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이든 높은 이든 하느님을 경외하는 모든 이들아, 우리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그리스도의 권세와 권능과 구원이 나타났다. 알렐루야.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저희가 한결같은 믿음과 희망으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루어 주심을 의심 없이 믿게 하소서.
2024년 4월 30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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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4,19-28)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 오늘 복음
(요한 14,27-31ㄱ)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14,27)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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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당신 영광 속으로 들어가셨네.
요한 14,27-31ㄱ
오늘 복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4월 30일
양정식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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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오늘 복음으로 요한 복음서 14장의 가르침이 마무리됩니다. 공포와 불안으로 산란해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평화를 주시겠노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라고 하심으로써 당신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구별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면, “내가 주는 평화”는 상대가 다시 싸움을 걸어와도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되는 절대적 평정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평화’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샬롬’은 ‘전체적이고 충만하여 결핍이 없는 상태’를, 부족하거나 손상된 부분이 없어서 서로 싸우거나 다툴 필요가 없는 상황을 뜻합니다.
이러한 완전한 평화는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사도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어도 다시 “도시 안으로 들어가고”, 그 어떠한 악이 방해를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성찬 전례 가운데 사제는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는데, 우리가 나누어야 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타협하지 않으시고,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할 견고한 평화로 하느님의 일을 이룩하여 나가셨습니다.
신앙은 ‘마음의 평화’가 아니라 ‘주님의 평화’를 찾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오면 이내 위태로워질 ‘마음의 평화’를 찾기보다, 그 어떠한 악도 방해하거나 붕괴시키지 못하는 ‘주님의 평화’를 서로 빌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성체 예식 가운데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가장 엄격한 사랑이며 기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환난 각오
오늘 사도행전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끝내는 부분입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안수받고 선교를 떠난 그들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마지막까지 부지런히 여러 곳을 방문하고, 마지막까지 큰 환난을 겪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를 반성하게 됩니다. 사실 제가 순회 공동체라는 것을 처음에 시도하게 된 것과 지금도 그 순회 공동체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물론 프란치스코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지만 그 이전에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분들의 선교 열성이 저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저는 일찍부터 한곳에 머물지 않고 돌아다니며 선교하는 것에 마음이 꽂혔습니다.
그래서 전에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생면부지 목포 북교동 본당 신부님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교회의 손길이 많이 미치지 않는 곳에 보내달라고 하고, 무작정 자은도라는 섬에 갔으며, 비록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낮에는 같이 일하고 밤에는 신앙을 나누는 삶을 아주 보람되게 하였고 그런 시도가 10여 년 계속되어 마침내 저희 수도회의 순회 공동체가 탄생하여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순회 선교는 장소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선교 활동 내용 면에서도 그랬습니다. 곧 한 가지 선교 활동을 줄곧 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하는 것이며 그래서 하던 것을 두고 떠나는 것에 별 미련이 없었고 새로 시작하는 것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도 되지만 실패를 포함하여 그 과정에서 겪게 될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사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일수록 어려움이 많기 마련이지요. 그러니 어려움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떨어지고,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일수록 어려움이 큽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초주검이 될 정도로 돌팔매질 당하고도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이 다시 일어나 다음 고장으로 간 것도 이런 마음 자세 때문이고 환난 각오 때문이라고 이해해야겠지요.
환난 각오.
바오로 사도는 신앙을 전해주고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이렇게 권고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이 아주 힘이 있고, 듣는 제자들도 그런 환난 각오를 했을 텐데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로만 하지 않고 엄청난 환난을 몸소 먼저 겪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의 저를 반성하게 되는 것은,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겪게 되는 환난, 남에게 힘이 되어주고 좋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환난은 각오도 되어 있고 아직 힘이 있어 비교적 잘 견뎌낸 편입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나이 먹으면서 힘도 없어지고 병약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제 인생 말년의 환난은 두렵고 각오가 덜 되어 있고 그래서 피하고 싶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점점 힘이 없어지고,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고, 폐를 끼치는 그 어려움, 그 환난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그리고 저를 위해 겪어야 할 환난임을 각오하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평화라는 안전망 없이 다리를 건설하지 마라.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홀로 방치되어 기계어로 말하는 6세 아들’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금쪽이는 울면서도 컴퓨터 게임기에서 말하는 기계어로 엄마는 물론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계어가 아닌 다른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게임기를 거의 엄마처럼 여기고 게임기와 물아일체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엄마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5시까지 혼자 술을 마십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듭니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를 깨우지 못하고 엄마 옆에서 게임을 합니다. 오전 내내 그럽니다.
아이는 불안합니다. 불안을 해소해주는 이는 엄마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평화를 주지 못하고 게임기만이 불안을 잠재워주니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게임기를 엄마처럼 여기게 된 것이고 게임기의 목소리를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어떤 아이들이 자기가 게임기라고 여기는 이와 소통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는 외톨이가 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에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이고 그분에게서 오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맺어주는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자기 절제, 혹은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필요한 능력들입니다. 엄마는 먼저 이처럼 성령을 받아서 내 안에 평화의 열매가 맺히게 해야 합니다. 가진 것만 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의 감정을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문제는 사랑도 기쁨도 평화도 자기 안에서 저절로 자라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무와 떨어진 가지는 말라버립니다. 아기를 낳기 전에 먼저 평화를 얻는 기술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평화를 해치는 것을 먼저 없애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아입니다. 자기를 믿으면 불안해집니다. 엄마를 믿지 않고 자기만 믿는 아이가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엄마와 붙어있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순종입니다.
나병에 걸린 시리아 장군 나아만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예언자 엘리사는 문도 안 열고 그냥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부하들은 그것보다 어려운 일을 시켰으면 아마 했을 것이라며 자존심을 좀 죽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몸을 씻었더니 나병이 나았습니다.
자존심을 죽여야 평화가 옵니다. 나를 믿으며 동시에 엄마를 믿을 수 없습니다. 엄마를 믿으면 나를 맡겨야 합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엄마로부터 평화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태생 소경에게 진흙을 발라주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까지 가면서 소경은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씻고도 눈이 생기지 않으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순종은 자존심을 없애고 겸손해진 이에게 주어지는 사랑과 지원을 한없이 받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라고 하시는 것은, 내가 먼저 평화를 갖지 않으면 줄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성령의 평화를 가지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평화를 얻는 법을 모르면 아기를 낳으면 안 됩니다. 엄마의 자격입니다. 금문교를 지을 때 안전망이 없을 때 많은 인부가 떨어져 죽어서 그물망을 하고서는 진척이 잘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평화가 없다면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에게 불안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매일 기도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어느 책에서 이런 내용을 읽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마법의 주문을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어떠하십니까? 이 마법의 주문이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실제로 사람들과의 갈등도 많고 또 누군가와 맞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의 힘든 마음을 생각하면 이 마법의 주문은 꼭 알고 싶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 마법의 주문을 이렇게 외치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3번만 외치면 평화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별로 어렵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옳다고 강하게 믿으며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마음을 거두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을 기억하고 되뇐다면, 우리는 분명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겸손으로 이끌어 주는 말과 행동이 바로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는 말과 행동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겸손하라고 명령하셨고, 당신의 삶으로 그 겸손을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겸손이 곧 평화였던 것입니다.
원한을 잠재우고 용서함으로써 치유를 얻는 길은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마법의 주문을 누군가와의 갈등에서 또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점령하려 할 때 반드시 외워보면 어떨까요? 겸손의 주님께서 평화를 들고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복음에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지구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이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해서 평화를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는 다릅니다. 주님의 평화는 겸손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침묵하며 분노를 가라앉히는 일, 욕심을 멈추고 지금 가진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고 사랑 실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일 등을 통해 주님의 평화가 이 세상에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 시작은 바로 각자의 겸손에서입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말에서 평화도 오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가정이야말로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 모든 싸움이 자취를 감추고 사랑이 싹트는 곳이요, 큰 사람이 작아지고 작은 사람이 커지는 곳이다.
- 허버트 조지 웰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평화입니다. 참된 평화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참된 평화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참평화의 이름은 바로 평화를 위해 사시는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참평화가 거짓 평화를 꾸짖으십니다. 참된 신앙의 길은 성숙한 평화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평화를 낳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평화를 체험합니다. 참 평화라는 말은 쉽지만 평화를 이루기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평화는 강자와 약자의 싸움이 아닌 생명의 공존이며 행복입니다.
참된 평화는 모든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평화는 가장 강력한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우리 방식의 집착이 아닌 하느님께로 가는 사랑의 방식입니다. 평화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세상의 우두머리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보여주지 않았던 참평화를 보여주십니다. 평화는 평화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로 오신 뜻을 이제야 알게되는 평화의 새기쁨입니다.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 바로 평화의 새기쁨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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