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주님은 당신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저희를 속량하시어,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가 되게 하셨나이다. 알렐루야.
자유와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어 성자의 피로 구원받은 저희가 하느님의 힘으로 살며 영원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2024년 4월 26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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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3,26-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약속을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4,1-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14,1)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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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1-6
오늘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4월 26일
허성준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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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오늘 복음에서 선포된 이 말씀보다 우리가 더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있을까요? 이 내용 바로 전에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가운데 마지막으로 주시는 당부가 전해집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슬픔과 상실감으로 복잡해진 것을 아시자 그들의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십니다. ‘산란하다’에 해당되는 그리스 말은 ‘타라소’로, 마치 바다가 폭풍우에 휩싸여 모든 것이 휘저어진 상태, 심연과 표면이 완전히 뒤집어진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요동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재가 그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러 가는 것이라고 안심시키십니다. 이때 쓰인 그리스 말 ‘모나이’는 ‘머무는 장소’, ‘방’을 의미하는데, 하느님 나라를 아버지의 ‘집’, 방이 많은 ‘가정’으로 은유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뒤 당신께서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시며, 그 길은 “진리”를 선택할 때 걷게 되고,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참된 “생명”을 준다고 선언하십니다. 독서는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삼아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바오로의 모습을 전합니다.
지금은 진심이어도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 ‘관계’이고, 지금은 행복해도 언제든지 불행해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산란하고 평온하지 못합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삶에 끊임없이 노출된 우리가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에서 보호되고 도착지로 인도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분께서 몸소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살아 행복하고 죽어 구원받는
옛날 형제들을 양성할 때 많이 얘기한 것이 성숙입니다. 양성이란 미성숙한 형제를 성숙한 형제로 키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숙과 미성숙을 얘기하면서 제일 먼저 얘기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있느냐, 있다면 뭐냐고 끈질기게 물었습니다. 바꿔 얘기하면 왜 사냐고 묻는 것이지요. 왜 사는지를 알아야 어떻게 사는지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미성숙하고 방황하는 인생은 인생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방황이란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는 것인데 목적이 뚜렷이 없으니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출가해야 하는데 가출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절에 가서 수행하려는 뚜렷한 목적으로 집을 나서면 출가인데 목적도 이유도 없이 집이 싫어서 무작정 집을 나서면 가출이지요.
그리고 가출하여 방황하는 미성숙한 인생은 열심히 살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갈 데가 없는데 어떻게 열심히 갈 수 있습니까? 딱히 갈 데가 없으니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어슬렁거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떤 목적이든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야 열심히 살 수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사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그 목적이 단기적 목적입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가는 것이 목적이고, 대학 가서는 취직하는 것이 목적이고, 취직해서는 결혼하고 애 낳고 알콩달콩 사는 것이 목적이고,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돈 버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죽는 것입니까? 죽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적입니까?
일찍이 저는 이 인생 문제로 오랫동안 고뇌와 방황을 했고 그 인생길을 찾고자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을 찾다가 10여 년 만에 찾은 목적이 바로 사는 동안 ‘행복한 것’, 죽어서 ‘구원받는 것’이고, 행복과 구원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이 행복이요, 죽어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가는 이 길에 길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왜 사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찾기 위해 석가에게도 가고, 힌두 명상가들에게도 가고, 노자 공자에게도 갔지만 그 길을 찾지 못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길을 찾고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오늘 주님 말씀이 너무 소중하고 일생 감사하는 저인데 여러분에게도 이 말씀이 그런 말씀이기를 비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만난 사람의 삶의 방식
금쪽같은 내새끼 116회에서 ‘게임 캐릭터가 죽자 동생의 머리채를 잡고 무섭게 돌변한 금쪽이, 심지어 주먹질까지?!’란 내용이 방영되었습니다. 금쪽이는 게임 캐릭터가 죽자 동생들을 심하게 괴롭힙니다. 그 캐릭터의 가치가 자신에겐 너무 큰 것입니다.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때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싸움은 나의 귀한 것을 누군가 때문에 잃었다고 여길 때 일어납니다. 누가 나의 똥을 훔쳐 갔다면 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은 게임 캐릭터가 자기 삶의 전부입니다.
왜 이렇게 집착하게 되었을까요? 어른으로 성장할 탈출구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숲에 있는데 뒤에서는 불이 나서 계속 내가 있는 곳으로 타고 있고 앞은 큰 강이 흐르는 수렁으로 막혀 있다고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불안하고 두려워서 숨을 곳을 찾게 되고 그 장소를 다른 사람이 노리고 있다면 싸움을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 그 수렁 절벽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발견한다면 어떨까요? 그 자리 때문에 싸울 일은 없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곧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다리입니다. 진리란 말은 그 다리가 하나뿐이란 뜻이고, 생명이란 말은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죽음뿐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용서’가 그 생활 방식이 됩니다. 이 세상 것들이 모두 죽음과 관계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에사우로부터 도망칠 때 하늘로 오르는 계단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 계단을 만나야 합니다. 위 금쪽이들의 이야기에서 금쪽이들의 다리는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다리입니다. 그런데 그 다리가 휘청거려 아이들의 평화가 깨진다면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상에 갇히고 맙니다. 형제끼리 싸우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위 아이들의 부모는 매일 싸우고 이혼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저희 집이 가난하다고 아이들 앞에서 인격적인 모욕을 하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런 선생님을 좋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미워할까요? 저는 아이가 아닙니다. 제가 장난감 가지고 아이와 싸운다면 저는 아직 어른이 되는 다리를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두 주인공 중 하나는 군대를 제대해서 여자도 사귀며 결혼할 일을 생각하고 그 이전의 일은 다 잊었지만, 또 다른 하나는 평생 군인으로 살 것처럼 죄책감에 사로잡혀 결국엔 자살을 선택합니다.
파올로 코엘료 ‘연금술사’에서 현자는 행복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기름 두 방울을 숟가락에 주며 쏟지 말고 성을 한 바퀴 돌면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성의 아름다운 것들에 정신이 팔려 숟가락의 기름이 쏟아지는 줄 몰랐습니다. 현자는 두 번째 기회를 줍니다. 그랬더니 두 번째는 기름에 주의를 더 기울이다가 주위의 것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현자는 행복의 비법은 기름을 쏟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자는 그 사람에게 기름 두 방울을 주면서 그 사람이 이 세상 것들에 정신을 쏟을 존재가 아님을 알려준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은총과 진리라는 두 방울의 기름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집착할 존재가 아님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미워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만났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세계적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어떤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역사를 배워야 하나요?”
유발 하라리는 이 질문에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답합니다. 과거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에 예속되고 지배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라는 말에서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과거로부터 답습되던 것들에 벗어나지 못할 때가 참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모습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습에 갇혀 있게 됩니다. ‘왕년에 말이야~’라면서 하는 말, ‘전에는 이렇게 했는데’라는 말…. 이런 모습을 향해 요즘 젊은이들은 ‘꼰대’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역사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 과거에 갇혀서 정체되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역사에 더 예속되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교회 안에서도 새로운 것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늘 반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거를 따르면 그만큼 실패 확률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모습에서 찾게 되는 기쁨을 얻기는 힘들어집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당시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모두 중요했습니다. 그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율법이라는 과거를 따르라고 그토록 요구했고, 그러지 않은 예수님 모습을 반대해서 떠나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다른 예수님 모습에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해합니다. 앞날에 대한 불안, 세상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걱정이 태산 같았던 것이지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과거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닌, 하늘에 속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때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산란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서 지금을 새로운 마음으로 더 기쁘고 힘차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 넬슨 만델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당신 자녀들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생명과 진리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생명과 진리는 끊이지 않고 예수님의 삶으로 이어저 있습니다. 진리와 더불어 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과 당신의 진리 당신의 생명을 온전히 아버지 하느님께 맡기셨습니다. 온전히 내어맡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내어맡기는 것이 길이며 내어맡기는 것이 진리이며 내어맡기는 것이 하느님의 생명입니다. 내어맡기는 하나의 진리 속에 사는 우리들입니다.
내어맡기는 실천의 힘을 통해 우리의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은 무르익어 갑니다. 이와 같이 진리와 어우러지는 삶을 우리가 살길 바라십니다. 참된 진리를 닮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신앙인입니다. 신앙인들은 주어진 길을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걸어갑니다.
예수님에게서 길이 시작되었고 진리가 이어졌고 모든 생명이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참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참된 진리와 참된 생명이 되시어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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