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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1/19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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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2024년 1월 19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마르코복음 3장 13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마르코복음 3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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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 3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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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무엘기 상권 24,3-21)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

  • 오늘 복음
    (마르코복음 3,13-19)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월 19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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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마르코복음
3장 13-19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1월 19일 05:00
양두승 미카엘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10:51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재덕 베드로 신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오늘 복음 말씀 가운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스 말 성경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려고, 그리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려고,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고,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열두 사도를 뽑으신 목적이 세 가지, 곧 예수님과 함께 있음, 파견과 복음 선포,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짐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문장의 논리상 파견과 복음 선포 그리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는 목적은, 첫 번째 목적인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제자로 뽑으신 열두 명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글도 모르는 어부들과 세리, 열혈당원까지, 그들이 보기에 대부분 죄인들을 모아 놓았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네.’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통하여 사도로 변화됩니다. 특히 사도행전은 이들 안에서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두 번째와 세 번째 목적이 모두 이루어졌음을 증언합니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함께 박해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언하는 복음 선포자로 변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사람들로 변합니다(사도 5,16 참조).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 주는 은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의 봉사자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먼저 성체 앞에 머무는 시간을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 힘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얇은 귀 두꺼운 귀

 

어제 사울은 “주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라고 결심하고 요나탄에게 약속했지만 오늘 그 마음이 바뀌어 죽이려 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마음이 자꾸 바뀌는 것인데, 사실 인간의 결심이라는 것이 그리 항구하지 않고 자꾸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서약을 하는 수도자들에게 결심하지 말고 서약하라고, 서약도 인간에게 하지 말고 하느님께 서약하라고 강론에서 충고합니다. 

그렇지요. 결심은 혼자 하고 약속은 둘이 하는 거지요. 그러니 혼자 한 결심은 언제고 자기 마음대로 깰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약속은 일방적으로 깰 수 없고,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깰 수 있는 건데 사람 간에는 혹 약속을 헌신짝처럼 깨어버리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의 서약은 하느님과 약속이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사울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느님께 항구한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입니다. 

어제 결심한 대로 사울 안에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면 죽이지 않는데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게 되면 시기심과 증오심이 되살아납니다. 

그런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느님이 살아 계시면 인간적인 악감정은 죽어버리고, 하느님이 죽어계시면 인간적인 악감정은 되살아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왜 이렇게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되고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항구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오늘 다윗의 말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이것이 없다면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라는 이름으로 열둘을 지명하십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유다 이스카리옷이란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끝내 예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입장에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 같이 출발했는데 어떤 이들은 진전이 있고 어떤 이들은 멸망에 이를까요? 당연히 목적지를 향해 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기하다 넘어지는 사람처럼 목적 없이 달리다가는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 끌어내리게 됩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자신을 보고 쫓아올 수 있도록 길을 내며 목적지를 향해 달려야 합니다. 

유튜브 지식인사이드에 ‘40년째 운동하는 80세 할머니’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남들이 먹는 혈압약이나 당뇨약, 고지혈약, 골다공증약 등의 성인병 약은 입에도 안 대는 것은 물론 “감기, 몸살 한번 없었어요!”라고 말합니다. 

할머니는 어느 날 걷기 힘든 증상을 느꼈고 병원에 갔더니 협착증이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전동휠체어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의사는 “근육이 감소해서 그러니까 근력운동을 좀 하세요.”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근력운동은 생각도 못 했었는데 한 달을 하니까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이 절실함이 보디빌딩 대회에서 시니어부 우승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헬스클럽 관장님이 대회에 나가라고 했을 때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기는 했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도 도전하는 거 좋아하니 일흔다섯에 시작해도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엔 비키니를 입는 것도 창피했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려고 마음먹고는 개인 트레이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 세 시간 식당 알바를 하며 비용을 충당했습니다. 

만약 이 할머니 보디빌더를 그분의 부모님이 보고 계시면 마음이 어떨까요? 기쁠 것입니다. 당신들이 준 몸을 끝까지 잘 가꾸고 누구보다 더 잘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도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좋아하실 리 없습니다. 

혼다 자동차 주식회사의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는 자동차와 엔지니어링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꿈을 꾸었습니다. 성공을 향한 그의 여정에는 여러 가지 도전과 역경이 있었지만 그는 인내와 혁신, 끊임없는 비전 추구를 통해 이를 극복했습니다. 그는 회복력과 미래 지향적 사고방식으로 역경에 맞서 혼다를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이끌었습니다. 

혼다는 “꿈을 가질 것, 끊임없이 도전할 것,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꿈을 단념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그는 “도전하고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라고 충고합니다. 

성공이 있기까지는 99%가 실패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인간의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고, 있다면 그건 근성의 차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행력입니다. 해 보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소명을 사는 삶이 아닙니다. 소명이 나를 창조한 이가 있고 불러준 분이 계심을 믿는 증거입니다. 

누구나 다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유다는 장기적인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노력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오르지 않고 타인도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소명 의식이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 특별히 나의 삶에 책임을 지려는 노력입니다. 

신학생 때 같은 반 학생에 저에게 “형, 다른 사람들은 쓰러지는데 형만 혼자 1등으로 도달하면 예수님이 기뻐하실까? ‘다른 친구들하고 왜 함께 오지 않았니?’라고 하지 않으실까?”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가 올라야 나를 보고 다른 이들도 오릅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절벽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빠르게 오르는 신앙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장 아랫부분에서 서로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자신도 오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진보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영성의 발전으로 나아가는 일은 우리 사명입니다. 무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때 그 부르심을 주신 분께 대한 사랑의 보답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학창 시절에 부러운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과연 어떤 친구를 부러워했을까요? 공부 잘하는 친구, 운동 잘하는 친구, 그림 잘 그리는 친구, 노래 잘 부르는 친구, 춤 잘 추는 친구…. 사실 이런 친구에 대해서는 그렇게 부럽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부러웠던 친구는 모발이 얇은 친구입니다. 
 
저의 머리카락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완전한 직모입니다. 별명도 머리카락에 관계되는 것뿐입니다. 돼지털, 빗자루 등입니다. 완전히 뻣뻣한 직모인 머리카락을 넘겨 가르마를 만들 수 없었고, 조금만 길어지면 사정없이 뻗치는 머리카락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스포츠머리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싫어했기에, 모발이 가늘어서 자유자재로 머리 스타일을 만드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하지만 요즘 학창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너의 머리카락이 너무 부럽다.”라며 이야기합니다. 당시의 가는 모발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들 대부분 머리카락이 거의 없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제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리곤 했는데, 이제는 반대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미장원에 가도 “머리카락 숱도 많고, 모발이 이렇게 튼튼하니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콤플렉스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이제는 자랑할 수 있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으로부터 나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훌륭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만족스럽지 않은 자기 모습도 언젠가는 만족스러워지지 않을까요?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포기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히 실망할 삶이 아닌 감사할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함께할 제자 열둘을 뽑으십니다. 그들을 뽑으신 이유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제자들의 모습이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이 어부였고, 세리도 있고, 열혈당원도 있습니다. 능력이 많은 유능함과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곧바로 뿔뿔이 흩어진 것만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부족하고 나약함이 가득한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후에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들 중에 유일하게 포기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요. 자기를 이끌어 줄 주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포기와 좌절에 가까이 가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기쁘게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자유란 주어진 상황 안에서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 장 폴 샤르트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불러주셔서 고맙고 예수님께서 함께하여 주셔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더 멋진 삶을 살고픈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를 받아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으십니다.

가장 맑은 만남은 다름아닌 하느님과 우리자신의 만남입니다. 있어야 할 우리들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지내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전혀 어색하거나 전혀 아깝지 않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함께 지내는 법을 몰랐기에 함께하는 행복도 몰랐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이 여정이 가장 좋은 복음의 여정입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와 함께 숨을 쉬고 함께 움직입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부르심이 시작된 곳에서 사랑을 배웁니다. 사랑이란 우리가 더 많은 일들에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지내는 가장 큰 행복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고 계신 곳에서 함께 지내는 가장 큰 사랑이 우리 부르심의 목적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것이 복음 선포이며 가장 건강한 복음의 권한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 여정이 가장 큰 우리의 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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