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야자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라.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우거지리라.
하느님, 복된 안토니오 아빠스가 광야의 은수 생활로 하느님을 섬기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의 모범과 전구로 저희 자신을 버리고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2024년 1월 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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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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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이 열려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 (1사무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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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기 상권 17장 37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무엘기 상권 17,32-33.37.40-51)
다윗은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필리스티아 사람을 눌렀다. - 오늘 복음
(마르코복음 .3,1-6)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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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마르코복음
3장 1-6절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1월 17일 05:00
김윤욱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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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재덕 베드로 신부
구원을 체험하게 하는 믿음은 다윗과 같은 믿음이다.
제1독서에서 다윗은 골리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다윗의 무기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시편 23(22)편을 살펴보면 다윗이 하느님에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4절).
다윗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믿음을 가졌고, 절대로 이길 수 없어 보이는 골리앗을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로 쓰러뜨립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믿음으로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시대에 ‘열심인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열심’으로 이웃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데 익숙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계명과 규정을 철저히 지켜야만 함께 계셔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죄인이며, 비난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구원을 체험하게 하는 믿음은 다윗과 같은 믿음입니다. 계명과 규정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하여 주는 특별한 은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처럼 ‘지키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은 계명과 규정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이웃들을 심판하고 싶은 마음, 비난하고 싶은 마음, 죄인으로 단죄하고 싶은 마음이 자라게 될 뿐입니다. 오늘 하루는 ‘지키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된다.’는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마음’으로 계명과 규정들을 대하여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 장애를 보며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오늘 주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 세웁니다. 사람들 가운데 중심인물 곧 주인공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한 번도 이렇게 중심에 서 본 적 없는 그로서는 얼떨떨하기만 할 것입니다.
그런 그와 주님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한 번도 이런 장애인을 중심에 세운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늘 자기가 중심이고 이런 사람들을 가장자리로 몰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장애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을 겁니다. 자주, 아니, 한 번만이라도 그 고통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장애인들의 수십 년 고통에 이렇게 매몰차고 가혹하지 않았을 것이고, 고쳐주시는 주님을 안식일을 운운하며 죽이려고 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이들은 안식일이 아니라 평일에도 장애인들의 고통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고, 주님께서 안식일이 아닌 평일에 고쳐주셨어도 잘하신 것이라고 주님을 칭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불편을 보지 못하는 사랑 장애를 이들은 가지고 있는 겁니다. 제 생각에 이 사랑 장애가 육신의 장애보다 훨씬 불행한 장애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그들에 대해 분노하시면서도 다른 한편 슬퍼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셨다.”
저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자주 분노하거나 가여워할 때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거나 오히려 먼저 자리를 차지할 때, 다른 이의 통행을 불편하게 하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 어떤 때는 분노하고 어떤 때는 그들의 영적 장애와 사랑 장애에 가여워합니다.
저의 사랑이 부족할 때는 분노만 하고, 저의 사랑이 차올라있는 상태일 때는 그들의 미래 불행을 내다보며 가여워합니다.
그렇게 사랑할 줄 모르고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의 미래가 뻔히 보입니다. 불행해지라고 제가 저주하진 않지만 불행해지는 그들을 저는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내 저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밖 곧 남을 보다가 안 곧 나를 보는 것이지요
나는 내 가운데 그들을 세우고 있는가?
그들의 고통이 내 안에 있는가?
그들이 저의 중심에 있지 않고 제가 저의 중심에 있지요. 흔히 하는 말로 자기중심적인 저이지요. 그러니 주님처럼 그들을 공동체 한가운데 세우지도 않습니다. 공동체 가장자리에 있는데도 가운데 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 장애를 저와 우리 공동체 안에서 보고 슬퍼하며 반성하는 오늘 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아집의 우상에서 벗어나는 길: 행복의 변덕쟁이가 돼라.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지, 않는지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분을 고발하여 죽이는 것이 그들 목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지, 죽이는 것이 옳은지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안식일 법이 사랑의 실천을 위해 있음에도 그들의 잘못된 의도가 율법의 참 목적을 잃게 했습니다.
머리는 마음의 종입니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머리는 성취하도록 도와줍니다. 마음이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면 머리는 어떻게 물을 마실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물을 살 것인지, 수도에서 받아서 마실 것인지 등. 율법은 머리 차원입니다. 마음이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바란다면 아무리 좋은 율법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래도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야 하는 사실은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집에 사로잡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들 생각만이 옳지 다른 옵션은 없습니다. 아집은 우상입니다. 자아의 생각이 마치 신의 생각처럼 옳다고 믿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옵션도 있음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집의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제가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누군가의 잘못으로 넘어지게 되었고 머리를 땅에 부딪쳤습니다. 아파 죽겠는데 친구라는 녀석들은 웃고만 있었습니다. 너무 분하고 아파서 마구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 놀라서 저를 집 마루에 누이고 빙 둘러서서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잘 됐다 싶어 더 크게 계속 울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 머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는 것을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일어섰다가는 엄살 부렸다고 창피를 당할 것 같았습니다. 함께 놀던 제 친형을 비롯한 친구들은 저를 달래는 것도 지쳤는지 울고 있는 저를 혼자 두고 다들 다시 놀러 나가버렸습니다.
아프지 않은데 억지로 우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습니다. 저는 울음을 그치고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밖으로 나가 놀자니 창피하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자니 외로웠습니다.
아프지도 않은데 우는 아집은 왜 생겼을까요? 아프지 않으면 울음을 거쳐야 함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결국엔 세상과 단절되어 외로워지는 길뿐입니다. 아집에 사로잡힌 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집에 사로잡히면 행복을 잃음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을 위해 더는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아야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단에 빠졌지만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 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한 친구가 이단 종교에 빠져서 많은 재산을 날렸습니다. 나중에 그분이 모든 것을 잃고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 친구에게 아직도 거기서 말하는 것을 정말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대답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믿었고, 지금은 안 믿어. 근데 이젠 쪽팔려서 못 나가.”
자신이 가는 길이 나락을 향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방향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사실은 적지 않게 있습니다. 아집의 우상에서 벗어나려면 행복을 향한 끊임없는 선택의 연습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려면 조금은 변덕스러워지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나의 판단이 항상 옳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조지 포먼은 길거리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깡패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권투를 시작했고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만에 무하마드 알리에게 패하고 맙니다. 그는 알리와 다시 싸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그를 망가지게 했습니다. 또 다른 패배 직후 죽음직전까지 가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는 새로운 체험이었습니다. 졌는데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안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겨야만 행복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고 10년 넘게 쉬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권투를 다시 시작합니다. 이제는 이기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행복에 집착합니다. 그러니 자신도 알리처럼 약게 경기를 운영할 줄 알게 됩니다. 결국 45세의 나이에 다시 세계 챔피언이 됩니다.
행복의 변덕쟁이가 됩시다. 한 곳만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이 아집입니다. 자아는 변덕쟁이가 되지 말고 한 우물만 파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두 개의 선택 중 하나를 선택하고 어떤 선택이 더 큰 행복으로 이끄는지 정보를 수집해야 합니다.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덜 적게 실패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의 취침 시간은 보통 저녁 9시입니다. 남들은 “아니, 어떻게 이 시간에 잘 수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일찍부터 이런 습관이 들어서 9시 이후에는 눈이 저절로 감깁니다. 하긴 어렸을 때에는 텔레비전 9시 뉴스 전에 이런 멘트가 흘러나왔던 것이 기억납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등화관제도 있었고, 야간 통행금지 시간도 있었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밤낮으로 일하고 또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해가 지면 뇌가 쉴 수 있었지만, 현대는 끊임없이 뇌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분명히 많은 부분에서 편해졌고 풍요로워졌어도 지금은 항상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이렇게 다양성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안에서 주님 안에 머무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야 세상 안에서 염려와 힘듦을 주님 안에서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힘을 믿고 그 안에 머무는 이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필리 4,6)
‘아무것도’라는 말에 머물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문장을 현재형으로 썼습니다. 지금 걱정에 갇혀 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걱정과 불안 속에 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엄격한 율법의 틀 안에서 힘들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가볍게 해주십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에 관한 규정에 묶여서 해야 할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안식일이 사람을 옭아매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고 인간을 살리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안식일 규정을 스스로 어기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만 찾고 있으며, 실제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까지 합니다. 헤로데 당원은 유다인들의 반대편에 서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보다는 로마에 구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보면 바리사이들과 반대편에 서 있었지만,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마음에 같은 편이 되고 맙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특히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함께해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다시 성하여진 것처럼, 우리의 오그라든 마음도 주님을 통해 쫙 펴져서 주님께 찬미의 감사를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자신의 작은 자아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전체와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삶을 꾸려 가는 것이다.
- 헬렌 니어링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은 오그라들고 웅크린 마음을 펴듯 힘차게 다시 주님께 손을 뻗는 용기의 순간들입니다. 어떠한 삶이 용기있는 삶인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첫번째, 일어나 가운데로 나오는 것입니다. 둘째, 두려움 가운데서도 주님 말씀에 따라 우리가 주님께 손을 뻗는 것입니다. 이렇듯 말씀을 믿는 용기이며 말씀을 믿고 실행하는 용기입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을 깨뜨린 이들만이 맛보는 새로운 치유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수 많은 용기의 순간들이 바로 온전한 자유의 순간들입니다. 용기를 내어 주님께 손을 뻗는 특별한 새날입니다.
손을 뻗어야 주님과 함께 손을 마주 잡을 수 있습니다. 손을 뻗어야 우리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 맡겨야 다시 온전해질 수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뻗어가는 감동 뻗어가는 감사입니다. 마음을 뻗어야 쏟아지는 주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그라든 삶이 다시 펴지는 기쁨 뒤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십니다. 오그라든 우리들의 마음과 안식일의 마음을 사람을 살리는 합당한 마음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은총의 주님이십니다. 은총을 받고 용기를 내어 다시 뜨겁게 온전해지는 주님과 우리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건강한 관계처럼 다시 성하여지는 건강한 실행입니다. 손을 뻗어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마음이 안식일의 참된 마음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사람을 살리는 은총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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