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시온 백성아. 주님이 민족들을 구원하러 오신다. 주님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고, 너희 마음은 기쁨에 넘치리라.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가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고 기꺼이 성자를 맞이하여 천상의 지혜로 성자와 하나 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2024년 12월 8일 대림 제2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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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바룩 5,1-9)
하느님께서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실 것이다. - 제 2독서
(필리 1,4-6.8-11)
여러분은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3,1-6)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3,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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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룩 5,1-9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실 것이다.
예루살렘아,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
2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3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어디서나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시고
4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너를 부르실 것이다.
5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동쪽으로 눈을 돌려 보아라. 네 자녀들이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해 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사방에서 모여드는 것을 보아라.
6
그들은 원수들에게 끌려 너에게서 맨발로 떠나갔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왕좌처럼 영광스럽게 들어 올려 너에게 데려오신다.
7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8
하느님의 명령으로 숲들도 온갖 향기로운 나무도 이스라엘에게 그늘을 드리우리라.
9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
필리 1,4-6.8-11
오늘 제2독서
여러분은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나는
4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8
사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9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10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 3,1-6
오늘 복음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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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24년 12월 8일
양성일 시메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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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은총의 길로 들어가는 방법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
사람들이 많은 ‘도시’가 더 효과적일 텐데 하느님께서는 왜 광야를 고르셨을까요? 더욱이 그 말씀을 선포할 사람으로도 사람들에게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본시오 빌라도, 헤로데나 필리포스, 대사제 한나스와 카야파가 아닌, 광야에서 살고 있던 세례자 요한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으로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3,6)라는 구약의 예언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원을 준비하시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해 보이고 아주 비효율적인 방법, 비합리적이고 너무나 미약해 보이는 방법으로 당신께서 계획하신 일을 이루셨습니다. 믿음 없이는 절대로 알아볼 수 없는 방법들을 하느님께서는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3,3)야말로 우리 마음 안에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지며,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가장 탁월한 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3,4-5 참조).
고해성사는 우리가 이러한 은총의 길로 들어가게 해 줍니다. 많은 교우가 ‘회개하는 마음’ 없이 그저 ‘판공성사 표’가 나왔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합니다. 회개하는 마음과 함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영혼의 길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대림 시기를 지내며 하느님의 구원을 보는 은총의 주인공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실 길을 같이 마련하는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오늘 대림 제2주일에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데 그 길을 마련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서 주님께서 길이 없어 못 오시나, 길을 내지 못해서 못 오시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 주님께서 오시는 길은 주님께서 내실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길을 우리가 내기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겸손의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주님의 길을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 주님께서 오시는 길은 제가 내겠습니다.’라고 감히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말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오시는 길은 주님께서 마련하시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은 내가 마련하고, 우리에게 오시는 길은 우리가 마련해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먼저 나에게 오시는 길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 보겠습니다. 이 주제를 묵상하면서 마련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뭔지 생각해봤습니다. 마련의 제일 적극적인 반대는 거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오는 것을 거부한다면 마련하기는커녕 길에 바리케이드를 치거나 문을 닫아걸거나 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주님이 내게 오시는 것이 나를 파괴하거나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에 더러운 영들이 주로 보인 태도이고,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Privacy 고수 태도입니다. 더러운 영은 주님께서 게라사라는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것이 싫어서 게라사 마을 입구에서 주님을 막고서는 나를 괴롭히려고 오셨냐고 따지고, 떠나달라고 애걸하는데 통하지 않자 돼지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다음은 무관심입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 없는 사람은 주님이 오시건 말건 상관없고 그래서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고 더 정확히 말하면 세속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세상 모든 이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과 하느님 나라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 이 세상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을 일컬어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하느님 나라보다 이 세상일에 관심이 더 많고 근심 걱정도 많습니다. 요즘 같으면 우리나라 돌아가는 것 때문에 대림절은 저리 밀려난 실정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오히려 주님을 놓치지 않도록 집중해야겠지요. 다음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단독 세대라면 나에게 오시는 주님만 맞이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가족과 같이 살거나 공동체로 생활한다면 같이 맞이해야겠지요. 이 대림절에 이런 의식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혼자서 주님을 맞이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혼자서 대림절을 보내지 않고, 공동체가 같이 주님을 맞이하고 대림절을 보내려는 의식과 노력 말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혼자 기도하고 같이 기도하지 않는 집이 많고 자녀들과 같이 기도하지 않는 가정은 더 많습니다. 나 외에 가족이 신자가 아니거나 갈등이 많아 같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데 다 신자인데도 같이 해야겠다는 의식이 없고 그래서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문제이겠지요.
대림절 초를 마련하여 그 불을 하나하나 밝히며 주님 오심을 같이 깨어 기다리고 준비하며 기도하는 우리 집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의 회개가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가 먼저
이제 우리는 대림 2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에서, <제1독서>와 <제2독서>와 <복음>은 같은 메시지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바룩 예언자는 아주 특별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을 자녀를 잃은 ‘과부’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과 아름다움을 입어라.”(바룩 5,1)고 기쁨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바룩 5,9)고 말합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신자들을 위해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 1,10-11)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보기 위해, 우리는 지금 세례자 요한과 함께 ‘광야’에 나와 있습니다. 사실, ‘광야’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기에,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자신을 마주해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방이 트여 있어서, 어디 하나 숨을 데가 없으니 벌거벗고 자신의 실상을 낱낱이 확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우리 공동체가 바로 ‘광야’입니다. 제 실상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항상 고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체험하기도 합니다.
사실, 홀로 있을 때보다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가 훨씬 고독할 때가 많습니다. 홀로 있을 때는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 되고,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는 서로 다름과 차이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있을 때가 더 괴롭고 힘들고 고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이 ‘광야’로 불러내시어 사랑을 속삭여주십니다.
그러기에,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사막이요,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사막입니다. 곧 공동체가 저를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는 아름다운 저의 광야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가정이 광야요, 본당이 광야요, 직장이 광야요, 이 세상이 광야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요한은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루카 3,3)
이를 <마르코> 복음사가는 병행구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마르 1,4)
그는 용서를 선포하였지만, 결코 자신이 죄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죄의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까지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단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명을 지니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곧 ‘사명의 차이’뿐만 아니라, ‘신원의 차이’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은 “용서를 위한 회개”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서의 회개’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한 회개는 하늘나라가 선물로 주어졌기에 그에 합당한 응답인 ‘결과로서의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위한 회개”가 아니라, “용서를 받았기에 하는 회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늘나라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기에 그에 합당한 삶으로서의 회개인 것입니다. 곧 우리의 회개가 먼저가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가 먼저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이미 용서와 은총을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용서하고, 그 은총을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오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을 보내면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알아보고, 신뢰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감사의 응답으로 진정한 회개로 성탄을 기다리고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3,5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제 안의 굽은 곳,
거친 길을 새롭게 하소서.
오늘도 제 마음의 광야에
숨어계시는 현존으로 속삭이는
사랑의 노래를 듣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발적 광야의 삶을 사는 이가 존경스럽다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만나게 해 주는 길과 같은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메시아를 만나려면 먼저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 뇌엔 ‘망상활성계’(RAS, Reticular Activating System)가 있습니다. 망상활성계는 뇌와 외부 자극 간의 필터 역할을 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보를 선별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뇌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를 다 처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까요? 바로 나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면세점에서 무언가를 사려 집중할 때는 공항 방송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시계를 보고 출발시간이 지난 것을 알았을 때는 벌써 몇 분째 자기 이름이 불리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신을 보이셨는데, 어떤 이들을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였고 어떤 이들을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는 마치 망상활성계가 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분에게 집중하고 있는 이들만 보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무엇에 집중하고 있어야 할까요? ‘뜻’입니다.
‘착한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신 사랑입니다. 나에게 이웃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다면 예수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만약 잘 생기고 예쁘고 돈 많고 인기 많은 아이돌을 죽자 살자 쫓아다니는 아이에게 구유에 뉘어진 예수님이 매력이 있을까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처럼 자발적으로 광야를 산 세례자 요한을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의 세례자 요한을 주윤발이나 워런 버핏, 일론 머스크, 척 피니와 같은 인물들을 들고 싶습니다. 이들은 인기 있는 세계의 거부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광야에 살았던 세례자 요한과 비교하느냐고요? 먼저 돈에 대해 말해볼까요? 이런 사람들은 모두 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실제로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고 기부할 약속을 한 이들입니다. 그래도 잘 먹지 않았겠느냐고요? 워런 버핏은 오래된 집에서 오래된 자동차로 맥도날드에서 4달러도 안 되는 햄버거로 식사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자기 집도 없이 6천 만 원짜리 조립식 주택에 거주합니다. 그래도 명예를 추구했다고요? 워런 버핏은 나이가 들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성공한 것이라 말합니다. 척 피니는 자기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도 나라에서 조사받기 전까지 그가 기부하는 사람인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존경스럽게 보인다면 착한 뜻이 들어온 것입니다. 착한 뜻은 이웃을 사랑하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기에 그런 이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착한 뜻을 가지면 자발적으로 광야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많고 쾌락을 찾고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어디서 만났느냐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에서 만났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이휘재나 욘사마와 같은 같은 나이 또래의 사람들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들의 가난하고 절제되고 멸시받는 삶이 부러워졌던 것입니다. 이는 그 책이 저의 시선을 바꿔놓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이젠 내가 아니라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이 진정한 행복임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예수님을 성체에서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을 때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주일학교 교사 중에 어떤 자매가 수박을 먹는데 빨간 부위가 하나도 없이 갉아먹는 것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왜 저래? 맛있으라고 먹는 건데 저 흰 부분까지 먹다니. 누가 알아준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 책을 읽는 동안 시선이 바뀌었는데, ‘지금 나는 저렇게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저렇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 신앙이 우리를 광야로 나가게 하여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하게 하는 문입니다. 착한 뜻을 가져야 인간이 되신 착한 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발적 광야를 사는 이들을 존경하게 만들어줄 환경에 자신을 먼저 살게 하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효도는 시작된다.
지금 제 나이는 오십 대 중반입니다. 문득 마흔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처음으로 본당신부로 나가서 재미있고 기쁘게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또 빠다킹 신부라는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렸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제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마흔에 아이를 여섯이나 둔 아빠였다면 어떠했을까요? 교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을까요? 또 사회생활 역시 그렇게 재미있게 살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자녀들을 부족함 없이 키우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교육비가 얼마나 비싸고, 들어가는 생활비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로서는 아이 여섯과 함께 잘 살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를 성공적으로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 부모님이십니다. 전혀 쉽지 않은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이런 부모님을 잘 모셔야 할 텐데, 이제는 기도로만 못다 한 효도를 대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분 모두 하느님 나라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제일 후회가 되는 것은 부모님 말씀을 잘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듣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면서 제 할 말만 했던 기억이 제일 큰 후회가 됩니다. 어쩌면 잘 듣는 것이 가장 큰 효도가 아닐까요?
하느님께 충실한 자녀의 삶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임을 깨닫습니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효도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하느님 말씀에 곧바로 “그렇게 어떻게 살아요? 나는 싫어요!!”라면서 화를 낸다면 어떨까요? 효심 가득한 자녀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대림 제2주일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준비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내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풍요롭고 화려한 세상을 등져야만 했습니다. 광야에서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산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리고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 꿀 뿐이었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이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셨다’라는 뜻인데, 그 모습을 보고서 과연 은총을 받은 사람처럼 보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던 세례자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의 목표는 풍요롭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 법정스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시린 손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추운 시간입니다.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는 것이 가톨릭의 인권이며 사회 교리의 분명한 실천입니다. 구체적인 현실의 골짜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복음의 길입니다.
복음의 길은 뼈저리게 회개해야 할 우리의 길입니다. 회개의 길은 인권의 길이며 인권의 길은 사람다운 사람의 소중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권을 소생시키시는 인권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웃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곧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입니다. 하느님의 살아있는 목소리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는 우리를 꾸짖습니다.
이 대림시기가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불 실천의 불이 필요합니다. 모순과 거짓의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권력자의 교만은 낮아지고 비겁한 데는 곧아지고 마음을 돌이켜 실천으로 평탄하여 지길 기도드립니다.
실천의 길은 갈고 닦아야 빛납니다. 복음의 길은 하느님의 길이며 인권을 훼손하지 않는 구원입니다. 모두가 행복한 삶을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묻고 답하는 대림 제2주일의 시린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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