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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1/28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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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2024년 1월 28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4주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시편 95장 7-8절)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시편 95장 7-8절)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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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5장 7-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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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신명기 18,15-20)
    나는 예언자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 제 2독서
    (코린토 1서 7,32-35)
    처녀는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 오늘 복음
    (마르코복음 1,21ㄴ-28)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월 28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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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네.

 

 

마르코복음
1장 21ㄴ-28절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1월 28일 05:00
조규만 바실리오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15:51

 

 

 

가톨릭 스튜디오 주일미사

 

 

2024년 1월 28일 11:00
원당동성당 이병근 대건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1:36

✚ 강론시작 20:46

 

 

 

성필립보생태마을 주일미사

 

 

2024년 1월 28일 17:00
다볼사이버성당 정경민 세례자요한 신부

 

✚ 미사시작 01:10

✚ 강론시작 14:33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재덕 베드로 신부

 

말씀이 나에게도 이루어진다는 믿음

 

율법 학자들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하였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율법 조항에 근거하여, “악령에 들렸으니 저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고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을 구분 짓고, 정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을 구분 짓는 것, 이것이 율법 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권위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 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율법 학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권위는, 당신 말씀이 악의 지배를 받는 자들까지도 구원으로 이끄는 힘을 가졌다는 데 있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 말씀 한마디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지배하던 악을 떠나가게 만든 것처럼,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악의 지배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다시 생명의 빛을 바라보고, 이렇게 살아온 나 또한 하느님의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체험하게 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듣게 되는 복음 말씀 안에는 악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권위가 담겨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여 줄 수 있는 힘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여러분을 악에서 구원하여 줄 힘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면서도 구원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엄청난 권위가 담겨 있는 복음 말씀이 나에게도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미사 때마다 듣게 되는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면 무관심으로 외면하고 있는지,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의 영적 권위에 승복하는 영적인 우리

 

저는 작은형제회 김찬선 신부인데 오늘 첫 미사를 봉헌하는 새 사제의 수련장이었던 인연으로 오늘 첫 미사 강론을 기쁘게 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우리 비오 사제를 저희 수도회에 보내주시고, 지금까지 기도해주시고 사제가 되기까지 온갖 도움을 주시고, 첫 미사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신 본당 신부님과 모든 신자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첫 미사 강론을 준비하며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주님을 등에 태웠던 어린 나귀입니다. 주님께서는 입성 준비를 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저는 비오 사제가 바로 이 어린 나귀처럼 끌려온 것 같습니다. 아직 아무도 태운 적이 없는 비오 사제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주님을 등에 태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나귀는 아무도 그리고 한 번도 태운 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아직 나약하고 허약하여 자기 한 몸 제대로 건사하기도 힘든 상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왜 굳이 경험도 없고 힘도 없는 어린 나귀를 택하셨을까? 그것은 주님께서 수난의 현장으로 들어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의 임금이 되시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면 준마를 택하셨겠지만 죽으러 가시는 데는 준마가 어울리지 않고 어린 나귀가 제격이기 때문일 겁니다. 

아마 준마였다면 입성 때 사람들이 주님을 열렬히 환영하고 찬양할 때 말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환호하는 줄 알고 날뛰거나 착각이 아니라면 주님을 등에 업고 날뛰었을 겁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제가 주님을 등에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등에 업고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 날뛰고 주님께 가야 할 환호를 자기가 가로채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 신명기의 주님도 주님의 사람 예언자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새 사제가 이럴까 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새 사제는 진정 주님의 어린 나귀입니다. 덩치는 커도 어린 나귀처럼 약하고 이리 떼 가운데로 가는 양처럼 양순합니다. 

새 사제가 수련받을 때 안동댐서부터 부산까지 낙동강 길을 걸었습니다. 그때 4대강 개발이 한창일 때라 생태 교육 차원과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힘든 길을 함께 가는 교육과 체험 차원에서 걸었지요. 가깝고 쉬운 길은 혼자 갈 수 있고 혼자 가는 것이 편하지만 멀고 힘든 길은 혼자선 엄두도 못 내고 엄두를 내더라도 중간에 포기하기 쉽기에 주님의 십자가 길을 따르는 힘든 길은 같이 가야 하는데 그런 교육 차원이었지요. 

그런데 7월 말 8월 초 한여름에 낙동강을 걸으려고 하니 수련자들 가운데 홀쭉이와 뚱뚱이 두 형제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저녁 먹고는 배낭에다가 10kg 정도 되는 책을 넣고는 묵주 기도를 하며 한 시간 정도 운동장을 돌았는데 덕분에 저도 같이 돌았습니다. 새 사제는 사제가 되고도 이럴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자신이 약할 때 강해지는 사제가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힘이 머무르도록 더없이 기쁘게 약점을 자랑하는 사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때 오늘 주님처럼 힘과 권위를 지니게 되지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율법 학자들과 다른 권위라고 하면 어떤 권위입니까? 그것은 율법의 권위가 아니라 사랑의 권위이고, 법으로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권위이며, 무엇보다도 악령이나 더러운 영까지 말씀 한마디로 제압하는 성령의 권위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주님께서는 세례 때 성령을 받으셨고,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 악령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마침내는 악령을 이겨내셨지요. 

그때 주님께서 받으신 유혹은 돌을 빵으로 만들고픈 유혹이나 세상의 임금이 되고픈 고작 그런 하찮은 유혹이 아니었습니다. 식욕이나 명예욕이나 권력욕은 우리가 당하는 유혹이고, 주님께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고픈 것이 유혹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사탄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리 해봐라 저리 해봐라 했던 거지요. 그 사탄이 오늘도 주님에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합니다. 당신 정체를 폭로할 테니 자기를 괴롭히지 말고 물러가라는 협박을 하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자가 악마가 아니라 잘 알면서도 무슨 상관이 있냐며 관계를 거부하는 자가 악마이고, 구원하러 오신 분을 괴롭히기 위해 오셨다고 믿는 자가 악마입니다. 

어쨌거나 주님께서는 오늘도 성령의 힘으로 악령을 제압하시는데 이것이 진정한 권위이고 영적인 권위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성령과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신데 이런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가 오늘 우리의 관건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오늘 신명기의 말씀처럼 듣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악령처럼 알기만 하고 관계나 추종은 거부하는 자가 될 것인가? 

우리가 악령처럼 주님 말씀을 듣고도 추종하지 않는다면 이런 말을 들을 것입니다.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여러분 가정안에 평화를 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를 변화시키는 말: 고마운 사람의 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말의 권위는 말에 ‘사람을 바꿀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피 흘림 없이 말만 했기 때문입니다. 왜 피 흘림과 함께하지 않는 말에는 권위가 없을까요? 하느님의 피 흘림이 성령이십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4 참조).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의 권위를 말하다가 예수님께서 악령을 몰아내시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십자가의 피 흘림이 생기게 만드는 감정이 ‘감사’입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는 항상 덜 고통스럽고 더 기쁘고 행복한 방향을 선택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행동은 ‘옳고 그름’이 아닌 ‘기분’이 좋을지, 나쁠지에 대한 자기 판단으로 이뤄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 공부하려다 어머니가 공부하라고 하셨을 때 안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공부하게 되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저는 저를 기쁘게 하고 싶었습니다. 왜 어머니가 아닌 나 자신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을까요? 어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성인이 되니 부모가 얼마나 어렵게 자녀를 키우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되지 않는 이상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우선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도 감사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면 어떨까요? 사실 그럴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에게는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에게 감사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은 ‘불안’입니다. 불안을 없애주는 대상에게 감사가 일어납니다. 만약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내 안의 자아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아를 기쁘게 하려고 삽니다. 문제는 자아의 정체가 뱀이란 데 있습니다. 뱀의 소굴에 갇혀 지옥을 살게 됩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심리학자 ‘아른힐 레우뱅’의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라는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자아에 봉사하며 살게 되었는지 잘 적었습니다. 레우뱅은 점점 부모와 친구와의 사이가 단절되자 자기 생존이 최우선이 됩니다. 이때 혼자라는 불안함을 해결해 준 유일한 존재가 있는데 자기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선장’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 때 선장은 유일한 구세주가 됩니다. 처음엔 선장에게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문제는 선장은 워낙 잔혹한 존재라 결국 레우뱅은 조현병에 걸려 벽지까지 뜯어먹는 상황에 이릅니다.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미쳐가는 것도 결국엔 자아에 감사하면서부터라는 사실입니다. 감사하면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러면 보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문제는 자아는 잔혹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자아에게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새로운 감사한 존재를 외부에서 찾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아의 말보다 그 사람의 말을 더 따라주게 됩니다. 이렇게 자아에게서 해방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충고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박한상은 자기를 나무란다고 부모를 살해하였습니다. 부모의 말은 옳았습니다. 그런데 박한상은 너무 부자였던 부모가 자기를 키워준 것에 대해 어떤 감사한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부모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닌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자기만을 기쁘게 해주는 일에서 해방되려면 무조건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서 감사를 찾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피 흘리지 않은 사람에겐 감사가 생기지 않습니다. 불안은 피 흘림으로만 안정됩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도 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많은 베테랑 군인이 희생하였습니다.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도 라이언 일병의 귀에 대고 “값지게 살아. 값지게…. ”라고 속삭입니다.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서 “여보, 나 부끄럽지 않게 살았지?”라고 묻습니다. 값지게 살라는 밀러 대위의 말엔 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그 피에 감사했기에 그 한마디가 평생 라이언을 변화시켰습니다. 모든 변화는 내가 감사하는 이가 해준 한마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달 것 같으면 손을 대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누구는 너무나 먹음직스럽다고 말하지만, 달다고 생각되면 머리부터 아파오는 느낌입니다. 어떤 분께서 너무 맛있다면서 한 입만 먹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단 것을 싫어하는 제게는 한 입 먹는 것이 괴로운 일이 되고 맙니다. 이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 맛있는 것에 어떻게 손도 대지 않는다면서, 혹시 자기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십니다. 
 
음식에 대한 선호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보니, 초콜릿을 싫어하는 아이도 있고, 계란을 싫어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커피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이 커피를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기 선호도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몸에 유익한 것이라면 어떨까요? 지금 아파서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약이 써서 싫다는 아이를 존중해서 약을 주지 않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음식의 선호도가 다른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필요하다면 선호도의 차이가 있어도 억지로 먹게 합니다. 어쩌면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사랑의 선호도도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랑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맛없어 보이는 사랑입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오히려 상대에게 더 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랑을 우리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은 것처럼, 몸과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는 최고의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더러운 영을 쫓아낼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더러운 영은 예수님에 대해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증언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귀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악을 없애고,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을 실천하기 힘들다고 해서 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순간의 만족을 위해 마귀와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마귀의 유혹은 항상 그럴싸합니다. 가장 좋은 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철저히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런 사랑의 선호도를 갖춰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상처는 물에 닿으면 아팠던 게 더 아파지거든요. 그래서 비가 오면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더 아픈거래요.

- 류시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깨어있는 정신으로 현재를 살게하시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참된 권위는 언제나 참된 진리를 따라갑니다. 참된 권위는 언제나 진리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참된 권위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가르침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삶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새롭고 권위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 가운데 울려퍼집니다. 삶의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구체적인 예수님의 가르침이십니다.

가르침의 핵심은 삶의중심을 잡아주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생활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편협한 신앙관을 넘어서서 삶으로 보다듬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을 완성하시는 가르침이 하늘에서 온 것임을 정녕 믿습니다. 분열과 아픔 속에서 더욱 깊어지고 더욱 빛을 발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은총 가득한 주일 되십시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조금씩 환해지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바꾸어 주시는 예수님의 권위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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