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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5/03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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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이 거룩한 사람들을 참사랑으로 뽑으시고, 영원한 영광을 주셨네. 알렐루야.

하느님, 해마다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을 기꺼이 지내게 하셨으니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어 저희가 성자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히 하느님을 뵈옵는 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4년 5월 3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5월 3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5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코린 15,1-8)
    주님께서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4,6-14)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14,9)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14,9)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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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1코린 15,1-8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필립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14,6-14
오늘 복음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그때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5월 3일
양정식 마르코 신부

 

✚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소개 00:06

✚ 교황님 5월 기도지향01:15

✚ 미사시작 01:28

✚ 강론시작 08:28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오늘 미사에서는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의 일화가 봉독됩니다. 복음에서는 필립보가 예수님께 아버지를 뵙게 하여 달라고 청하고, 독서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야고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느님을 뵙고 만나는 일은 사도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필립보가 하느님을 뵙게 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하고 되물으십니다.

사실 하느님을 뵙고 만나는 일은 그분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며 돌아다니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내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더 깊이 나의 내면으로 들어갈 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무르라고 하시며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안에 계시고, 그분 안에 온전히 하나로 계시며, 서로의 ‘안’에 ‘깊이’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 긴밀한 관계성을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삼위일체 하느님을 온전히 뵙고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뵙고 만나는 일은 이론이나 설명, 논증으로 확인되는 일이 아니라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럴듯한 설명을 들으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계시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토록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께, 여전히 필립보처럼 ‘어서 하느님을 보여 달라.’, ‘그분을 만나게 하여 달라.’고 우기는 일이 되풀이될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오늘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인데 우리 교회는 야고보와 필립보 사도 축일이라고 하지 않고, 왜 이렇게 붙였을까? 왜 야고보를 앞에 두지 않았을까? 시답지 않은 질문일 수도 있는 질문을 해봤습니다. 

왜냐면 복음에는 필립보 사도가 여러 번 등장하지만 사도행전을 보면 야고보 사도가 꽤 중요한 분입니다. 어제 그러니까 부활 5주 목요일 독서로 우리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 얘기를 들었고, 거기서 야고보 사도가 전체 사도단을 대표하여 연설하는 장면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 외에도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을 때 야고보에게 알리고,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야고보를 특별히 찾아가 만난 사실을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이 각기 기록합니다. 

"이 일을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에게 알려 주십시오." 

"바오로는 우리와 함께 야고보를 찾아갔는데 원로들도 모두 와 있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도 중요한 순간에 야고보 사도를 찾아가고 야고보 사도에게 알렸을 정도로 중요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축일 이름의 순서에서 누가 더 중요한 존재였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을뿐더러 세속적인 생각일 뿐이니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어떻게 또 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봄이 오히려 더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는 무슨 이유로 교회의 중심적 인물이 되었을까요? 주님의 형제였기 때문일까요? 

주님의 형제였기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매우 세속적인 생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혈육 관계를 넘어선 분이었기에 위대하고 그래서 사도단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형제에서 어떤 제자보다도 주님의 진정한 제자요 사도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야고보서의 저자가 맞다면 그는 그 어떤 사도보다도 주님 말씀을 입이 아니라 실천으로 따른 분이었을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시작부터 이렇게 실천을 강조합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이렇게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였기에 은총과 믿음을 강조한 바오로 사도를 더 따르는 개신교가 야고보서를 성서에서 빼고 싶어 할 정도였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지점에서 믿음의 올바른 균형을 찾아야겠습니다. 은총을 받은 사람은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실천하는 믿음을 가져야겠지요. 은총을 많이 받았다면 그만큼 더 믿음을 더 잘 실천해야겠지요. 

그리고 이것을 재속 프란치스코의 구호처럼 바꾼다면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야고보 사도가 이 면에서 우리의 모범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 몰입 연기를 위해 성령의 술이 꼭 필요한 이유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라고 하시며, 삼위일체 신비를 알려주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만날 때 성모님 태중에 하느님 아드님이 계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어떤 힘으로 알아보았을까요? 성령의 힘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하느님을 당신 태중에 잉태하신 것처럼, 성령을 받은 이들은 어떻게 그 일이 이뤄지는지 깨닫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1-43)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두 역할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그다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잉태되는 장면입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시는 장면을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범죄도시로 18년 만에 돈과 무관하게 살다가 지금은 스타가 된 장이수 역할의 ‘박지환’ 씨가 유퀴즈에 나와 갑자기 잘 되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가 연극계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 오디션에 참가하면 항상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가 왜 그런지 카메라에 녹화된 내용을 보았는데 자신이 보기에도 어떤 매력도 없는 무색무취의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알바한 돈으로 몇 대 사서 직접 오디션 장면을 녹화해 보았습니다. 자신도 자기 같은 사람을 뽑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캐릭터가 온전히 묻어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연기에 좌절을 느끼며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습니다. 카메라를 끄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도 하고 연기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심코 녹화된 자기 모습을 보았는데, ‘앗, 이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나 연기 잘하는 자연스러운 배우가 하나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너무 매력이 있었고 캐릭터가 다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캐릭터를 가리고 있는 게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카메라에서 연기하고 있는 자신이었다면 이제 막걸리가 그를 완전히 그 캐릭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무아의 경지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짝 눈치를 챘습니다. 

‘카메라는 요물이구나! 웬만큼 자연스럽지 않으면 이거는 받아주지도 않는구나.’

그때부터 본 오디션은 다 합격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입니다. 진짜 캐릭터가 자신 안에서 완전히 살아 숨 쉬려면 자기를 완전히 잊게 만드는 막걸리 한 사발과 같은 무언가가 필요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들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오늘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도 그와 같은 분들이셨습니다. 특별히 필립보는 십자가에 매달려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지만, 베드로와 안드레아처럼 십자가에서 순교한 면이 그리스도와 매우 닮았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의 형제로 알려져 있는데, 그리스도와 닮은 면이 있어서 예루살렘의 첫 주교가 됩니다. 그를 보면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포도주를 마시며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할 수 있을까요? 술기운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성령의 기운에 나를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병헌은 연기 천재입니다. 그가 연기를 잘하는 이유는 현장에서 대본을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야 틀에 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다만 그 캐릭터의 감정선에만 집중합니다. 대사를 틀리면 다시 찍으면 됩니다. 

그러나 틀에 매이면 캐릭터가 죽고 자기가 삽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은 연기가 어색하게 되고 분심들게 됩니다. 또 현장에서는 긴장하면 안 됩니다. 이완되어야 긴장을 만들지 않고 캐릭터 정서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한잔하고 온 사람과 같습니다. 연기할 때 캐릭터만 살고 최대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으면 평화가 옵니다. 

저도 강론하거나 강의 할 때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아직은 자아가 강해서 제가 보면 몸이 오그라듭니다. 그러나 조금씩 나아져 가려 합니다. 우리도 내 안의 예수님께서 그대로 표출될 수 있도록 항상 성령의 술에 취해 살아갑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 그리고 평화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인물 몰입형 연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얼마 전에 철학자 니체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니체는 여행자를 다섯 등급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최하급 여행자는 남에게 관찰당하는 여행자입니다. 다음 등급은 스스로 관찰하는 여행자이고, 세 번째 등급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를 체험하는 여행자입니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습득해서 계속 몸에 지니고 다니는 여행자이고, 마지막으로 최고 수준의 여행자는 관찰한 것을 체험하고 습득한 뒤에 집으로 돌아와 일상적인 생활에 반영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삶 안에서 우리 모두 여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수준으로 살고 있을까요? 수준 낮은 수동적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습득한 지혜를 일상에서 남김없이 발휘하며 사는 능동적인 삶을 사십니까? 
 
여행자의 등급처럼 주님의 제자 되는 길 역시 등급을 매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수동적인 삶이 아닌,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 주님의 참 제자에 더 가깝게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사실 수동적인 삶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남 눈치만 보면서 살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남 하는 대로만 살면서 여기에 굳이 어떤 결정도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모습을 원하실까요? ‘남’처럼 사는 삶이 아닌 ‘나’처럼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남처럼 사는 삶을 결코 재미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만의 삶을 살면서 그 안에서 보고 느끼는 주님의 손길에 동참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랑받기보다 나의 의지를 내세워 사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가장 높은 단계의 주님 제가 되는 방법입니다.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필립보가 예수님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뵙기를 바라는 필립보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힘들고 어려운 예수님과의 전교 활동을 통해 흔들리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를 보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이미 하느님을 보여주셨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일상 안에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곧, 주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린 길을 찾을 수 있어요. 단지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지...

- 욘 포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머무름으로 사랑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머무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머무름의 꾸중을 하십니다. 단단한 기본을 머무름에서 다시 배웁니다. 신앙의 역사 안에 머무름의 훌륭하신 두 사도가 계십니다. 사도의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의 길은 머무름의 길이기에 조급하지 않습니다. 머무름은 깨어있음이요 주님의 빛으로 자신을 비쳐보는 감사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머무름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머무름은 헛된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진정한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머무름의 길이 있습니다. 머무름을 향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이론적으로 이해될 한낱 지식만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도와 사도의 대결이나 왼편과 오른편의 자리싸움이 아닙니다. 대결과 싸움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는 혼돈과 단절이 됩니다. 그래서 머무름의 단절은 사랑의 단절이 됩니다. 

머무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머무름은 하느님을 간과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오롯한 맞이함이요 오롯한 나눔입니다. 두 사도들에게 있어 머무름은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머무름으로 돌아가는 머무름으로 알게되는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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