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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1/14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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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2024년 1월 14일 연중 제2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주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요한복음 1장 39절)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요한복음 1장 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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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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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무엘기상권 3,3ㄴ-10.19)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 제 2독서
    (코린토1서 6,13ㄷ-15ㄱ.17-20)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 오늘 복음
    (요한복음 1,35-42)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월 14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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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우리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만났네. 은총과 진리가 그분에게서 왔네.

 

 

요한복음
1장 35-42절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1월 14일 05:00
이영제 요셉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5:29

 

 

 

가톨릭 스튜디오 주일미사

 

 

2024년 1월 14일 11:00
원당동성당 이병근 대건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2:26

✚ 강론시작 20:23

 

 

 

성필립보생태마을 주일미사

 

 

2024년 1월 14일 17:00
다볼사이버성당 정경민 세례자요한 신부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재덕 베드로 신부

 

듣는 마음

 

예수님을 향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 한마디가 놀라운 일을 일으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묵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이 하나 발견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른 시간이 제자들 안에서 그분에 대한 새로운 증언이 이루어지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 베드로에게 찾아가 예수님에 대하여 새로운 증언을 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고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처음 두 제자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베드로는 예수님께 ‘와서’ 그분을 ‘보고’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가집니다.

미사 때마다 듣는 복음 말씀에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일으킨 것과 같은 힘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가고, 그분 안에 머물게 하여 줍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이웃들을 향한 새로운 증언이 터져 나오게 합니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듣는 마음’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하느님께 이 말씀을 드리기 전까지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시기만 하셨습니다.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과 참된 관계가 시작됩니다. 복음도 우리가 듣는 마음으로 대할 때, 놀라운 힘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예수님과 매우 특별하게 결합되어 있는,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성령의 성전”입니다. 듣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 몸은 이제 죄만 저지르는 장소가 아니라, 이 특별한 결합의 신비를 드러내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누군가에게 새롭게 증언하게 되는 장소로 바뀔 것입니다. 들음으로써 예수님께 와서 그분을 보고 그분 안에 머무는 주일, 우리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증언이 이루어지는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메시아를 진정으로 만날 때 일어나는 일

 

죄의 원인은 한 마디로 ‘불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주시러 오신 것이 ‘평화’입니다. 미국에서는 건전하게 살던 청년들이 베트남 전쟁 때 20% 정도가 헤로인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쥐 실험에서도 쥐 한 마리를 가두어두고 일반 물병과 마약이 든 물병을 두면 대부분 쥐는 약물이 들어있는 물병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1970년에 심리학자 브루스 알렉산더는 쥐가 과연 마약에 중독된 것인지, 환경 탓인지를 고민하여 새로운 실험을 합니다. 그는 인턴으로 일할 때 만났던 한 환자를 떠올렸습니다. 그 환자는 크리스마스 때 쇼핑몰에서 산타클로스 분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가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자기에게 맞지 않았던 그는 헤로인의 힘을 빌려 무대에서 여섯 시간 동안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중독은 중독 자체가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쥐들의 천국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놀이기구들과 친구들, 짝짓기도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쥐들은 약물이 든 물을 섭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베트남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어땠을까요? 미국으로 돌아온 군인들은 95%가 자발적으로 헤로인을 끊었습니다. 헤로인으로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제 아주 자명합니다. 천국을 만나면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는 천국을 맛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두렵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고 상처받을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제자는 예수님께 ‘선생님’이라 부르며 묵으시는 곳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묵은 다음에는 동료들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외칩니다. 그들에게 천국이 시작된 것입니다. 

TVING에서 방영된 ‘이재, 곧 죽습니다’는 우리가 메시아를 만나는 과정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 최이재는 대기업 입사 면접을 보러 갈 때 차에 치여 자살을 한 남자가 죽어가며 자신을 부여잡는 바람에 면접을 망칩니다. 7년간 갖은 고생을 하며 다시 도전하곤 했지만, 월세도 내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애인 앞에서도 더는 당당할 수 없어서 헤어지자고 하고 “죽음은 내 고통을 끝내주는 수단일 뿐!”이라고 하며 빌딩에서 뛰어내립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지만, 늦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납니다. 자기를 ‘죽음’이라고 말하는 한 여자를 만납니다. 그는 죽음을 한낮 자기 고통을 끝내는 도구로만 여긴 최이재에게 벌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두 번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살게 합니다. 다양한 삶을 겪으며 그는 모든 삶은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심지어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니 누구도 자신의 희생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자신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비참함 속에 가장 비참한 한 가장의 몸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열한 번째 몸도 빨리 끝내버리려고 도로로 뛰어듭니다. 그때 죽어가며 7년 전의 자기가 걷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손을 붙잡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저주했던 그 사람이 바로 죽음을 하나의 고통을 끝내는 도구로만 여겼던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열두 번째는 엄마의 몸으로 들어갑니다. 엄마가 자기를 키우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리고 자기 죽음으로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깨달으며 죽음 앞에서는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엄마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만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주님을 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교만하니 사람을 대하기가 두려웠고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나의 비참함을 깨닫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 신학교는 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게 되자 신학교는 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스트레스가 적으니 그 환경에서 오는 행복을 빼앗는 죄는 멀리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외치고 싶다면 죽음과 같은 존재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고, 생명 자체이신 분 앞에서 ‘무’(nothing)이 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에서 벗어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어느 신부님께서 쓰신 책을 읽다가 신부님의 목표가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조금 이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고해성사를 가장 잘 주는 사제가 되는 것.” 
 
아니 사제가 당연히 고해성사를 잘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잘 준다는 것이 무엇인가도 의문이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런 목표를 갖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으셨습니다. 
 
보좌신부 때 판공성사를 주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판공성사이기에 많은 사람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한 여학생이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는 “뒤에 사람이 많으니까 다시 준비해서 들어오세요.”라고 차갑게 말했습니다. 
 
문제는 이 여학생이 다음날 자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신부님은 심한 가책을 느끼게 되었고 죄책감에 사제 생활을 그만둘 생각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너무 미안한 마음에 직접 찾아가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때 이 여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 그렇게 미안하면 앞으로 조금만 더 고해성사 잘 주는 신부님이 되어주세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기 사제 생활의 목표를 대한민국에서 고해성사를 가장 잘 주는 사제가 되는 것으로 정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누구는 이 사건으로 좌절에 빠져서 포기하는 반면에, 또 누구는 더 나은 자기로 변화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또 다른 부르심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요한의 두 제자가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물었고, 주님은 “와서 보아라.”라고 답변하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께서 직접 불러야만 가능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과 함께 머물고 그분을 따라가야겠다는 자기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직접 가서 보아야 했습니다.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결단이 그리고 자기의 적극적인 변화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삶 안에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결단이 계속 요구됩니다. 절대로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은 두 사람이 계속 서로만 쳐다볼 때가 아니라, 자신들을 넘어서 편협하지 않은 공동의 목표를 바라볼 때 오래도록 생존한다.

- 엘루셰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와서 보아라.

 

환희와 희망으로 가득찬 복음이 있습니다. 때와 장소도 어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낯선 삶으로의 초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깨달음도 만남도 진심어린 실천의 또 다른 이름들입니다. 

사람을 바라봄에 있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진실한 시각뿐입니다. 모르는 것을 이제야 알게되는 진실한 기쁨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응답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의 것입니다. 

다시 살아있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새 날을 맞이합니다. 지금 이 자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복음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복음은 참으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삶의 본질을 회복하게 하는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서툰 만남으로 시작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아름다운 일꾼으로 사람들을 만들어 놓으십니다. 신앙의 삶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와서 보아라."는 이 말씀에서 뜨겁고 역동적인 체험을 만납니다. 가장 중요한 초석은 두말이 필요없는 예수님과의 뜨거운 만남일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아름다운 만남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삶의 복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압박하는 모든 불편함이 복음을 통하여 기쁨이 되고 은총이 되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참된 만남의 길이 진실한 복음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쁘고 행복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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