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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1/11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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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높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네. 천사들의 무리가 그분을 흠숭하며 함께 노래하네. 보라, 그분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4년 1월 11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마르코복음 1장 42절)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마르코복음 1장 42절) 성경말씀카드 마르코복음 성경구절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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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 1장 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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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무엘기상권 4,1ㄴ-11)
    이스라엘은 크게 패배하고, 하느님의 궤도 빼앗겼다.

  • 오늘 복음
    (마르코복음 1,40-45)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월 11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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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마르코복음
1장 40-45절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1월 11일 05:00
권효준 탈시시오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06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재덕 베드로 신부

 

가장 절망적일 때 우리가 찾고 만나야 할 분은 예수님이다.

 

레위기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사람들이 다가오거나 누군가 자신의 주변에 있으면,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 하고 외쳐야 하였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서도 안 되고, 그 또한 누군가와 접촉하여서도 안 되었습니다. 

진영이나 도시 밖에 살아야 하는(13,46 참조) 나병 환자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경멸과 모욕하는 마음으로 그를 피하였을 것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병으로도 고통받았지만,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아마도 사람들에게서 겪는 깊은 단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는 오늘 복음에서 결코 하여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합니다. 예수님께 다가가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그를 이렇게 움직이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마음은 ‘가엾은 마음’이었습니다. “가엾은 마음”으로 옮긴 그리스 말의 어원적 의미를 보면, ‘애가 타는 마음’, ‘심장이 찢어지는 마음’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은 그분께서 나병 환자의 몸에 몸소 손을 대시게 만듭니다. 

사람들과의 단절로 상처받은 그의 마음과 영혼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나병 환자에게 정말로 필요한 말씀, 그가 생명을 누릴 수 있는 말씀을 하여 주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가장 절망적일 때 우리가 찾고 만나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체 앞에 머물 때마다 나병 환자에게 행하신 기적을 그대로 일으키십니다.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우리 영혼의 깊은 상처에 손을 대시며, 생명의 말씀과 치유의 말씀을 하여 주십니다. 성체 앞에 머물러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신비를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도의 본보기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이것은 하나의 기도다!”하고 뇌까렸습니다. 더 나아가 기도일 뿐 아니라 청원 기도의 본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 환자와 주님 간에 오간 대화는 진정 본보기로서 손색이 없지요. 

왜 그런지 한 번 볼까요?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라고 하는데 이런 대화가 오가지요.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청원 기도를 할 때 이 나환자보다 더 완벽한 청원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자기의 청을 아뢰면서도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절실하고 간절하지만 품위를 잃지 않습니다. 

나아가 이것은 청원기도라기보다는 신앙 고백이라고 함이 맞을 겁니다. 그것도 주님의 능력뿐 아니라 주님의 좋으심까지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가 어떻게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나병 환자도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믿을 수 있습니다. 허나 최악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좋으시다 할 수 있을까요?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악까지 간 사람이기에 그는 진정 하느님의 좋으심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정 최악까지 간 사람입니다. 잃을 게 더 없을 정도로 이 세상에서 모든 걸 잃었습니다. 

하나하나 잃어갈 때마다 그는 절망하고 또 절망하였으며, 하나하나 잃어갈 때마다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잃을 것이 남았을 때는 불안하고 얼마 남지 않은 것마저 앗아가시는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는데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니 오히려 마음도 편안하고 어두운 밤에 별이 떠오르듯 도리어 선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최악의 선>입니다. 더 나쁠 것이 없는 악은 악이 아니고 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악은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며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더 좋은 것을 바라기에 현재의 것이 악이 되는 것이고요. 

이렇게 최악의 상태에서 최악의 선을 발견한 사람은 이제 최악을 허락하신 최고선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최악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 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의 더 진실한 기도는 말에 있지 않고 동작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청하였다.” 

무엇이 존재의 기도에 더 가까울까요? 

입으로 하는 기도가 더 가까울까요? 

동작 또는 행위로 하는 기도가 더 가까울까요? 

제 생각에 당연히 동작과 행위가 더 존재적인 기도에 가깝습니다. 사실 나병 환자가 주님 앞에 나아온다는 것 자체가 존재적인 기도입니다. 우리도 모든 기도에 앞서 해야 할 것이 주님의 현존 앞에 현존하는 겁니다. 

성당에 들어갈 때 그냥 성당에 들어간다고 생각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도 그냥 기도한다고 생각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왔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온 사람이라면 오늘 나병 환자처럼 겸손한 동작을 취할 것입니다. 제가 저희 수련자들에게 가끔 불만인 것이 성당에 들어와 털썩 앉는 겁니다. 하느님 앞에 나아온 사람이라면 오늘 나환자처럼 겸손하게 무릎을 꿇겠지요. 

이렇게 나아온 나환자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 

이 동작 하나에 나환자의 기도에 대한 주님의 모든 응답이 들어있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은총을 많이 받는 유일한 방법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줍니다. 바로 은총은 계약을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하멜른이라는 마을에 쥐가 들끓었습니다. 이때 얼룩무늬 옷을 입은 신비한 남자가 찾아옵니다. 그는 쥐잡이 꾼이라 말하며 일정 비용을 내면 마을에서 쥐를 없애주겠다고 말합니다. 

시장은 별생각 없이 피리 부는 사나이의 조건에 동의합니다. 그는 피리를 불어 쥐들을 마을 밖 강물에 빠트려서 죽입니다. 쥐 떼를 성공적으로 제거한 후 그는 보상받기 위해 돌아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고 쥐가 사라진 것을 본 시장과 마을 사람들은 약속을 어깁니다. 

그들은 전액 지불을 거부하고 단지 미미한 액수만을 제안했습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이번에는 다른 곡을 연주합니다. 하멜린의 모든 아이는 음악에 매료되어 그를 따릅니다. 그는 그들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고 그들은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은총과 진리는 결국 하나입니다. 은총은 주는 이가 나에게 해로운 일을 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은총을 받는 이가 말하는 진리에 순종하는 게 제일 안전합니다. 은총은 요구하면서 순종하지 않으면 은총을 주는 이를 자기보다 낮게 여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순종은 감사의 열매입니다. 내가 감사하는 이에게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이 고쳐진 사람은 주님의 함구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병이 다시 도졌다는 말은 없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방해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만진 사람이고 그러면 다른 고을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는 인간 안에 은총을 받고 싶은 욕망과 그 은총을 주는 이 위에 서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존재함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맥베스와 그의 친구 뱅코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다가 마녀들을 만납니다. 마녀들은 맥베스가 코더의 영주가 되어 결국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들은 또한 뺑코에게도 예언해줍니다. 자신이 왕이 될 수는 없지만 그의 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맥베스는 실제로 임금이 새로운 영지의 영주로 자신을 임명했음을 알게 됩니다. 마녀들의 예언을 들은 부인은 맥베스보고 던컨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하자고 합니다. 아내의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았던 맥베스는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합니다. 또한 마녀의 예언을 기억하고 뱅코와 그의 아들을 살해하게 시킵니다. 뱅코는 살해되지만, 아들은 탈출합니다. 

어쨌든 맥세스에게 이제 은인은 던컨 왕이나 뱅코가 아니라 마녀들과 자기 욕망을 자극하는 아내가 되었습니다. 맥베스는 확신을 얻기 위해 마녀들을 다시 방문합니다. 그들은 그의 동료이자 친구인 맥더프를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또 여성에게서 태어난 누구에게도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왕궁 앞 숲이 왕궁까지 올라오게 되기 전까지는 안전하겠다고 말해줍니다.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맥베스는 예언을 과신하고 자기 친구 맥더프의 가족을 학살하라고 명령합니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맥베스 부인은 광기에 빠져 결국 죽습니다. 맥더프와 던컨의 아들 말콤이 이끄는 군대가 버남 숲의 나뭇가지로 위장하여 맥베스의 성으로 진격하여 마녀의 예언 일부를 성취합니다. 마

지막 전투에서 맥베스는 맥더프와 대결하게 됩니다. 맥베스는 자신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에 의해 살해될 수 없다고 자랑하지만, 맥더프는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제왕절개로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여자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에 힘이 빠진 맥베스는 맥더프의 칼에 죽습니다. 

맥베스가 예언을 듣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예언한 이를 은인으로 여기는 것은 모든 비극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성주가 되고 왕이 된 것이 그들 덕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고맙고 그들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이 고쳐진 이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당이 쓰는 방식도 이와 같습니다. 대학에 붙는다든지 하는 일이 잘 되게 될 것이란 말을 던져 그대로 되면 사람들은 무당을 은인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 그에게 감사하게 되고 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하게 됩니다. 어차피 50%는 맞을 것이기 때문에 그 50%가 나중엔 주요 고객으로 돈을 뜯기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녀에게 주던 은총을 계속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은총은 좋아지라고 주는 것인데 그러면 은총이 독이 됩니다. 은총은 바보가 되면서까지 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항상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순종하기 위해 감사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악으로 이끄는 이에게 감사하고 순종하게 되어 참 은총이 끊기고 멸망으로 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19세기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은 마흔이 조금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평균 수명의 두 배 가까이 살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지내는 연명 수명이 아니라, 삶을 활발하게 사는 건강 수명으로 팔십을 훌쩍 넘기셨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입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젊은 시절의 총명함과 체력을 유지했고, 뇌는 전혀 노화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끊임없이 새로운 배움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이 듦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이가 늘어나면서 힘이 빠지고 정신도 맑지 못해서 후손들에게 짐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계속해서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만이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더 열정적으로 지금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주님을 알고 따르는 것도 우리가 멈춰서는 안 될 것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을 알고 또 따르려는 노력을 멈추는 순간, 우리 삶의 의미조차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이기에 하느님 안에서만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 안에서 앞을 내다보며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병자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리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은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치유 받은 나병 환자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왔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모두 당신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사실 이 나병 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명령하셨음에도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지요.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은총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따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주님 곁으로 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고,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주님을 알고 따르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알면 알수록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주님을 따르면서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현재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잡념을 없앤다는 뜻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중요한 것에 관심을 쏟는다는 뜻이다.

- 스펜서 존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는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절박하고 각별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오늘은 깨끗하게 되는 믿음의 오늘입니다. 믿음 자체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그 믿음을 믿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힘든 시간이 있으면 한순간 내려놓는 깨끗한 순간이 있습니다. 깨끗하게 되는 은총의 순간이 있습니다. 

주님과 가까울수록 깨끗하여지는 은총입니다. 간절함 속에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간절함과 아픔 속에서 더 깊어지는 우리들 믿음입니다. 사람의 길을 걷게하시는 믿음입니다. 우리에겐 너무도 힘들었던 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하여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자아가 사라진 순간이 어찌보면 깨끗하게 되는 은총의 순간이며 아무 말이 필요없는 순간입니다. 

참된 치유는 우리의 삶을 치유합니다. 치유된 삶은 모든 순간이 기적의 순간임을 알기에 부여잡거나 떠벌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건강한 아침을 맞이하는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과 치유 주님과 믿음은 하나이며 받아들임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의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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