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4/01/12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 12.
반응형

 

나는 드높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네. 천사들의 무리가 그분을 흠숭하며 함께 노래하네. 보라, 그분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4년 1월 12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복음 2장 5절)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복음 2장 5절) 성경말씀카드 마르코복음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마르코복음 2장 5절

240112_오늘성경구절이미지.jpg
0.37MB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무엘기상권 8,4-7.10-22ㄱ)
    여러분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르코복음 2,1-12)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월 12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마르코복음
1장 1-12절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1월 12일 05:00
신형학 대건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8:19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재덕 베드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보지 않으신다.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두고 율법 학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구약 성경의 신학에 따르면 율법 학자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느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용서가 이제 당신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신비를 드러내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리고 뒷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도들과 교회의 사제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많은 교우가 고해성사를 부담스러워합니다. 아마도 고해 사제를 너무 의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는 오늘 복음이 선포하는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이루어지는 성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처럼, 고해소에서 사제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눈여겨봅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죄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며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고해소에서 죄를 고백할 때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보지 않으십니다. 

‘믿음’을 보시며, 사제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사람으로 만드시어 다시 고해소 밖으로 내보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하느님께서는 몇 천 번이고 이 은총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용서와 치유 중에서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중풍 병자가 죄를 용서받고 치유까지 받는 얘기인데 우리는 여기서 왜 병을 치유하면서 주님께서는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시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오늘은 그 의문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기보다 용서와 치유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자문하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냐 하면 어제 여기 밥상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제가 오늘처럼 선택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는데 사랑의 하느님과 능력의 하느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하느님을 선택해야 할지 같이 얘기 나눈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자 능력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 한분을 선택하면 두 하느님을 다 선택하는 것이 되지만 그래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사랑의 하느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왜냐면 사랑없이 능력만 있는 것을 선택한다면 악령을 선택하는 것과 진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권고 5번에서 얘기하듯 악령도 능력으로 치면 대단하기에 우리의 병을 치유해 줄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악령의 하수인이 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면 우리는 죄의 용서와 치유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이에 눈치 빠른 분들은 죄의 용서를 청해야 한다고 답하실 테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겠지요.

마찬가지로 용서가 아니라 치유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라 악령이나 의사에게 가면 됩니다. 그리고 치유만 받고 그 관계는 끝나거나 끝내도 됩니다.

우리는 병원에 가서 돈 주고 치유받고는 그것으로 끝나지요. 의사와 우리의 관계는 돈을 주고받는 관계지 사랑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려는 주님께 베드로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자 주님께서 그러면 너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게 된다고 하신 바가 있지요.

기실 우리의 모든 죄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죄이고, 그래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단절된 관계를 복원하는 것, 다시 말해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 말고도 죄의 용서를 선택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곧 건강을 위해서도 죄의 용서를 선택해야 합니다.

전에 여러 차례 말씀드린 바 있지만 건강에는 육신의 건강, 마음의 건강, 정신의 건강, 영혼의 건강이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육신이 건강하지 않을 때는 건강을 회복하려고 하고, 그래서 병을 인정하고 나으려고 하고 어떤 치유든 받아들입니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처럼 심리적인 병도 인정하고 나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신에 병이 있다거나 영혼에 병이 있다고 하면 대부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러기에 고치려고 들지도 않을 뿐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육신의 병 때문에 자살하거나 남을 죽이지는 않지만 심리적, 정신적, 영적인 병은 자살하기도 하고 남을 죽이기도 하잖습니까?

사실 많은 병은 서로 유기적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말이 있고, 뒤집으면 건강한 정신과 영혼에 건강한 육체와 마음이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관계의 회복일 뿐 아니라 영적인 병의 치유이고, 그래서 주님께 죄를 용서받을 때 우리는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될 뿐 아니라 영적인 건강을 되찾고 다른 건강도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근원 치유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치유부터 해야 하고, 영혼의 치유인 죄의 용서부터 우리는 받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미운 사람이 없다면, 이제 기적을 기대해도 좋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들것에 데려온 중풍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죄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는데 인간이 죄를 용서해주니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알게 해주겠다며 그를 치유해주십니다. 

여기에서 병의 치유나 죄의 용서는 거의 동의어로 쓰입니다. 그리고 같은 권한으로 그 일을 한다고 하십니다. 이 권한은 ‘성령’의 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동시에 타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도 지닐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도 타인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권한은 하느님에게 있기에 우리도 자녀로서 그 권한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게 무엇일까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면 기적도 기대해야 합니다. 

1993년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된 에밀 카파운(Emil Kapaun) 신부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체코 이민자의 아들로 미군 군종 장교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분입니다. 

그분은 한국 전쟁 당시 이미 성인으로 불릴 만큼 군인들의 진정한 아버지였습니다. 대피하라는 소리를 듣고도 그는 뒤에 쳐진 군인들을 구하느라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중공군 포로가 되어 1951년 35세의 나이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는 절망하는 군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가 목숨을 구한 사람 중 한 명인 허버트 밀러 하사는 부상을 입은 채 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한 공산주의 군인이 소총으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습니다. 카파운 신부는 달려가서 그 중공군을 옆으로 밀고 밀러 병장을 구해냈습니다. 

그 군인은 두 사람을 모두 죽일 수도 있었지만, 카파운 신부의 용기와 사랑에 놀라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죽음의 행진이 이어졌습니다. 낙오하거나 계속할 수 없는 사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카파운 신부는 부상자를 끝까지 부축하여 수용소까지 도착하였습니다. 그 병사는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 카폰 신부는 그 모든 병사에게 어머니와 같았습니다. 그는 배급을 보충할 음식을 얻기 위해 캠프에서 몰래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는 동료 병사들을 이질로부터 구하기 위해 물을 끓일 수 있도록 금속 조각으로 그릇을 만드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옷을 빨곤 했습니다. 그는 비밀리에 미사를 거행하곤 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동료 수감자들에게 가져다준 희망 때문에 그를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몇 시간 동안 벌거벗은 채 혹독한 추위 속에 서 있게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아프게 되자 그들은 그를 제거할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그를 죽음의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자신들의 병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군인들은 그분을 끌고 갈 때, 그분의 군사들은 울부짖으며 자기들의 사제를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항상 가고 싶었던 곳으로 갈 것입니다. 내가 거기 도착하면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들은 그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카파운 신부는 1951년에 포로 생활 중에 사망했지만, 그의 유산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의 동료 수감자 중 다수는 그의 영적 지도력과 보살핌 덕분에 자신들이 살아남았다고 여겼습니다. 그가 죽은 후, 특히 그의 도움을 간구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에게 한 기도로 기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2008년 장대높이뛰기 연습 중 사고를 당한 캔자스 출신의 대학 운동선수인 체이스 키어(Chase Kear)와 관련된 것입니다. 심각한 머리 부상에서 키어가 회복될 가능성은 의학적으로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인 키어 가족들은 카파운 신부의 중재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체이스의 놀랍고 빠른 회복은 나중의 가톨릭교회에서 카파운 신부의 하느님의 종과 시복식을 위한 기적 사례의 일부로 제시되었습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힘, 곧 성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한 기적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카파운 신부처럼 자신을 죽이는 이들도 용서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그에게 기적의 흔적도 남겨주십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여자 주인공은 사형선고 받은 남자를 살리기 위해 자기 어머니와 자신에게 못된 짓을 했던 친척 오빠를 용서합니다. 물론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통해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기적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 기적을 일으키시는 성령을 받기 위해 용서의 기적부터 일어나게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어느 신혼부부가 집들이로, 신랑이 결혼 전에 열심히 활동했던 본당 청년회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사실 이 초대는 아내가 먼저 제안한 것입니다. 젊은 시절 열심히 활동했던 남편의 친구들을 초대하면 남편이 좋아하리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마음이 집들이하면서 좋지 않아졌습니다. 남편이 특별히 청년회 안의 여성들과 유난히 친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질투인가?’라는 마음도 들었지만, 남편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았습니다. 자기는 부엌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바쁜데 도와주기는커녕 한 번도 들여다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편 친구들이 도와준다고 들어왔지만, 남편은 자기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손님들이 모두 간 후, 이 부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내가 먼저 “여자 친구들 오니까 너무 좋아하더라.”라며 빈정대듯 말했고, 이 말에 “네가 초대하라며?”라며 대꾸합니다. 남편의 말이 틀리지 않았지요. 그러나 너무 서운했고 화가 나는 등 부정적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문제일까요? 아내는 처음에 가졌던 좋은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의 호의를 대수로이 생각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둘 다 사랑 자체에 집중해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뜻을 따르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자리에 사랑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사랑을 말씀하셨고, 이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굳은 믿음을 통해서 완전해집니다. 우리 인간의 불안전한 사랑을 넘어 주님의 완전한 사랑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지붕을 벗겨서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 병자와 함께 한 사람들과 병자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병자가 낫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 학자 몇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에,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중풍 병자의 치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당신 신성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1) 
 
주님께서는 사랑이 있는 곳에 당신 사랑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다가가야 합니다. 더군다나 중풍 병자를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시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사랑으로도 충분히 이웃을 도와줄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가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책임감을 가지는 일은 사랑을 하는 연습이다. 사랑이 피어오르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 속 두려움을 마주하고, 이해하고, 끌어안고, 감당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 임경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은 특별히 우리들에게 던지는 의미가 큽니다. 우리의 믿음을 반성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나눔과 용서로 이어지는 정신의 참된 고양(高揚)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나눔이라는 소중한 역할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나눔이란 진심을 동반한 믿음과 언제나 일맥상통합니다. 믿음은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는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주고 받는 나눔으로 믿음은 자라납니다. 마땅히 나누어야 할 나눔이 용서로 변합니다. 

존귀한 연민 존귀한 믿음입니다. 존귀한 믿음은 따뜻한 마음으로 드러납니다. 따뜻한 마음은 이웃을 향한 자비와 사랑을 나누는 용서가 됩니다. 이와 같이 혼자만의 믿음은 거짓입니다. 함께 사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참된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용서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용서로 돌아가는 용서의 참된 여정입니다. 나눔으로 믿음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용서를 이루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믿음의 오늘 되십시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