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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8/09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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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의 도움, 저의 구원은 주님이시니, 주님, 더디 오지 마소서.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니 주님을 창조주요 인도자로 모시는 이들과 함께하시어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 모든 것을 지켜 주소서.

2024년 8월 9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8월 9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8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마태 16,26)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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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나훔 2,1.3; 3,1-3.6-7
오늘 제1독서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들을 망쳐 버렸지만 정녕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예처럼 야곱의 영예를 되돌려 주시리라. 

3,1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온통 거짓뿐이고 노획물로 가득한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다. 


채찍 소리, 요란하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 달려오는 말, 튀어 오르는 병거, 


돌격하는 기병, 번뜩이는 칼, 번쩍이는 창, 수없이 살해된 자들, 시체 더미, 끝이 없는 주검. 사람들이 주검에 걸려 비틀거린다. 


나는 너에게 오물을 던지고 너를 욕보이며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라. 


너를 보는 자마다 너에게서 달아나며 “니네베가 망하였다! 누가 그를 가엾이 여기겠느냐?” 하고 말하리니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해 줄 자들을 찾으랴?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16,24-28
오늘 복음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8월 9일
한산동 마르코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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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하느님이시다.

나훔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라고들 합니다. 기원전 612년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멸망한 것에 대하여 말하면서, 니네베가 철저히 파괴되기를 기원하고 그 함락을 지나치게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의 첫 부분에서는 니네베의 함락을 “기쁜 소식”이라고, 그 소식을 알려 주는 이는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나훔 2,1)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훔서의 첫머리에서는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1,2)이라고 선포합니다. 

매우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서 52장 7절에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이 “평화를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유배 간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이사야서의 구절은 훨씬 듣기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동전의 다른 면입니다. 유배 간 이스라엘에게 해방이 선포되려면 바빌론이 멸망하여야 합니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 또한 압제자가 몰락하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나훔서의 상황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억압에서 풀려나려면 아시리아가 무너져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피의 성읍”(3,1)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기쁜 소식”은 듣기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훔서의 “기쁜 소식”은 거북하다고 느낀다면,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아니, 비논리적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훔서가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닌 아시리아라 하더라도 그 힘을 심판하시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힘이 곧 정의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시리아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이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의 숨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서 ‘목숨’의 의미를 오늘은 새겨보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목숨’과 ‘목숨’을 구분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구분이 없을 겁니다.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사실 건강을 잃으면 돈도 소용없고 명예도 소용없는데 목숨을 잃으면 내게는 세상도 하느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치 순위는 목숨이 그리고 건강이 돈보다도 온 세상보다도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목숨을 또 나누십니다.  자기 목숨을 따로 떼어 말씀하심으로써 말입니다. 

사실 나만 목숨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내 목숨 말고도 수많은 목숨이 있지요. 내 목숨은 수많은 목숨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고, 내 목숨을 포함하여 수많은 목숨은 하느님의 숨에서 나와 시작된 것이라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창세기 2장은 목숨의 시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때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the LORD God formed man out of the clay of the ground and blew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so man became a living being.” 

라틴말의 ‘Vita’, 영어의 ‘Life’가 한자어로는 생명(生命)이고 우리말은 목숨이지요. 그런데 우리말 목숨이 아주 영성적입니다. 

목과 숨이 붙은 것이 목숨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목에 들락날락하는 숨이 바로 목숨이라는 말이고, 우리의 목에서 숨이 붙어 있지 않고 끊어지면 그것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다는 것을 숨이 끊어졌다거나 목숨이 끝났다고 하지요. 

그런데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숨이 자기 숨이거나 공기 흡입일 뿐이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는 그 숨이 실은 하느님의 숨의 흡입이고, 그리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이 자기 숨이나 공기를 들이키는 숨만 쉬다가 죽으면 아무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해도 그 목숨은 결국 이 세상에서 끝나게 되어 잃게 되지만 하느님의 숨 곧 사랑과 성령의 숨을 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은 잃게 되어도 그 숨만은 영원히 계속 쉬게 되어 죽지 않겠지요. 

그래서 오늘 저는 ‘사랑의 숨’을 처음으로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숨이고 성령의 숨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일상적으로는 사랑을 들이키고 사랑을 내뿜는 것입니다. 하느님/성령을 들이키고 하느님/성령을 내뿜는 것이며, 이렇게 살면 숨 쉬는 것이 그대로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숨을 쉼으로써 이 세상에서 생명력과 생기를 지니고 살다가 하느님 사랑 때문이든 이웃 사랑 때문이든 아무튼 사랑 때문에 죽어야 할 때가 와 자기 목숨을 바치면 자기 목숨은 잃어도 영원한 생명을 저세상에서 누릴 것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목숨이 온 세상보다 가치 있습니다. 저세상에서는 목숨이 자기 목숨보다 가치 있습니다. 

이것이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의 뜻이라고 묵상하고 여러분과 나누는 오늘 저입니다. 어쨌거나 우리 모두 사랑의 숨을 쉬며 삽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녀를 많이 낳음이 가장 행복한 투자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진정 인생이 ‘투자’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투자는 이익을 바라고 하는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행위에 따라 그것을 갚아주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니 투자라는 개념이 맞기는 한 것 같습니다. 또 예수님 자신도 ‘달란트의 비유’(마태복음 25:14-30)에서 인생이 우리에게 주이진 시간과 능력을 투자하는 삶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 투자로 얻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돈이나 명예, 쾌락 등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것은 남는 게 없습니다. 투자한 것이 회수되는 때는 죽음 이후일 것입니다. 죽음 직전에 돈을 덜 번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가평 크리스월드레지던스 박지형 대표가 위암 복막 전이 4기로 6개월~1년 선고받고 주위에 죽어가는 암환자들을 보며 느낀 것, 곧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보다도 ‘잊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투자해야 합니다. 잊히지 않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예는 많이 있습니다. 목숨을 바친다는 말은 투자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교회를 낳으시고 교회 안에서 당신이 기억되게 하는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교회의 탄생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매 미사 때 기억합니다.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 죽음의 고통을 이깁니다. 또한 그렇게 교회를 낳았을 때 영원한 신랑과 같으신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어떤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나치 수용소에 끌려간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아들을 살리고 좋은 아빠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에서 아버지는 목숨을 투자합니다. 그런데 인생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특별히 최저출산국이고 자녀를 키움이 행복보다는 고통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더라도 더 큰 고통은 나를 기억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고통이 가장 큰 고통임을 깨닫게 하도록 우리는 노력할 의무가 있을 것입니다. 

성녀 지아나 베레타 몰라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이탈리아의 소아과 의사입니다. 임신 중에 합병증이 발생하자 그녀는 위험을 알면서도 자신의 생명보다 자녀의 생명을 우선시하기로 했습니다. 지안나의 사심 없는 결정으로 인해 출산 직후 사망하게 되었지만, 그녀가 남긴 사랑과 희생의 유산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2004년 가톨릭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됐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에게 엄마가 생명을 바쳤음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진정한 투자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성인, 성녀입니다. 

이레나 센들러(Irena Sendler)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약 2,500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바르샤바 게토에서 밀수입하여 구한 폴란드의 사회복지사였습니다. 그녀는 이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중 많은 아이가 비유대인 가정에 맡겨졌습니다. 그녀는 심한 고문과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노벨 평화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노벨상은 타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98세까지 사셨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젠 제가 구한 아이들뿐 아니라, 그들의 손자와 손녀들까지 저를 찾아와요.”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의미 치료’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유다인이라는 이유로 가족과 함께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그곳에서 아내와 가족을 잃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라고도 불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지요. 굶주림, 혹독한 추위, 그리고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핍박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 극복의 비결을 빅터 프랭클 박사는 이렇게 담담하게 말합니다. 
 
“어떤 처참한 상황에서도 그보다 더 처참한 상황을 상상하면 견딜 수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보다 더 처참한 상황을 상상하면 우리가 겪는 고통이 훨씬 더 가볍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불평불만의 이유만을 찾고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에 그냥 포기하고 좌절합니다. 이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의 죽음까지도 맞이하셨지요. 이 죽음이 과연 끝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너머에 부활의 기쁨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만 해서 부활의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은 십자가로 상징되는 지금의 고통과 시련을 이겨냈을 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피해야 할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그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을 떠올려보면 어떻습니까? 
 
자기 십자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가족도 있고, 직장 안에서의 삶도 있고, 교회 안에서도 십자가는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찾아오는 십자가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떠올리며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너머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순교자들도 모두 하느님을 위하여 육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고,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 기억되어 있습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의 목숨만을 유지하려고 비굴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은 비록 육신의 생명을 지키겠지만, 우리 마음에서 잊히거나 죽은 이들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십자가의 무게를 바라보지 말고,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 감사하면서 더 큰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부부란 둘이 서로 반씩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서 전체가 되는 것이다.

- 반 고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삶을 부르는 하느님께서 주신 목숨입니다. 탐욕을 부리는 목숨이 아니라 마음 한가운데를 지나며 하느님 나라를 만나야 할 목숨입니다. 우리의 목숨은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지니고 사랑을 실천하는 십자가를 만나게 합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을 다시 살려내어야 할 목숨의 본질입니다. 목숨은 길마다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사람의 길을 걸어가게 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향합니다. 살아있는 순간들의 호흡이 살아있는 기도입니다. 

소금같은 우리의 목숨이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목숨이 십자가이며 목숨이 은총입니다. 우리가 사람임을 깨닫게 하는 목숨이 어떻게 살다 떠날지를 알려줍니다. 

묶여있는 목숨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과 함께 기쁘게 살아야할 목숨입니다. 우리의 목숨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을 잃지 않는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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