숨을 내뱉는 요령도 생기면서 끝까지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기술과 힘이 더해지면서 더 멀리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종종 숨 막히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바로 고통과 시련의 순간입니다. 그냥 숨 막힌다고 좌절하고 포기해야 할까요? 이런 상황이 내게 다가왔다면서 원망하고 불평불만만 가져야 할까요? 이때가 바로 기술과 힘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을 비롯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숨이 탁 막히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고, 이제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그 모든 일들이 헛된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괜히 시간 낭비를 한 것 같고,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한탄할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박해자를 피해 도망갔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슬픔 속에서 길 잃은 아이의 모습만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숨 막히는 순간을 끝낼 수 있도록 부활하시어 우리 곁에 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처음으로 목격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립니다. 숨 막히는 순간이 풀렸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커다란 기쁨과 희망만이 그녀에게 찾아왔습니다.
 
만약 마리아 막달레나가 모든 것이 끝났다면서 예수님 무덤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나중에야 간접적으로 누군가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들을 수 있었겠지만, 그만큼 숨 막히는 순간이 길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 예수님께 다가갔기에 가장 먼저 기쁨과 희망의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고통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기술과 힘을 키워야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랑으로 우리의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에 도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숨만 참아서는 안 됩니다. 숨 참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기술과 힘을 키워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이른 아침 예수님을 향해 갔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말입니다.

 

오늘의 명언

현명한 사람의 자기의 빛나는 지혜로 남 또한 빛나게 만든다

- 맹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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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콜로새서 3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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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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