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4/12/11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2. 11.
반응형

 

 

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오시어, 어둠 속에 숨은 것을 밝히시고, 모든 민족들 앞에 당신을 드러내시리라.

전능하신 하느님, 주 그리스도 오실 길을 마련하라 하셨으니 나약한 저희가 천상의 영약으로 힘을 얻어 구원의 길을 닦아 나아가게 하소서.

2024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2월 11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2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대림 제2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이사 40,25-31
오늘 제1독서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신다.

25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8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9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보라, 당신 백성 구원하러 주님이 오시리니 주님을 맞이하러 달려가는 이는 복되어라.

 

 

마태 11,28-30
오늘 복음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2월 11일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6:41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 가회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가회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가회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06: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생중계 없음


  • 남양성모성지 온라인 매일미사
    남양성모성지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남양성모성지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생중계 없음 / 화 11:00 / 수 11:00 / 목 11:00 / 금 11:00 / 토 11:00


  • 원당동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원당동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원당동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1:00 / 월 10:00 / 화 19:00 / 수 10:00 / 목 19:00 / 금 10:00 / 토 10:00


  • 초당성당 온라인 매일미사
    초당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초당성당 생중계 미사시간
    주일 10:30 / 월 06:30 / 화 19:30 / 수 10:00 / 목 19:30 / 금 10:00 / 토 10:00


  • 팔로티회 온라인 매일미사
    팔로티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바로가기

    분당 팔로티회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여러분의 안식처는 어디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와서 안식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그러나 많은 신앙인은 예수님께 가서 안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에서 안식을 얻고 싶어 할까요? 기도보다 세상이 주는 흥밋거리로 마음을 채우는 것을 안식으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과 마음 안에 담기보다, 누군가를 향한 비난과 험담에서 안식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체 앞에 머물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기보다 게으름, 게임, 술, 인터넷 등 하느님께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안식처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이사 40,28-29). 

우리의 안식처는 하느님이십니다. 영혼이 지치고 마음이 메마를수록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바로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계시는 성체 앞입니다.

여러분의 안식처는 어디입니까? 예수님께 가십시오. 그분 곁에 머무르십시오. 우리가 이 선택을 할 때 우리 영혼은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께 가기만 하면

요즘 저는 유명 강사들에게 사람들이 몰려가고, 그들의 상담과 치유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것을 볼 때 마음 불편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오라고 하시는데 그들에게 가니 말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그러니 더욱 마음이 불편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면 저는 안 그럴까요? 예, 저는 이런 마음이기에 그들에게 가지는 않습니다.

저는 안식을 얻는 법은 확실히 주님께 배웠고 배운 대로 살려고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배웠건만 주님께 힘을 얻어 안식을 누리려고 하지 않고 피곤을 덜어 안식을 누리려고 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고 그저 사용을 중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배터리는 충전해야지 지속 사용할 수 있지 사용을 중지하는 것만으로는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용한 배터리를 충전기에 꽂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가 안식도 얻고 힘도 동시에 충전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우리는 기를 쓰고 뭣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를 쓰고 뭣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빠지겠지요? 그러니 이렇게 기를 쓰고 뭐를 한 뒤에는 기를 보충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께 힘을 얻으라 하실 뿐 아니라 배우라고도 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고 편하게 지는 법 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멍에가 편하고 그 멍에로 짐을 지면 짐이 가볍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오히려 그 멍에는 불편하고 짐이 무겁다고 합니다.

주님의 멍에는 온유와 겸손이고, 져야 할 짐은 십자가이기 때문인데 우리 생각과 달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멍에 곧 겸손과 온유가 왜 편하다 하실까요? 사실 그것은 실천하기가 쉽지 않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짐을 잘 지지 교만한 사람은 짐을 잘 지지 못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무거운 짐을 마땅히 자기가 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하기에 온유하게 지지만 교만한 사람은 ‘이것이 왜 내게’라며 화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겸손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겸손하기가 무거운 짐 지는 것보다 더 어렵고 그래서 겸손해지기보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데 다행스럽게도 나이를 먹으며 무거운 짐이 우리를 겸손하게도 합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 대림절에 안식과 힘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께, 어떻게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께 달려갑시다. 주님께 가기만 하면 힘 얻는 것과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배우기

오늘 <복음>은 이렇게 참으로 복된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안식”을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란 단순한 쉼이 아니라 ‘구원’과 동의어입니다(히브 3,11.18; 4,1.3.5.10-11; 묵시 14,13 참조). “안식을 주겠다.”는 이 벅찬 초대는 ‘안식’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곧 ‘안식’(구원)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을 가지고 계신 분만이 주실 수 있으니, 주시는 분에 의해 얻어지는 것임과 동시에, 바로 당신이 구원자라는 선언이요, “안식”(구원)은 당신이 선사하는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주시기 위해 먼저 초대하십니다. “나에게 오너라.” 라는 문구는 현인들이 자신의 학교에 와서 지혜를 배우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전형구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 부르는 대상은 주로 ‘배우지 못한 자들’(집회 51,23)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 모두”를 부르십니다. 이들은 우선 23장의 “무겁고 힘겨운 짐”(23,4)에서 알 수 있듯이, 613개의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단순히 지혜를 전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안식”(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을 “주겠다”라고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길도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그것은 바로 당신의 “당신의 멍에를 메고”고 당신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멍에를 멘다.”는 말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해줍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듯이,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저희와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에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사실, ‘멍에’는 ‘순종’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사도 15,10; 갈라 5,1). 

그러니 예수님께 순종하며 가르침을 받으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순종으로 무엇을 배우라는 말씀인가?” 바로 ‘예수님, 당신의 마음’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앞에 항상 지니셨던 그 마음인,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 하십니다. 그러면 '안식'을 지니고 계신 그분으로부터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도와주고 북돋아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단지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여주시는 스승만인 것이 아니라, 함께 걸으시고 동행하시면서, 몸소 우리를 지고 인도하는 참된 스승이십니다. 단지 그 '길'을 제시하는 스승이 아니라, “길”을 함께 가실 뿐만 아니라 “길 자체”이신 참 스승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 됨”이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 되어 걸으며,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 곧 “양순하고 겸손하신 마음”(마태 11,29)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필립 2,5). 바로 그 마음 안에서, '배움의 순례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그 ‘참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기 마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즈의 마법사에는 양철 나무꾼이 나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양철 나무꾼이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워낙 이성적으로 사는 사람이어서 사랑을 느낄 심장을 원했던 것입니다. 저는 저의 심장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집착으로 모든 고통을 주는 게 마음임을 어느 정도는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철 나무꾼이 새로운 심장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살펴봅시다. 

양철 나무꾼은 본래 닉 초퍼라는 이름의 솜씨 좋은 나무꾼이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먼치킨 소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먼치킨들을 지배하던 동쪽의 악한 마녀는 이들의 사랑을 막기 위해 닉의 도끼에 저주를 걸었습니다. 

“동쪽 마녀가 내 도끼에 저주를 걸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내 몸의 한 부분을 잘라냈습니다.”

도끼는 그의 팔다리를 하나씩 베어내었고, 친절한 양철장이가 이를 대신하여 양철로 그의 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결국 그의 몸은 전부 양철로 대체되었지만, 도끼는 그의 가슴마저 베어내고 말았습니다. 이에 양철장이가 그의 가슴을 양철로 대체했지만, 이에 따라 닉은 심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심장이 없이는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소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심장을 잃은 그는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그에게 심장의 부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여전히 나무꾼으로서 일을 계속했지만, 마음속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심장이 없으니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랑 없이 삶은 텅 빈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느 날 비를 맞고 녹슬어버린 그는 숲속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방치되었지만, 도로시와 허수아비가 그를 발견하여 구해주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은 양철 나무꾼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마법사를 찾아가 심장을 달라고 부탁하겠소. 그래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테니.”라며 여정에 동참하게 됩니다.

에메랄드 시로 가는 여정에서 양철 나무꾼은 심장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동료들을 위해 여러 번 희생하며 자신의 따뜻한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강을 건너다 허수아비를 구하기 위해 도끼를 휘두르고, 함정에 빠진 사자를 구출하는 등 친구들을 돕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사랑과 배려가 여전히 그의 안에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소. 하지만 내 가슴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오.”

마침내 마법사를 만났을 때, 그는 심장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마법사는 그에게 심장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서쪽 마녀를 물리치라는 임무를 내렸습니다. 임무를 마친 후, 양철 나무꾼은 마법사에게 돌아와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법사는 양철 나무꾼에게 이미 그에게 심장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자신 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을 위해 보여준 희생과 사랑은 진정한 심장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양철 나무꾼이 더 이상 공허함을 느끼지 않도록 마법사는 그에게 비단으로 감싼 톱밥 심장을 주었습니다. 마법사는 말했습니다.

“이 심장은 당신이 이미 사랑하고 배려할 줄 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 줄 것입니다.” 

비단은 부드러움과 연약함을, 톱밥은 단순함과 강인함을 상징합니다. 곧 온유함과 겸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성체’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저의 서품 성구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저는 얼음 같은 마음이 사라지고 따듯한 예수님의 마음을 원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하.사.시.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따듯한 심장은 사랑이 거창한 행위나 완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선택과 타인을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심장을 받은 양철 나무꾼은 깨달음을 얻으며 말했습니다. 

“이 심장을 영원히 간직하겠소. 이 심장은 양철이라도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니 말이오.”

다른 사람이 저를 위해 울어줄 때 저는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내일 걱정부터 했습니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따듯한 가슴을 원했습니다. 이전의 심장이 미웠습니다. 성체를 통해 제 안에 이미 따듯한 심장이 있다고 믿고 온유하고 겸손하여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느 순간부터 제 안에 예수님의 심장이 있다고 조금씩 믿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블랙스완’은 자신이 유명해지지 못한 발레리나 어머니가 딸에게 자기 꿈을 강요하여 딸의 인생을 나락 가게 만드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프리마돈나를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자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엄마의 기대였습니다. 엄마를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지만, 결국 그 일은 자기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엄마가, 우리가 모두 가지고 태어나는 마음입니다. 뱀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미워해야 합니다. 

어떻게? ‘착한 뜻’을 가지면 됩니다. 지혜를 가지면 됩니다. 사랑하면 행복하다는 지혜로 사랑하려는 착한 뜻만 가지면 지금 심장을 미워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바랄 수 있게 됩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에게 우물에서 물을 길어주고 그의 낙타들까지 물을 먹였습니다. 이 착한 행동이 결국 이사악과 결혼하여 그의 심장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구약에서 십계명을 먼저 주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 심장을 내어주십니다. 그것이 성체입니다. 성체를 영하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UN에서는 매년 세계 행복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행복이 측정 가능하다는 듯, 지수화 그리고 서열화했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그렇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사실 매년 5위 아래 떨어지지 않은 나라가 북유럽에 있는 핀란드입니다. 우리나라는 2024년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 5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렇다면 핀란드와 우리나라의 행복 차이가 엄청날까요? 
 
사실 핀란드 국민은 과묵하고 신중해서 잘 웃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술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이며, 유럽에서 자살률 1위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인구 대비 당뇨병 환자 수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도 놀랍습니다.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행복은 지극히 관념적이고 주관적입니다. 순위가 그래서 자기의 행복 기준이 타인의 행복 기준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구는 삶과 일이 조화를 이룰 때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도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를 통해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닌, 세속적인 욕심의 많고 적음에서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행복은 세상의 기준에 있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이 세상의 기준과 정반대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고통과 시련 안에서는 행복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고통과 시련 너머에도 분명히 당신과 함께하면서 행복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면 행복이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때 주님께로 가야 했습니다. 주님을 잊었고, 주님께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고통과 시련은 너무나 불편하고 무거워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남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아닌, 자기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신 것 그 자체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고통과 시련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에 하찮고 쓸모없는 것은 없다. 산밭의 돌멩이 하나도 제자리에 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신비의 관계 속에서 무언가 은밀한 일들을 하고 있으니.

- 박노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애쓰며 살아가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기꺼이 가장 좋으신 당신 사랑을 내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장 무거운 것이 가장 가벼운 것이 됩니다.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자신을 초대하십니다.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주님의 위로와 감사로 바뀝니다. 껴안고 가야할 대상 또한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임을 뜨겁게 깨닫습니다. 하느님 편에서 바라보는 참된 평화를 체험합니다. 괴롭게 애썼던 그 마음까지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전부를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자신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게 됩니다. 비로소 휴식을 알게 되고 얻게 되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벗어나는 무거운 짐입니다. 가장 좋은 사랑을 만나는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