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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4/27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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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시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의 위업을 선포하여라. 알렐루야.

하느님, 파스카의 천상 영약으로 세상을 치유하시니 저희가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살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2024년 4월 27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4월 27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4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4,7)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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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요한 14,7-14
오늘 복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4월 27일
강선훈 세례자요한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24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고, 관계가 지속되려면 당연히 서로 만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제시된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는 필립보의 청원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느님을 뵙는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도 여전히 이를 요구하는 황망함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된 아버지와 아드님의 일치가 또 다시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여 주어도’ 그 안에 있는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독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유다인들을 고발하며, 이제 그들을 떠나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라고 담대히 선언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모습을 전하여 줍니다. 

결국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을 ‘보게 된’ 이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온 세상 땅끝’에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화답송 참조).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한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에게 마음이 갑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우아함’과 ‘하느님을 박해하는 우둔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경종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설명이나 훌륭한 해석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장에 현존하여 계시는 하느님은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상황은 우리 주변에 복병처럼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여 나가는 것은 종교적 허상일 뿐이고 그만큼 쉽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누가 배은망덕할 때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배신으로 갚고, 받은 덕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바로 배은망덕을 톡톡히 경험합니다. 그렇게 열렬히 복음을 전해줬는데 그러니까 은혜를 베풀었는데, 바오로와 바르나바 덕분에 참 행복과 구원을 얻을 수 있었는데, 무슨 개뼈다귀 같고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얘기나 하느냐고 사람들은 모독적인 말로 오히려 은혜 갚음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는 나도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닌지. 다른 하나는 누가 내게 배은망덕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 생각에 은혜와 덕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도 배반하거나 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가 받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덕인지 몰라 그러는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사실 오늘 사도행전의 유다인들에게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고마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해준 복음이 자기들에게 행복과 구원을 주는 복음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이 그들에게 몰려드는 것을 보고 시기심에 꽉 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아직 맛보고 깨닫지 못하였다면, 주님의 복음이 아직 내게 참 행복과 구원의 말씀이 되지 못한다면, 그래서 주님의 말씀보다 돈을 주는 것을 내가 더 은혜롭게 여기는 수준이라면, 복음 선포가 내게는 은혜도 아니고 덕을 나눠주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은혜로 알 줄 알아야 하고, 덕을 덕으로 알 줄 알아야 배은망덕하지 않고, ‘네 덕 내 탓’할 줄 알아야 배은망덕하지 않을 겁니다. 

네 덕에 그 귀한 복음을 알게 되었는데 내 탓으로 그 복음을 잘살고 있지 못하다고. 

다음으로 다른 사람이 내게 배은망덕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입니다. 배은망덕해도 그것으로 불행해지지 않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은혜를 베풀고도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지 않는 것이 하나이고, 은혜를 베풀고 고맙다는 얘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제 생각에 돈이나 재물과 같이 세속적인 무엇을 주는 것은, 그것을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아예 생각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돈이나 재물을 대단히 은혜로운 것이라고 여기는 꼴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줘버리고 말고 줬다는 기억조차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것은 진정 은혜로운 것을 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은혜롭지 않은 것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 은혜로운 것을 주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 이전에 주님의 말씀을 진정 은혜로운 것으로 여기는 내가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내가 은혜롭게 여기는 주님 말씀을 전해줬는데도 고맙다는 말은커녕 오늘 바오로와 바르나바처럼 모독적인 말을 듣게 되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배은망덕이라고 분노해야겠습니까? 

만일 주님 말씀을 전하고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할 때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정 주님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전한 것이며, 그를 위해서 전한 사랑의 말씀이 아니고, 주님 말씀으로 충만하고 고맙고 행복한 사람의 사랑 나눔이 아니지요. 

주님의 그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줬는데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로운 말씀이 은혜롭지 않은 그가 딱하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주말이 되면 또는 행락철이 되면 제가 강론을 올려도 많은 분이 읽지 않으시거나 읽지 못하십니다. 그때 애써 주님 말씀을 나눴는데 읽지 않는다고 제가 분노한다면 되겠습니까? 그냥 애석하고 안타까워할 뿐이어야겠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병원에서 청소하는 청소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로 병실을 돌며 병실 청소를 합니다. 그가 맡은 병실 중에는 싸움에 휘말려서 몇 달째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는 청년 환자의 병실도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이 병실에 들어갈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지요. 
 
그날도 이 병실에 들어가 깨끗하게 청소했습니다. 그런데 매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청년을 간호하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호자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소홀하게 청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청년의 안타까움을 생각하면서 더 깨끗하게 청소하고 나왔습니다. 
 
이제 다른 병실 청소로 옮기려고 복도로 나왔는데 복도에서 이 청년의 보호자인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다짜고짜 자기 아들 병실을 왜 청소하지 않냐면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이때 이 청소부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조금 전에 청소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자리에 계시지 않더라고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청소부는 아무런 대꾸 없이 다시 청년 병실에 들어가 청소했습니다. 다시 청소한다는 것에 어떤 불평이나 화도 내지 않았습니다. 청년 아버지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몇 개월 동안 애타는 아버지의 마음을 떠올리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섣부른 판단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아픔에 쉽게 감정이 동요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위로하는 것에 그리고 사랑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가치가 아닐까요? 
 
주님의 사랑도 이런 식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우리도 주님처럼 상황 자체보다 상대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주님의 사랑은 곧 하느님의 사랑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이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이제까지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하나이듯,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하나를 이루면서 그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체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하나를 이룰 때, 과연 불가능할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하나되기 위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나를 위해서도 가장 필요한 모습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

- 월리 페이머스 아모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가장 좋은 계절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계절은 잡을 수 없는 흐름이며 기도는 성장하는 인격입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찾아갈 기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여 주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살이 되고 피가 되고 생명이 되는 이름이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를 지켜주시는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가 청하면 다 이루어 주시는 주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곳에 가장 좋은 은총도 함께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버리고 기도의 꽃과 최선의 열매를 피워내고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십자가의 이름이며 부활의 이름이며 완성의 이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라는 이름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랑해야 할 날들이 펼쳐집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결코 메시아가 아님을 절실히 알게 됩니다. 흩어진 마음을 모으는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어떤 마음으로 우리는 기도하고 있는지를 성찰합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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