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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1/15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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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2024년 1월 15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코복음 2장 22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코복음 2장 22절) 성경말씀카드 마르코복음 성경구절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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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 2장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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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무엘기 상권 15,16-23)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코복음 2,18-22)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월 15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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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마르코복음
2장 18-22절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1월 15일 05:00
최영진 그레고리오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8:04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재덕 베드로 신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진심으로 들을 때, 그 사람의 말은 우리 생각에 영향을 주고, 생각이 바뀝니다. 그렇게 되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삶의 방향도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하느님 말씀을 진심으로 듣게 될 때, 우리 안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나만 생각하는 마음이, 나밖에 모르는 마음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말씀이 우리 생각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고, 우리의 행동은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신비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은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 하느님 말씀이 살아 계시는 장소, 하느님께서 구원하시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바뀝니다. 삶 전체가 살아 있는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 삶은 언제나 우리를 “헌 가죽 부대”로 남아 있게 만듭니다. 신앙생활이 점점 짐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희생과 용서와 나눔을 실천하여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면, 신앙생활 자체가 괴롭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은 힘을 점점 잃어가고 결국 하느님을 떠나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한 가지 꼭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될 때, 말씀은 하느님의 새로운 은총을 언제나 충만히 받아 낼 수 있는 “새 부대”로 우리를 변화시켜 줍니다. 오늘 하루는 하느님 말씀을 듣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모두가 행복할 그리고 하느님이 좋아하실

 

오늘 독서에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단식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는데 사무엘 어법대로 바꿔 얘기하면 이런 말이 되지 않을까 저는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단식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요한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처럼 단식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달리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이 무엇인지 늘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거나 기껏해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할 것을 하며 삽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사는 것은 자기애 곧 자기 사랑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할 것을 하며 사는 것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 아니고, 아직 하느님 사랑에 미치지 못한 사랑이기에 아직 완전하지도 완성되지도 못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것을 하면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두 완성하게 하기에 완전한 사랑입니다. 

우선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자기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자기 사랑이 자기밖에 사랑치 못하는 것과 달리 자중자애 곧 자신을 진정 소중히 여기고 제대로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 사무엘기를 보면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구차한 짓을 한 사울을 사무엘이 이렇게 나무랍니다. 

"임금님은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여기실지 몰라도,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아니십니까? 주님께서 임금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이스라엘 위에 임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는 즉시 어제 2독서였던 코린토 1서의 바오로 사도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성령의 성전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자기 사랑이고, 나를 진정 자중자애하는 사랑이고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이웃 사랑은 진정한 이웃 사랑이 아니기 십상이고, 그래서 자기를 진정 사랑하게 하거나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십상이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잃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나 어쩌나 눈치나 보는 사랑이기 십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이웃 사랑은 당당합니다. 나도 성령의 성전이요 너도 성령의 성전으로 사랑하고, 이웃이 좋아할 일이 아니라 이웃이 행복할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일은, 기실 하느님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너와 내가 모두 행복할 일을 하느님 안에서 하는 것인데 

오늘 우리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해야겠습니다. 

뜻하지 않게 많은 분을 염려케 해드렸습니다. 강론이 올라오지 않아 많은 분이 저 때문에 걱정하셨는데 아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 안 되어 강론을 올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걱정을 끼쳤음에 죄송하고, 문자 주셨는데 일일이 답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꼬박꼬박 강론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확실히 설명해드립니다 .

 

오늘 복음은 소위 ‘단식 논쟁’입니다. 이는 단순한 단식 논쟁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논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이 있는데, 신약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왜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율법보다 앞서시고 당신이 아니면 율법은 지켜질 수 없는 것이었음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은 확실히 좋은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율법도 좋은 것이지만, 그리스도 없이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계약에 심취한 이들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는 명제로 유명합니다. 그가 타인은 지옥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 것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출구 없음’(No Exit)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출구 없음’의 연극 대본을 봅시다. 

설정은 신비한 방으로, 주인공들이 죽음 이후 일종의 사후 세계 역할을 합니다. 이 방은 거울, 창문 또는 탈출 수단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 명의 캐릭터가 소개됩니다.

‘가르생’은 언론인이자 평화주의자입니다. 가장 먼저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을 영웅이자 순교자로 소개하지만, 실상은 겁쟁이요 배신자였습니다. 다음 ‘이네스’가 등장합니다. 레즈비언 우체국 직원인 그녀는 교활하고 잔인했습니다. 마지막 ‘에스텔’은 외모에 관심이 많은 상류층 여성으로 가장 늦게 도착합니다. 그녀는 연인과 자신이 낳은 아기를 죽인 사실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전생과 저주받은 이유를 천천히 드러내면서 연극이 전개됩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얽히면서 드라마는 더욱 강렬해지고,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합니다. 가르생은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방을 떠나고 싶어 하고, 이네스에게 자신이 영웅처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레즈비언인 이네스는 에스텔을 유혹하려 합니다. 에스텔은 유일한 남성인 가르생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필사적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소용이 없었고 끊임없는 좌절과 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극은 등장인물들이 영원히 심리적 고통 속에 갇혀 서로나 자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출구가 없다면 이러한 자기와 타인의 지옥 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르트르는 이를 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방에 창문이 있었다면, 그 창문 밖으로 아름다운 세상이 보였다면 어떨까요? 그곳에 대한 희망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을 희생할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봉쇄 수도원이 그렇습니다. 희망이 있으니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함께 창밖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둘이 서로만 바라본다면 둘은 타버립니다. 부부도 자녀를 키우면서 사랑을 확장해야지 자신들 안에만 갇혀있으면 타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창문이 되어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약 그분이 죽음과 부활로 사랑으로 인해 도달하게 될 저 세상을 창문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피조물의 본성상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에 투신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희망 없이는 사랑으로 목숨을 바치는 게 불가능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신약에 와서야 완성됩니다. 부부 갈등을 겪다가 공공의 적을 만나 함께 싸우다가 다시 부부관계가 좋아진다는 설정의 ‘미스터 앤드 미세스 스미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둘이 서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며 걷는 것입니다. 

부부도 자녀를 낳지 않고 자신들만의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려고 하면 결국엔 사랑이 소진됩니다. 사랑은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사랑에 그리스도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을 하면 어디로 나아가게 되는지 보여주는 닫힌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창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먼저 읽어야 한다.

 

언젠가 어떤 분으로부터 ** 책을 읽어봤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워낙 유명한 책이었지만 읽지 않았던 책이어서,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그분의 표정에서 실망이 느껴집니다. 책을 많이 읽었다면서 이 책도 읽지 못했냐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솔직히 약간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돈키호테 읽어보셨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당연히 읽었죠. 초등학교 때 이미 읽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다 읽은 분을 보기 힘듭니다. 어린이들이 읽는 ‘돈키호테’는 전문이 아닌 극히 적은 내용만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 돈키호테는 전체 두 권으로 되어 있으며, 그 분량은 권당 700페이지가 넘습니다. 그래서 그 두께에 질려서(또 상당히 지루하기도 합니다) 곧바로 포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분은 돈키호테를 읽었다고 하셨지만, 사실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지요. 세상에 얼마나 많은 책이 있습니까? 유명한 책이라 해도 읽지 않을 수도 있고, 읽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이 판단은 주로 비교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비교하면서 자기 판단이 옳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은 절대 옳지 않습니다. 비교 자체가 잘못되는 경우도 많아서, 그 판단은 더 힘을 잃습니다. 특히 주님을 향한 우리의 판단이 얼마나 많은가요? 주님의 이끄심이 잘못되었다면서 불평불만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시에 단식하는 이유는 단순히 유다교 전통을 준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단식하는 사람은 열심한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께 열심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예수님과 예수님 제자들은 형편없는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며 못마땅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무조건 단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십니다. 먼저 단식의 의미를 알아야 하며, 그래서 단식을 언제 하고 언제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 안에 담겨 있는 기쁨과 희망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우리는 먼저 읽어야 했습니다. 그 모습이 자기 판단에 맞지 않다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잘못된 판단에서 벗어나서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의 고정관념이 헌 옷이며, 헌 가죽 부대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새 옷, 새 가죽 부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은 축복받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이미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그 순간에 말이다.

- 브라이언트 맥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우리를 주님의 잔치에 기쁘게 초대하십니다. 참된 잔치와 참된 단식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혼인 잔치도 신랑을 빼앗기는 아픔의 단식도 모두 예수님을 향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잔치와 단식은 모두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뒤 따르면서 어느새 자리가 바뀐 우리 모습을 보게됩니다. 새 포도주가 있기에 새 부대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머물 수 없는 사람은 십자가의 고통에도 머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께 순명할 수 없는 사람은 포도주도 부대도 스스로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루를 사는 일들이 마치 잔치이며 단식입니다. 숨 쉬는 모든 것이 잔치의 선물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거짓으로 무거워진 우리 영혼을 새롭게하는 단식도 주님의 가장 좋은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구원이란 담아야 할 새 포도주와 함께 이 길을 기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담아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과 거품처럼 터뜨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잔치의 기쁨은 단식의 지혜를 내포하고 있으며 단식도 잔치도 그 중심에는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 중심에 모시지 않고서는 끝까지 갈 수 없는 구원의 여정입니다. 새롭게 담아야 할 새날 새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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