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2024년 2월 12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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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6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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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야고보서 1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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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장 4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야고보서 1,1-11)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리하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이다. - 오늘 복음
(마르코복음 8,11-13)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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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마르코복음
8장 11-13절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2월 12일 05:00
박우성 암브로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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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최정훈 바오로 신부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가장 큰 차이
체코의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에서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가장 큰 차이가 ‘인내’임을 통찰합니다. 신앙인이나 무신론자나 똑같이 하느님의 부재를 느낍니다. 세상의 수많은 부조리와 모순에도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설명하려고 무신론자들은 “신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명확한 답을 바로 얻고 싶은 무신론자들의 성급함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도 신앙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바로 ‘인내’로 견뎌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신비의 오묘함과 우리 삶의 모호함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내로 기다립니다.
모든 것이 명백한 곳에서는 신앙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모호하고 불분명한 곳에서 요구됩니다. 침묵하시는 하느님, 차갑고 어두운 밤, 불확실한 삶 안에서 신앙이 드러납니다.
그 신앙은 확실성과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신비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믿음과 희망은 바로 불분명한 순간에 드러나는 우리의 인내입니다.
제1독서에서 야고보는 삶의 시련에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시련을 잘 받아들이면, 그 안에서 인내가 생겨날 것입니다. 인내와 함께 우리의 믿음은 더 깊어지고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을 단단하게 하여 주는 이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들도 인내심 없는 자들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도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징을 바랍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눈으로 확인하고 비로소 이해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무신론자들과는 다르지만, 인내심 없이 명확함을 바라는 성급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사이들에게 표징을 주지 않으시고 인내와 진정한 믿음을 가르치십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시는’ 성모님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은총의 완성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지혜가 모자라면 청하라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베푸실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모자라고 청할 것이 지혜뿐이고,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 지혜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모자라는 것투성이고, 그러니 우리는 청할 것을 특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좋은 거라면 뭐든 청해도 되고 하느님께서는 너그럽게 주십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주신다고 하는데 이 말을 바꿔 이해하면 하느님은 은총의 하느님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청하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신다고 그 은총이 다 우리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는 것인지, 그 은총이 진정한 은총이 되게 하려면 다시 말해서 은총을 완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것이 오늘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은총의 완성은 실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 우리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게 하려면 주신 은총을 가지고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고 이것이 야고보서가 줄곧 주장하는 바이며 우리 가톨릭이 개신교와 달리 얘기하는 바입니다.
개신교가 비판하듯 우리의 실천과 공로가 있어야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과 공로가 은총의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은 주신 은총에 대한 합당한 노력입니다.
밥을 주십사 청하면 하느님은 밥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밥을 먹고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면 그 밥은 우리의 힘이 되지 않고 살만 찌개하고 비만만 되게 할 뿐이지요.
밥이 우리의 힘이 되게 하려면 힘들어도 힘을 써야 합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힘들다는 말은 힘이 들어온다는 말인데, 밥이 힘이 되어 들어오게 하려면 힘들어도 힘을 쓸 때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인내 또는 인내력이 어떻게 생기는지 얘기하는데 그 골자는 시련 없이 인내는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말이기도 한데 너무도 당연한 말입니다.
인내라는 것이 본래 싫어하는 것, 고통, 시련을 견뎌내는 것이지, 좋아하는 것, 즐거움, 순탄함은 견디지 않고 그저 즐기고 누리는 법이지요. 요즘 인내하는 힘들이 갈수록 떨어집니다. 역경에 조금만 처해도 쉽게 Burn out이 됩니다.
Burn out을 우리말로 무기력증이라고 번역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풀어서 얘기하면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어느 순간, 심리적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고 육체적으로도 무기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렸을 때부터 역경을 적당히 견디는 힘을 길렀어야 하는데 자식을 너무 사랑하여 그 나이에 맞는 역경을 겪지 않아도 되게 부모가 과보호했고 역경을 피해 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역경을 견디고 이겨내는 힘이 세다고 하지요. 맞는 말이지만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아니, ‘과잉 사랑’을 받아 힘든 것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고 컸다면 그 사랑의 결과는 완성이 아니라 실패이고 밥을 먹고 힘든 일을 하지 않아 비만이 되듯 사랑도 비만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든 은총이든 많이 받았으면 많이 실천해야 사랑 비만 은총 비만이 되지 않고 완성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은 믿으려는 의지만큼 자기를 드러낸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사랑이 아니시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증거를 보여달라는 말은 상처요 모욕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본성상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눈빛부터 표징입니다. 문제는 사랑해보지 않으면 사랑을 알아볼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나의 사랑이 증가할수록 하느님 사랑을 볼 줄 알게 됩니다. 사랑에는 표징이 있는 게 아니라 수준만 있을 뿐입니다. 그 하는 사람의 수준과 받는 사람의 수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십니다.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목동들처럼 천사를 보게 되고 동방박사들처럼 별을 보게 됩니다. 완전한 표징은 그다음에 인식 수준이 높아지면 볼 수 있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이 착한 뜻만 가졌다면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착한 뜻이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자신도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입니다.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은 믿지 못하는 핑계를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둘러댑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을 인식할 사랑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건축학 개론’(2012)에서 남자 주인공 승민은 자격지심이 있습니다. 자신과 호감을 느끼는 서연이 돈 많고 잘생긴 자기 과 선배를 좋아하고 그 선배에 비하면 자기는 개구리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 자격지심의 상징은 그가 입고 있는 가짜 “GEUSS”(진짜: GUESS) 티셔츠입니다. 과 선배와 서연은 승민의 티셔츠를 보며 농담하고 웃습니다.
여기서부터 승민이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기 바쁩니다. 사실은 사랑하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괜찮았다가 자기가 자격이 안 됨을 알고는 사랑한다면서 헤어질 준비에 착수합니다. 결국 서연과 과 선배와의 작은 신체접촉을 보고 오해하여 먼저 헤어지자고 말합니다. 그렇게 서연은 이유도 모르게 이별 통보를 받습니다.
15년 뒤 이혼녀가 된 서연은 결혼 준비 중인 승민의 건축사 사무실로 찾아옵니다. 자기 집을 지어주겠다던 승민의 약속이 떠올라서였습니다. 승민은 이미 결혼할 상대에게 서연이 “썅년”이었다고 말해놓은 터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더 나쁜 사람일까요? 사랑해 본 사람은 압니다. 사랑은 눈빛까지 믿겠다는 의지적 결단입니다. 사랑이 부족할수록 그 두려움에 믿지 못할 거리를 찾습니다.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여기며 믿지 못할 표징들을 찾는 마음을 가진 승민처럼 말입니다.
사랑할 자격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사랑해보면 그저 믿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표징을 알아보게 됩니다. 사랑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할 수 없습니다. 동방박사처럼 믿는 만큼 하느님은 더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사랑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는 사랑은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사랑의 수준에 따라 순차적으로 내어줍니다. 그러니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표징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자격 없는 존재로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표징보다 의심 거리를 먼저 찾습니다.
사랑할 자격은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얻어집니다. 그래서 구약에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준 것입니다. 사랑하겠다는 결단이 내려졌다면 이제 믿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점점 더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믿기로 결단한 그 사람의 의지만큼 자신을 드러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313년 로마 제국이 종교 자유를 허락하면서 상황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직자들에게 병역 면제, 세금 면제 등을 베풀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재산은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특히 종말을 걱정한 부자들은 유산 대부분을 교회에 기부했고, 가난한 사람도 죽을 때 구원을 위해 교회에 전 재산을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이를 통해 교회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심각한 세속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발 빠른 사람은 자기 자녀를 성직자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성직매매를 통해서입니다. 당시의 교회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헌금을 받아 부자가 된 주교들은 가마를 타고 화려한 옷을 입으며 호화스럽고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 그들이 벌인 잔치는 로마 제국 황제의 잔치들보다 더 성대했다.”
종교 자유는 분명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종교는 부패했고,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길은 편하고 쉬운 세속화에서 찾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 세속화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사랑의 하느님은 그런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논쟁하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보고서 믿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일은 믿음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세상의 기준을 통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들은 절대로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신 것, 빵의 기적 등을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자기들 앞에서 직접 표징을 행하라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이며 꼬투리를 잡으려는 시도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습니다. 과거 종교의 자유로 세속화가 이루어지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어졌던 것처럼, 세상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불신의 마음이 하느님과 절대로 함께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말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믿음은 세상 것에 기준을 내세울 때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기준을 맞출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기고 계속된 하느님의 놀라운 표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들은 평생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죽을 때까지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 세네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소중한 일상 새로운 일상을 매일매일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소소한 일상을 너무 쉽게 건너뛰고 지나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일상을 건너 뛰면서 까지 체험될 수 있는 평화란 없습니다.
일상을 부정하면 그 어떤 표징도 주님께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상보다 더 아름다운 표징은 없습니다. 마음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의 표징이 일상의 가장 큰 은총입니다. 일상의 단절은 터무니없는 은총의 요구로 이어집니다.
일상이 바로 은총이며 표징입니다. 일상은 논쟁거리가 아닌 주님마저 시험에 빠뜨리게하는 욕망의 족쇄가 아닙니다. 단 한번도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여 본 적이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의 일상이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일상이며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일상입니다. 일상의 방관자는 또한 은총의 방관자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일상을 통과하며 하느님 나라의 삶에 가닿게 됩니다.
소소한 일상을 모으니 감사가 되고 기적이 되고 은총이 됩니다. 일상을 되살려 표징이 되게하시는 일상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통하여 탄식이 아닌 기쁨의 탄성(歎聲)이 넘쳐나는 오늘의 일상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좋은 일상 가장 좋은 표징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의 표징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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