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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2/10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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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주님이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리니, 그날에는 큰 빛이 비치리라.

하느님, 온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셨으니 구세주의 영광스러운 성탄을 저희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2024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2월 10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2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40,1-11)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 오늘 복음
    (마태 18,12-14)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 오늘 말씀 카드
    (이사 40,9)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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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40,1-11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한 소리가 외친다.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소리가 말한다. “외쳐라.”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하고 말하여라. 

10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당신의 팔로 왕권을 행사하신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 

11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

 

 

마태 18,12-14
오늘 복음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2월 10일
이창항 세바스티아노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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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하느님께 더없는 기쁨을 드리는 여정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보라,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은 늘 내 앞에 서 있다”(이사 49,14-16). 

이사야 예언서의 이 말씀이 마치 오늘 복음 말씀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잊으시거나 포기하셔 버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당신을 떠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소중한 자녀들이며, 당신 사랑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 사랑을 믿으며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3)라는 말씀처럼,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주인공이 됩니다. 

기도가 사라져 버린 삶에 다시 기도가 시작된다면, 그 또한 하느님께 더없는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의무와 짐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없는 기쁨을 드리는 여정입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바빌론에 유배 중이던 이스라엘에게 하신 이 위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러니 절대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희망을 품고 우리의 목자이신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양이 되어 오늘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하며 기도하며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오늘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시는데 누구보고 위로하라는 말씀일까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죽는소리하는데 누가 누구를 위로한다는 말입니까? 정해진 사람이 있습니까? 

정해진 사람은 없지만 뽑힌 사람은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위로자로 뽑으실 때 응답한 사람이고, 자기는 위로자가 되기 싫고 위로받는 사람이 되겠다는 사람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고 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적게 뽑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응답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당이 비좁아서 천국 문이 좁은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위로자로 주님께서 부르실 때 뽑히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 생각해볼 것입니다. 

나는 위로받는 사람인 것이 좋은지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 좋은지. 힘들다고 죽는소리를 와서 하는 사람이 많은 내가 좋은지 만나는 사람마다 죽겠다고 하소연이나 하는 내가 좋은지. 위로해 줄 수 있는 내가 되는 것이 좋다면 이제 위로해 줄 수 있는 내가 되도록 해야겠지요. 

어떻게? 어떻게 사랑을 키웁니까? ‘사랑하며 기도하며’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면서 배우고 성장케 합니다. 그러면서 꼭 기도해야 합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는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

참 묘한 일입니다. 나무들은 걸치던 옷들을 다 벗고서 겨울을 나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옷을 겹겹이 덧입고서 겨울을 납니다. 겨울나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데, 우리네 인간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채웁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자신을 그렇게 채우는 바람에 그분이 들어오시지 못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도 자신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요? 비워진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오늘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에 대한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의 ‘목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 인류라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그리스도’를 표상합니다.

이 비유는 “목자의 기쁨”과 “아버지의 뜻”에 대해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리고 그 이유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마태 18,11)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비록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의 기쁨’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버지의 기쁨’ 입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결국, 이 비유의 정점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사랑’을 행함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아버지의 이 지극하신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목숨을 바쳐 ‘이 사랑’을 행하셨고, 바로 그 일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목자이신 ‘당신의 소명’이요,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소명’임을 말해줍니다. 

<제 1독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이사 40,11)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찾고 계시는 아버지의 음성,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에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처럼 ‘먼저’ 찾아 나서고, ‘먼저’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작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끌어안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그렇게 작은 모습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기쁨’보다 우리 ‘자신의 뜻’과 ‘자기 기쁨’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냉정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대체 어디에서 기쁨을 찾고 있는가?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8,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주님!
당신 기쁨이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너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시는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네 형제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는 
당신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먼저 찾아오신 당신처럼 
저도 먼저 형제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제 사랑의 소중함보다 
당신 사랑의 소중함을 먼저 보게 하시고
‘당신 뜻’의 소중함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 : 도움은 고마운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의 몫

만약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환자를 심폐소생술로 살려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소리를 해 볼까요? 만약 이 간호사가 자신이 구해 준 남성의 가족에게 계속 금전을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자기 아버지를 구해 준 이 사람에게 계속 돈을 빌려주거나 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고마움만으로는 마음의 문이 지속해서 열리지 않습니다. 

중세 유럽 어느 용병대장이 적으로부터 한 도시를 구해주었습니다. 이에 성내의 선량은 시민은 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갖가지 방안을 짜냈습니다. 

‘어떻게 이 은혜를 갚을까? 금전으로 보답하는 것은 너무 경박해 보일 듯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많은 금, 은을 주더라도 어찌 성내 시민을 지켜 준 공적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이 용병 대장을 성의 영주로 임명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곧 또 다른 이들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반박했습니다. 사람들은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를 목매달아 죽인 후에 우리의 수호성인으로 모시자.”

결국 용병 대장이 받은 보답은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그 사람이 자신에게 고맙게 여기는 일을 해야 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마운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고마운 사람보다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지혜로운 사람은 고마운 존재가 되기보다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상대가 당신에게 고마워하기보다는 기대하고 의지하게 만들어라. 의지하는 것은 오래 기억되지만, 감사의 마음은 금세 사라지기 때문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에서 목을 축이면 자신의 갈 길을 가고 아무리 맛있는 과일을 먹어도 먹고 난 뒤 껍질을 쓰레기통에 던진다. 의지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더 이상 예의도 존경도 사라진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할 때 고마운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 또한 교만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에 고마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고마움이라는 것은 하나의 ‘짐’과 같습니다. 보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짐을 지워주면 지어줄수록 부담만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줄기차게 얻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열어 모든 것을 얻어내려면 그분께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그분께 어떻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한 마리 양도 잃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면 됩니까? 양들을 데려오는 역할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도움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영화 ‘인턴’은 70세의 은퇴한 벤 휘태커가 새로운 도전을 위해 온라인 패션 회사의 시니어 인턴 프로그램에 지원하며 시작됩니다. 벤은 회사의 젊고 재능 있는 CEO 줄스 오스틴과 함께 일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줄스가 그를 부서 이동시키려 하며 벤의 역할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그러나 벤은 경험과 지혜, 따뜻한 성품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으며 점차 줄스의 신뢰도 얻게 됩니다. 줄스에게 필요한 인생의 조언을 해 주며 회사에서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기 때문입니다. 

줄스는 사업과 가정을 동시에 관리하며 겪는 스트레스와 고립 속에서 벤과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열게 됩니다. 벤은 그녀의 삶에 조언과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며 줄스가 자신의 약점과 두려움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벤은 줄스에게 단순한 인턴이 아닌, 믿을 수 있는 동료이자 멘토로 자리잡습니다. 

결국 줄스는 벤이 자기 삶과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깨닫고 그를 깊이 신뢰하게 됩니다. 줄스는 회사에서는 벤이 인턴이지만, 인생에서는 자신이 인턴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에 인생을 오래 산 벤의 품격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부족한 점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실 때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당신 십자가를 양보하였습니다. 

시몬은 그렇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고, 우리는 죽어서도 하느님께 필요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영원한 생명을 계속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언가 청하기 이전에 내가 그분의 필요에 관심 두는 사람인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예전에는 매주 산에 다녔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등산을 좋아했습니다. 등산하면서 다음에 등반할 산을 생각했고, 등산 갈 생각에 설렘을 갖고 또 한 주간을 보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할 일을 소홀히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편안하게 등산에 임하려면 열심히 한 주를 보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냐고 물으면, 저기에 산이 있으니 오르고 그곳에 계속 살 수 없으니 내려온다고 답했습니다. 남들과 다르지만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이 늘어나면서 산에 가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가고 오는 교통 시간과 등산의 시간을 모두 포함하면 온종일 시간 투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를 ‘남들도 모두 그렇게 사니까….’라면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등산을 멀리했습니다. 결국 지금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만의 좋은 취미가 사라진 것입니다. 
 
남들이 간 길을 그냥 따라가는 삶은 편하고 안전합니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든 말든 진정 독창적인 무엇인가를 잘해 나가는 삶, 이것이야말로 진짜 자기 삶이 되어 기쁨 안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사는 삶이 목표가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 삶이 과연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나처럼 사는 삶, 나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삶이야 말로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사는 삶이 될 것입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작음도 소중하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하늘 나라의 논리는 이렇게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이런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의 이 뜻을 따를 때만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통해 나의 고유함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으로부터 내침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비록 세상 안에서는 볼품없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도, 당신의 뜻을 따른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더 크게 쓰시고 받아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지 않는 큰 사람이 아닌, 하느님의 선택을 받는 작은 사람이 되는데 집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라.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고난과 자기희생의 길이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위대해질 수 있는 법이다.

- G.E. 레싱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 대림시기에 깨닫게 됩니다. 우리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찾는 방법도 길을 찾는 방향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친히 길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간절하게 기다려지는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길 위에 우리가 있습니다. 길을 잃음이 불러오는 간절한 회개의 마음입니다. 길을 잃었던 시간 모두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기다리는 마음은 우리를 회개로 안내합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하느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회개로 이루어지는 성탄입니다. 회개로 다시 출발하는 예수님과 우리의 기쁨입니다. 회개를 기다려주시고 회개를 찾으시는 예수님의 기쁨을 다시 만나는 기쁜 날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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