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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4/29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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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슬기롭고 지혜로운 동정녀는 등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갔네. 알렐루야.

하느님, 복된 가타리나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교회에 봉사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여 세상에 드러난 그분의 영광을 보고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2024년 4월 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4월 29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4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리라.

 

 

요한 14,21-26
오늘 복음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4월 29일
김정현 요셉 신부

 

✚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6

✚ 강론시작 08:59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최후의 만찬을 배경으로 하는 요한 복음서 14장은 ‘제자들의 질문’을 통하여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먼저 토마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고(14,5-7 참조), 필립보의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며(14,8-21 참조), 마지막으로 유다(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의 질문과 그 대답(14,22-26 참조)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필립보와의 대화 마지막 부분으로 시작하는데,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길’임을 제시합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유다와의 대화에서도 되풀이됩니다. 

다만 계명을 지키는 것이 ‘내 말을 지키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천명한 필립보와의 대화와,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천명한 유다와의 대화를 하나의 본문으로 구성함으로써,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말씀을 지키는 것임을 명시합니다.

규범(계명)만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가르침(말씀)을 자발적으로 지키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지성의 문제이고, 그래서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알아보고 따르며 행동에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 없이 진행되는 삶은 신앙생활이기보다 우상 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앉은뱅이를 걷게 하자, 군중이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외치며 그들을 신격화하였듯이, 우리의 신앙도 기적과 경이로움만을 사랑하는 우상 숭배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섬세하게 반응하고 내 삶의 절대적 지침으로 삼는 것, 그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길이며 참다운 신앙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영어에 비슷한 두 단어가 있습니다. Receive와 Accept입니다. 비록 제 영어 실력이 보잘것없지만 제 생각에 Receive는 그저 받는다는 뜻인 데 비해 Accept는 받아들인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우리말에서도 ‘받다’와 ‘받아들이다’는 비슷하면서도 다르지 않습니까? 받는다는 뜻은 누가 보내기에 그저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받는 사람의 능동성이나 주도성이 없습니다. 

이에 비해 받아들인다는 것은 보내서 받았지만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는 내게 달렸습니다. 받았지만 얼마든지 안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편지를 받았지만 수취인 거부할 수도 있잖아요? 

우리도 주님의 계명을 다 받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안 받아들입니다. 

신앙인은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비신앙인은 안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받아들이되 억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열심하지 않은 신앙인이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계명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열심한 신앙인이지요.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나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만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거절당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사람에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 곧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의 뜻도 이런 것입니다. 

사랑을 주시는데도 우리가 안 받아들이면 하느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다 받는데 어떤 인간은 줘도 안 받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참 한심한 인간이지요. 

하느님 사랑은 안 받고,
인간의 상처는 다 받습니다. 

주님의 계명은 무시하고,
인간의 명령은 무서워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령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준 계명을 실천하면 반드시 그에게 칭찬받게 되어 있습니다. 칭찬은 영광과 비슷한 말입니다. 칭찬을 위해서는 상대가 원하는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어른 보면 무조건 인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고 무조건 인사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가 인사를 너무 잘하고 다닌다고 다른 어른들에게 칭찬받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칭찬해 주셨고 우리는 이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인사하고 다녔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칭찬은 사실 선생을 지속시키는 힘입니다. 어느 정도는 칭찬이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디팩 초프라도 두 아들에게 모든 것은 아버지가 책임질 테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자녀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결과는 놀랍습니다. 두 아들 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아버지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게 훌륭하게 성장하였습니다. 이 영광으로 그들은 아버지가 왜 그렇게 시켰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종에게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구해오라고 하였습니다. 종은 자기 낙타들과 자신에게 선행을 할 줄 아는 레베카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각종 폐물과 옷을 주었습니다. 이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성령님은 이미 선행을 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으로 레베카는 이웃에게 선행을 더욱 잘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선행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나에게 주어지는 칭찬, 영광, 성령의 은총은 내가 지금 하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이해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인데,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정말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은 사랑이신데, 사랑의 말씀은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일에 축일 잔치를 본당에서 했습니다. 일 년 중 가장 견디기 어려운 날입니다. 도망을 치고 싶지만, 신자들이 아쉬워할까 봐 어쩔 수 없이 국수 잔치하였습니다. 신자들에게 해 준 것도 없는데 받는 영광은 정말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왜 사람이 스스로 지옥에 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영광이 감당하기 어려워 숨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영광이지만, 자기 양심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늘 나라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에게 오는 영광은 나 자신이 합당하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너무 두렵습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이 부담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신자들에게 사비로 국수를 대접해 드렸습니다. 물론 신자분들이 축하한다고 주시는 축하금이 그 비용보다 많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것까지 받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본당에서는 저의 어머니와 제가 아는 지인들을 초대하여 같이 식사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에게 국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할 수 있다면 이 부담감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잔치는 잘 끝났습니다. 

이것을 하는 중에 지금의 상황이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는 상황과 똑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먼저 에사우가 부담스러워 그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줄 수 있는 것은 다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나라에서 사는 영광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되지 않아서 자기 가족들을 보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안 되니 기도하였습니다. 겸손해진 마음으로 에사우 앞에서 일곱 번 절하며 에사우를 하느님처럼 경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신자들에게 힘줄이 끊어진 장단지를 가진 야곱처럼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러니 그 영광을 조금 받아들일 만했습니다. 

이것이 왜 주님께서 당신 앞에 나아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지가 이해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것 때문에라도 하느님 나라 영광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그분 앞에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면 저는 스스로 지옥을 선택할 것이 확실히 이해되었습니다. 

성령의 영광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꼭 선행을 하고 영광을 받아봅시다. 그러면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게 될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지방에 강의 갔다가 강의를 거의 마칠 때, 청중에게 “저, 어때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청중 중 몇몇이 “멋져요. 좋아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분은 “사랑해요.”라고 크게 외치시기도 했습니다. 
 
“저, 어때요?”라고 질문을 던진 이유는 저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저의 부족한 강의를 듣는 청중이 너무 멋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 이상을 강의하는데 온전히 제게 집중해 주시는 모습, 그 모습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저, 어때요?”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멋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멋짐이 드러나는 곳은 있어야 할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사로 이 자리에 있어서 ‘멋지다’라는 말도 들을 수 있는 것이지, 만약 만취해서 비틀거리며 이 자리에 서 있다면 ‘멋지다’라는 말보다는 ‘흉하다’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 있기에 멋집니다. 그 멋짐이 너무 좋아 보여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모두 계속 멋질 수 있도록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죄로 물든 곳은 멋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우리의 자리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 안에서, 학교에서, 그밖에 삶 안에서 우리는 충분히 멋집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멋짐을 흉한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없는 곳으로, 죄악이 가득한 곳으로 만든다면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가장 멋진 사람으로 살 수 있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소홀하게 됩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 모습이 과연 멋져 보일까요? 아닙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이 드러날수록 더 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이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해주십니다. 우리를 더 멋지게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멋지게 하시려고 계속 사랑을 주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멋진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시련을 겪는다는 것은 바닷가에 있는 자갈이 되는 것과 같다. 여기저기 다치고 멍들지만, 전보다 윤이 나고 값지게 되기 때문이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언제나 우리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임은 하느님 사랑의 실천입니다. 싱싱하고 생생한 생명력은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통해 우리는 지혜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과 지혜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생활로 사랑을 공동체로 구현하고 전개하는 것이 바로 참된 사랑의 목적입니다. 생활로 드러나지 않는 사랑과 수도는 참다운 수도라 할 수 없습니다. 

아프고 외롭고 지친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보다 뜻 깊고 소중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의견과 주장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먼저 귀를 기울입니다.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진정한 소통이며 교감입니다. 삶이 고달픈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는 말씀과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주고받는 말씀과 마음이 참된 개혁입니다. 말씀을 통한 의식의 개혁이야말로 모든 개혁의 조건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할 생활이며 만남입니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마음과 생활을 만나는 뜻깊은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말씀이 마음이고 마음이 가르침이고 가르침이 예수님을 드러내는 복음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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