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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7/21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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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2024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7월 21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7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6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예레 23,1-6)
    나는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세워 주리라.

  • 제 2독서
    (에페 2,13-18)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 오늘 복음
    (마르 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오늘 말씀 카드
    (마르 6,34)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 6,34)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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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 23,1-6
오늘 제1독서

 

나는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세워 주리라.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런 다음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은 출산을 많이 하여 번성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에페 2,13-18
오늘 제2독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형제 여러분, 

13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마르 6,30-34
오늘 복음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7월 21일
김대중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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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죄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악의 지배를 받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그들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신다는 것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에게서 빗나간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온 삶을 다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가르침은 십자가였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기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는 어떤 구분도 차별도 예외가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신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가르쳐 주신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는 제1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어도, 여러분이 잠시 믿음을 잃어버리더라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신비는 여전히 여러분에게 모두 유효합니다.

특별히 오늘 하루는 부족한 저와, 교회의 모든 사제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사제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신비를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선포하는 목자들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내가 입을 열면 말씀이 주어져 복음의 신비를 담대히 알릴 수 있도록 나를 위해서도 간구해 주십시오.”(에페 6,19)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십시오.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부화뇌동은 No! 화이부동은 Yes!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연중 제16주일은 진정한 양과 목자의 관계를 얘기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목자는 ‘우리의 정의’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둘째 독서에서 목자는 ‘우리의 평화’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종합하면 주님은 ‘우리의 정의와 평화’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정의이고 평화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성찰은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주님을 나의 정의와 평화의 목자로 모시는 착한 양인가? 세상의 정의 평화 투사를 나의 정의와 평화의 목자로 생각지는 않는가?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쫓지 않고 나의 정의와 평화를 주장하지는 않는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착한 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길잃은 양들입니다. 사실 양들의 인도자들이어야 할 수도자 성직자들이라고 하는 저희가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지 않고 정치가들을 열렬히 추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길잃은 양들인 경우가 많아 참 안타깝습니다. 

옛날 ‘어머니 부대’라는 극성 여성들이 있었고, 요즘은 ‘개 딸’이라는 극성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인 둘의 공통점은 복음이나 보편성 같은 것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정치가를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것인데 어떤 때 저희 일부 수도자들과 일부 신자들이 이러합니다. 

주님의 정의를 가지고 여도 야도 모두 비판하고 예언해야 하는데 비판과 예언은커녕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의가 주님의 정의를 따르는지 잘 식별해야 하는데 우리가 주님 정의를 따르는지 세상 정의를 따르는지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우리의 정의가 주님의 평화를 이룩하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의는 물론 불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며칠 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불의와는 갈라서야 하지만 화이부동(和而不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화뇌동은 말고 화이부동은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인데 우리는 종종 부화뇌동하거나 독불장군처럼 자기 정의만 주장하여 화이부동할 줄 모르고 주님처럼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참 목자이신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는 양들인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그러니까 성직자는 성직자의 자리에서 가정의 부모나 단체의 장들은 가정과 각 단체에서 이제, 주님을 대신하여 양들을 주님의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는 목자가 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목자 의식입니다. 나도 목자라는 의식 말입니다. 나는 주님의 양이기도 하지만 양들의 목자이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양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입니다. 

주님처럼 목자가 없는 양들에 대한 연민이 필요합니다. 양들을 그저 잡아먹고 팔아먹고 부려 먹으려고만 들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그들이 내 맘에 들기를 바라기보다 그들의 고통이 내 눈에 먼저 들어와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출 소녀가 있습니다. 나쁜 놈들은 그들을 꾀어 성 노리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래서 어떻게든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그럴 수 없는 집안 사정이라면 그들을 내 집이나 다른 쉼터로 인도하겠지요. 

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따르는 착한 양들입니까? 주님의 정의와 평화를 대신 실현하는 선한 목자들입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왜 쉬어도 피곤할까?

오늘 복음은 참다운 ‘쉼’이 무얼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온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찾는 수많은 군중이 몰려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쉬게 내버려 두고 당신이 직접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의 쉼을 존중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아서 만성 피로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삶의 에너지를 얻는 참다운 쉼은 무엇일까요? 오늘 제자들처럼 사명을 다 마치고 와서 그 파견한 분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도’와도 연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휴식은 현실의 어려움을 헤쳐 나갈 힘을 얻는 과정입니다. 현실의 모든 어려움은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일이 고되다고는 하지만, 일도 관계가 좋으면 견뎌낼 수 있습니다. 관계가 안 좋으면 아무리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더라도 그 자리가 지치고 고생스럽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관계를 위한 에너지를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쉬고 나서도 다시 사람들을 만날 힘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면 쉰 것이 아닙니다. 현실 도피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 도피와 쉼을 잘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현실 도피는 그것을 하고 나서 다시 일자리나 가정으로 돌아갈 힘이 생기지 않지만, 참다운 쉼은 다시 도전하고픈 용기가 생깁니다. 

MBTI라는 성격유형 검사에서 ‘I’와 ‘E’의 차이점이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성격이 ‘E’로 외향적인 사람은 사람을 만날 때 힘을 얻고 반대로 ‘I’인 사람은 혼자 있을 때 힘을 회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격의 유형일 뿐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굳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회복해야 하고 사람을 만날 때 에너지를 빼앗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 에너지를 빼앗기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기도하실 때 에너지를 회복하셨습니다. 

사람은 진정 혼자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내 자아로부터 괴롭힘을 당합니다. 잠을 자도 악몽을 꾸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이 자꾸 자신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도 피곤합니다. 어차피 만나려면 나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존재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나를 이웃을 사랑하라고 파견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이때 기도가 진정으로 휴식이 됩니다. 

EBS ‘선생님이 달라졌어요’ 제5화에서 보령의 한 초등학교 여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너무 벅찹니다. 아이들에게 고함만 지르게 되고 아이들은 선생님을 마녀나 마귀라고 부릅니다. 지친 선생님은 이제 학교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제작팀은 가르침은 먼저 관계라고 말해줍니다. 관계를 어떻게 잘 할 수 있는지 교육합니다. 가장 일찍 나와 아이들에게 하이 파이브를 하고 집에 돌아갈 때는 아이들을 일일이 안아줍니다. 친절하게 바뀐 선생님을 보며 아이들도 선생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학교 가는 게 즐겁습니다. 이제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한 준비가 됩니다. 이것이 참다운 쉼입니다. 쉼의 목적은 파견에 있습니다. 

미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유방암이 온몸에 전이된 상태의 선생님에게 아이들이 노래를 불러줬고 차차 암세포가 사라져 완치되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날 때 그러합니다. 암세포는 몸이 허물어진 상태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몸의 설계도와 같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으로 우리 DNA가 회복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그러면 다시 아이들을 가르칠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기도와 쉼은 아예 처음부터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봉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도 나를 파견하는 말씀을 찾아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고 제자들과 사람들이 당신을 찾자 바로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라고 하셨습니다. 새벽이 아버지를 만나 힘을 얻고 다시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받으시는 일이 그분에게는 기도였고 휴식이었습니다. 기도가 휴식이 되면 뒤로 미룰 수 없습니다. 잠을 자고 식사를 하는 것처럼 먼저 이것을 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사랑하도록 파견받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이만이 온전히 파견하시는 분 안에서 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할까요?

자기계발서를 보면,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아마 이렇게 힘차게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에 당당하게 사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생각보다 무례한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좋은 것만 하려고 하고, 자기 싫은 것은 죽어도 싫다면서 하지 않지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 생각만 밀고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할까요?” 
 
당당하지만 무례하지 않아야 합니다. 당당함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상처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당당함에 자기 욕심과 이기심이 담겨 있다면 이것은 지극히 무례한 것으로 사람들과 함께하기 힘들어집니다. 저 역시 이런 무례한 사람과는 함께하고 싶지 않아서, 거리감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소심하게 살기를 원하실까요? 우리를 소중하게 창조하신 것만을 보더라도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을 따라오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지켜주는 사람이 없으면 계속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당당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단, 여기에 조건이 붙습니다. 무례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서 당당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사랑해야 할 때, 움츠러들지 않고 또 숨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당당함만을 드러내는 사람은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기 힘듭니다. 자기만 사랑하고 있기에, 하느님 앞에서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 숨었던 것처럼, 하느님 앞에 숨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당당하면서도 무례하지 않은,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배워서 세상에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진정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 안에서만이 하느님 나라의 커다란 희망이 있기에 그 희망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참 목자로 다가오십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에 놓여 있던 분열과 적개심의 장벽을 허물어뜨려 하나로 만드신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이렇게 큰 힘을 가지고 계신 주님과 함께하기에 우리는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간직하기에 또한 무례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 막스 뮐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다시 시작하고 다시 태어나는 외딴곳이 있습니다. 외딴곳에서 쉬어주어야 할 우리자신과 쉬게 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갈망도 쉬어야 제대로 된 방향을 찾습니다. 쉬지 못하는 갈망은 공갈이 되고 신기루가 되어 우리를 더욱 갈증나게 합니다. 

안간힘과 독기를 멈추어야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곧 사라지는 수 많은 감정들을 봉헌하는 마음의 여백이 되는 외딴곳입니다. 삶의 고비마다 우리를 지켜내는 외딴곳의 마음입니다. 

쉬어야 사랑을 알게되는 사랑의 조화입니다. 편안한 휴식과 잠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외딴곳에서 비워지고 비워져 휴식이 되고 치유가 되는 재충천의 오늘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휴식이 없는 사랑 휴식이 없는 일들은 좌절과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외딴곳의 휴식은 우리를 살리는 가장 좋은 복음입니다. 쉬었다 가기에 보이는 것들이 정말 소중한 것들입니다. 소중함을 알게 하는 외딴곳의 기쁨입니다. 기쁜 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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