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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1/22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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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를 자애로이 이끄시어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저희가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2024년 1월 22일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마르코복음 3장 25절)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마르코복음 3장 25절) 성경말씀카드 마르코복음 성경구절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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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 3장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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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무엘기 하권 5,1-7.10)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다.

  • 오늘 복음
    (마르코복음 3,22-30)
    사탄은 끝장이 난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월 22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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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마르코복음
3장 22-30절

 

사탄은 끝장이 난다.

 

그때에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1월 22일 05:00
박배원 베드로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6:57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재덕 베드로 신부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베엘제불이라는 말은 ‘파리들의 주님’ 또는 ‘쓰레기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악의 실체는 더러움입니다. 더러움을 주님으로 모시게 만드는 것, 이것이 “마귀 우두머리의 힘”이 거두는 열매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결코 영혼을 더럽거나 추악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해방시키시어 다시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였을까요?

마르코 복음서는 그 이유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한 가지 실마리를 줍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오늘 복음 장면이 있을 때까지 예수님의 활동 무대는 갈릴래아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분에 대한 여러 평가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라는 그들의 말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실제로 알지 못한 채 한 말이었습니다.

직접 겪어 보지도 않고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만 듣고 더 나쁘게 평가하는 마음이 율법 학자들의 생각을 지배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따금 이와 같은 유혹을 받습니다. 내가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누군가가 험담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겪어 보지도 않고 더 나쁘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더욱이 험담하는 자리가 교회의 봉사자들을 향한 자리라면, 어쩌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과 비슷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봉사자들을 움직이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며, 율법 학자들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는 슬기로운 신앙인이, 언제나 하느님 편에 서 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무시와 악시의 죄에서 구하소서.

 

지난 토요일과 오늘의 마르코 복음의 얘기를 보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있고, 예수님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사람들이 보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 복음에서는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친척들이 찾아오고, 오늘은 예루살렘에서 율법 학자들이 와서 베엘제벨의 힘을 빌려 악령들을 쫓아낸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그것이 하늘에서 온 힘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하느님을 칭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베엘제벨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율법 학자들도 있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이들의 비뚤어진 시선을 성령에 대한 모독이라고 단죄하십니다. 

이런 비뚤어진 시선 중에 선입견이라는 표현이 있지요. 똑바로 조사해보고, 식별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이미 안에 들어와 형성되어 있는 견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을 잘못 보고 안 좋게 보게 하는 내적 기제가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도 개와 같은 관점이 안에 있어서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욕심이 안에 있으면 욕심내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그렇게 보게 되고, 자기 안에 악이 가득하면 모든 것을 다 악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색안경을 끼면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도 비슷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학자들의 안에는 무엇이 들어가 있어서 성령에 의한 주님의 악령추방을 악령에 의한 것이라고 보게 하는 것일까요? 이들에게 악령이 들어가 있어서 성령을 악령이라고 보는 걸까요? 

아닐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악령이나 더러운 영들도 주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봅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 있는 것은 성령이든 악령이든 영적인 것이 아닐 겁니다. 

그런 것이기보다는 교만과 악의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도 보통 사람의 교만 정도가 아니라 주님마저도 무시하고 악시할 정도의 교만일 겁니다. 

제가 무시와 악시를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무시라는 말은 있어도 악시라는 말은 없지요. 제가 만들어낸 말로서 악으로 보는 눈이라는 뜻입니다. 

교만은 어떤 것입니까? 교만은 분명히 있는 것인데도, 없는 것으로 본다는 뜻이지요. 우리말의 업신여김 곧 ‘없이 여기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다면 교만의 는 선한 것도, 악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조리 악한 것으로 보는 눈이요, 하느님의 선한 업적도 악한 것으로 보는 눈이며, 한 달란트 받는 자가 주님을 모진 분으로 보는 것과 같은 눈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독한 교만은 무시를 넘어 죄악시하게 합니다. 특히 성령을 악령으로 모독하게 하는 죄악시인데, 이런 죄악시를 가진 자는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죄에 매이게 하는 무서운 교만을 경계하고, 이 죄악에서 구해주십사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마음의 평화를 원하면 절대 성령을 모독할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이들을 비판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파견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선물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결국 성령의 선물을 원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도 원치 않게 됩니다. 

제가 며칠 전에 감기인 것 같아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신자분이 운영하는 작은 병원입니다. 수액이라도 맞으면 빨리 나을 것 같아서 놔달라고 했지만, 그분은 수액은 약을 입으로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나 맞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터라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소화제나 감기약은 그냥 내가 약국 가서 사면 되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뒤에 코가 막히고 목에 가래가 끓었습니다. 열도 없고 몸살기도 없었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주말에 미사를 할 때 목소리도 안 나고 콧물도 흐른다면 곤란할 것 같아 다시 병원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보라는 말들을 많이 했지만, 사무원이 예약해주는 바람에 그 병원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진료를 매우 친절하게 다 해 주시고 미리 준비해놓으신 선물도 주셨습니다. 영양제와 방향제까지 있는 모든 것을 한 꾸러미 주셨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요?”라고 했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이 저를 믿어주셨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난번에 약간 실망한 눈빛으로 돌아간 것이 그분도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여기서 삼위일체 신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려준 처방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약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약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떨까요? 병원에 갈 일도 처방전을 받을 일도 없습니다. 약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내가 가서 처방전 없이 구할 수 있는 약들을 살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의사가 처방해 준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약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병을 고칠 희망은 있습니다. 하지만 약에 대한 희망이 믿음이 없다면 처방전도, 의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습니다.
 
약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의사를 만나게 되고 처방전도 받게 됩니다. 제가 살면서 바랐던 것은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였습니다. 죽으면 구원될 수 있다는 의로움,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없이 살고 싶어서 기쁨과 평화를 원했습니다. 행복을 원한 것입니다. 성당을 다니며 어느 정도는 이런 것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사.시.를 읽으며 더 큰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런 책을 읽을 때 나에게 들어오시는 성령의 힘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신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베푸시는 성령의 맛으로 우리를 당신께 이끄십니다. 그러나 행복이 성령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 가겠습니까? 약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처방전을 주는 의사도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의사는 욕해도 약은 욕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뮤지컬 ‘라만차의 기사’에서 돈키호테는 산초를 시켜 자신의 마음을 편지로 알돈자에게 전해줍니다. 알돈자는 사실 둘시네아, 곧 자기 나라의 공주란 내용입니다. 알돈자는 그것을 그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산초를 믿지 않더라도 그 편지 내용만이라도 믿는다면 그 편지를 보낸 돈키호테를 믿게 됩니다. 

하지만 편지를 믿지 않으면 그것을 가져온 산초도 믿지 않는 것이고 심지어 그 편지를 산초에게 보낸 돈키호테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돈키호테는 하느님 아버지, 산초는 성자, 편지는 성령이 되십니다. 

성령을 거부하면 다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마음의 평화를 원합시다. 그러면 성령을 만나게 될 것이고 성령을 만나면 그분께서 오시는 원천은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을 만나지 못하면 그리스도가 의미를 잃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게 전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탄은 끝장이 난다.

 

어느 정신과 전문의 고백을 책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전문의는 마음이 아픈 사람을 만나 상담하지만, 정작 자신의 부부 간 갈등을 풀 수가 없었습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라는 말처럼, 다른 사람 마음의 병은 고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문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정말로 맞지 않는 관계일까를 수도 없이 고민하면서 이혼까지 생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부부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자기 부부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가 운전하고 자신은 보조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친구 아내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지요. 그런데 과속 방지턱을 지나갈 때 친구가 브레이크를 늦게 밟아서 차가 덜컹거린 것입니다. 뒷좌석의 친구 아내는 크지는 않지만 “아이쿠”라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때 친구가 아내에게 “괜찮아?”라고 말하더랍니다. 
 
정신과 전문의인 자신은 아내에게 “괜찮아?”라는 말 대신 평소에 “왜 놀라? 뭐 이런 걸 가지고 놀라? 이게 놀랄 일이야?” 등의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로 상대의 감정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판단적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감정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자기감정만이 아닌 상대 감정을 존중하고 헤아리며 말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배려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정작 감정을 외면할 때가 많았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기감정만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자주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즉, 제일 먼저 보신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을 당신의 모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 특히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율법 학자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옳다는 기준으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메이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게 이렇게 판단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고, 자기감정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것을 이끌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정과 격려다.

- 찰스 쉬압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끝장이 난다.

 

잠시 지나가는 삶이 너무 복잡합니다.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이 모든 것은 흔들리는 마음따라 마구마구 더 흔들립니다. 아무도 믿지 않으면서 구원을 바라는 어리석은 모순으로 가득찬 우리들 마음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이 주님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마음의 모양새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사람의 길과 사탄의 길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멸망과 몰락의 길을 자초하는 분열의 모습입니다. 일치와 화합을 떠난 말들은 언제나 갈라서고 쪼개어지는 아픔으로 되돌아옵니다.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것은 성령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최후를 맞이한 수 많은 분열들의 실상을 봅니다. 성령을 통하여 일치하는 법을 배웁니다. 

일치를 위한 마음의 치유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일치가 시작되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깊어갈수록 분열과 멀어집니다. 뜨겁게 뜨겁게 모든 것을 버리고 일치를 위해 온 생을 바치신 예수님의 길이 분열된 우리의 마음을 밝힙니다. 

한 송이의 꽃이 활짝 피어나는 기적을 바라보면서도 감탄할 줄 모르는 우리들입니다. 복잡한 마음이 아닌 성령께 이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은총 가득한 화합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일치는 흩어진 이들을 하나로 모으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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