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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1/10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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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높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네. 천사들의 무리가 그분을 흠숭하며 함께 노래하네. 보라, 그분의 나라는 영원하리라.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4년 1월 10일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사무엘기상권 3장 10절)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사무엘기상권 3장 10절) 성경말씀카드 사무엘기상권 성경구절이미지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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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기 상권 3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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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월 10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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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마르코복음
1장 29-39절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1월 10일 05:00
조봉익 도미니코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29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재덕 베드로 신부

 

살아 있는 믿음은 이웃을 향해 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도록 주도적인 구실을 한 것은 누구일까요? 바로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사람들은 시몬의 장모를 위하여 예수님께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치유가 필요한 모든 이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 말씀도 함께 살펴볼까요?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사무엘이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기 전까지,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그를 부르기만 하십니다. ‘듣는 마음’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비로소 우리와 대화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살아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하여 예수님께 ‘이야기’하고,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것처럼, 살아 있는 믿음은 이웃을 향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말씀드린 것처럼, 살아 있는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먼저 듣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어떠한가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는 않고 내 이야기만 늘어놓는 기도, 이웃을 향한 마음은 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의 일상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상, 아니 일생에 대한 요약입니다. 공생활 이후 예수님은 매일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이렇게 사셨습니다. 탁 드는 느낌은 불꽃 같은 삶이셨습니다. 그다음 드는 느낌은 “나는?”입니다. 

“나는 이중 무엇을 얼마만큼 잘 따르고 있나?”입니다. 

주님은 병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어제 봤듯이 예수님은 책상받이가 아니십니다. 사람들의 삶 한가운데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십니다. 대부분 시간을 병자들과 악령 들린 사람들 가운데서 보내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제는 식사를 하며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나 간호사들이 얼마나 힘들지 형제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노상 아픈 사람들과 상대를 하니 말입니다. 사람은 아픈 사람을 대하면 아픔이 전이되고 우울한 사람과 만나면 우울함이 전이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살려면 그리고 그 일을 계속하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전이돼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이 충만하던지 전이 되는 것을 아예 잘 차단하던지. 

많은 사람은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 없기에 전이 되는 것을 차단하는 쪽으로 선택을 합니다. 저도 30대 후반까지만 해도 고통을 많이 겪는 분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찾아가지 않아도 찾아오는 분들로 감당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찾아가지 않기 시작하면서부터 감당하기가 더 힘들어진 겁니다. 

역시 찾아가야 합니다. 태도의 문제인데 더 능동적이기 위해서입니다. 찾아 떠나지 않고 찾아오는 분들을 맞이하는 것은 안주하고 수동적이지 않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오늘 주님은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다른 곳으로 떠나십니다. 그러므로 저도 그랬어야 했고, 지금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분들을 제가 감당하지 못하고 그들 고통이 전이되는 걸 차단하게 된 더 큰 원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 부족이었습니다. 기도가 부족했다고 제가 말할 때 그것은 기도 시간이 짧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쩌면 기도 시간은 짧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기도 시간은 충분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의 기도에 있어서 부족했던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저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제가 풍덩 잠기지 못한 것입니다. 

기도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잠기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의 샘에서 물을 깃는 겁니다. 주님은 그 바쁜 중에도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그랬어야 했고, 지금도 그러해야 합니다. 

기도하러 가서 

무엇을 하지 말고, 

생각을 하지 말고, 

계획을 하지 말고, 

자책을 하지 말고, 

명상이나 심지어 묵상도 말고 오직 사랑에 잠겨 있다가 나와야 할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행동 패턴으로 분류한 인간의 세 부류

 

세상에는 세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말에 휩쓸려 자신의 의지를 쉽게 꺾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사람이 우유부단하게 되는 이유는 선과 악의 중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세븐’(1995)에 브래드 피트와 모건 프리먼이 연쇄 살인범을 쫓는 두 명의 형사로 출연합니다. 이 살인자는 일곱 가지 대죄(탐욕, 시기, 나태, 분노, 폭식, 교만, 색욕)를 작전 방식으로 사용하여 정교하고 상징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이 영화는 어둡고 분위기 있는 배경과 강렬하고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라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브래드 피트는 연쇄 살인범을 사살합니다. 그것이 범죄인 것을 알면서도. 연쇄 살인범 존은 일곱 가지 대죄를 대표하기 위해 자신의 범죄를 치밀하게 계획합니다. 그의 궁극적인 계획은 형사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마지막 두 가지 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존은 브래드 피트가 아내 트레이시와 함께 누리는 평범한 삶에 대한 질투를 인정함으로써 질투의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브래드 피트가 분노에 빠지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바로 임신한 그의 아내의 머리를 보여줌으로써. 

마지막 순간에 브레드 피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갈등합니다. 그는 법 집행관의 의무와 복수에 대한 압도적인 열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그의 파트너 모건 프리먼이 그를 진정시키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노와 슬픔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분노의 화신이 되어 살인자를 사살하고 일곱 가지 대죄를 모두 대표하는 살인자의 뒤틀린 비전을 완성합니다.

이 영화에서 브래드 피트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갈등을 지켜보는 일은 매우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가끔 그러한 상황을 겪기 때문입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고통. 그리고 대부분은 이러한 상황에서 좋지 못한 선택을 합니다. 

그러면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게 좋을까요? 어떤 사람이 무엇에게도 흔들리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확신을 가진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리옷 유다도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히틀러도 뭔가 확신을 하고 독일을 선동하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차라리 이런 이들보다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낫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아주 큰 악행은 저지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확신은 ‘영’에서 옵니다. 영이 믿음을 줍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세상에 악을 행하게 만드는 확신은 악령에 의해 옴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통쾌한 복수극이라고 보일 수 있겠지만,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게 다 좋은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의롭고 금자 씨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목사에게 일침을 날립니다. 

“너나 잘하세요!”

누구도 그녀의 확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옥에서 13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진정 하느님을 만났다면 그런 확신은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새벽에 혼자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라고 하시며 그들을 가차 없이 떠나십니다. 

기도는 분명 ‘확신’을 주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는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기도하면 항상 어떻게 하면 이웃에게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합니다.
 
1956년에 짐 엘리엇을 비롯한 다섯 명의 선교사가 에콰도르 정글로 들어가 원주민들에게 전부 살해당했습니다. 그들의 가족들은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요? 복수를 계획했을까요? 그들은 분명 기도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들 선교사 중 일부, 특히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어린 딸 발레리와 함께 화오라니족과 함께 살기로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또한 짐 엘리엇과 함께 죽은 네이트 새인트의 여동생 레이첼 세인트(Rachel Saint)도 오빠가 하려던 선교 사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그 부족 대부분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고 많은 선교사와 목사가 배출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들의 선택을 반대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분명 기도로 응답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혼자 생각만으로는 어둠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이는 ‘복음을 전하려는 확신’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기도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혹은 분심만 하다 끝났는지를 알려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폭의 넓이가 1미터인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을 바깥쪽으로 벗어나지 않고 똑바로 걷는 것을 그 누구도 어렵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1미터 넓이의 길 양옆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안전 펜스도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때도 이 길을 걷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때는 너무 힘든 일이 되고 맙니다. 혹시라도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과 걱정의 마음이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길도 걸을 수 없는 길로 만듭니다. 
 
불안과 걱정의 마음을 가지면 지금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혹시 모를 경우를 생각하며 불안과 걱정 안에서 앞으로 한 발 내딛는 것도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 어떤 사람이 4층 높이의 계단에서 지하 1층으로 떨어졌습니다. 가운데가 뚫려있는 회전형 계단으로, 자그마치 5층 높이로 거의 15미터 정도가 됩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라운 것은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고 합니다. 혹시 초능력자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만취된 상태에서 실수로 계단 아래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취한 상태여서 몸에 어떤 힘도 들어가지 않았고 이곳저곳에 부딪히며 떨어져서 찰과상 입는 정도로 그쳤다고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의식이 있어서 온 힘을 줬다면 크게 다쳤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불안과 걱정도 온 힘을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몸에 힘을 빼고 주님께 모두 맡기는 믿음을 통해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더 기쁘고 또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시몬의 장모를 비롯한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이 많았을까요? 이 불안과 걱정으로 자기 상태를 더 나쁘게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보다는 원망이 더 많았을 것이고, 다른 이를 향한 사랑보다는 자기를 배려하지 못한다면서 미움이 더 컸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걱정과 불안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 힘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바쁘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잊지 않고 하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치유와 구마의 권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그분과 일치하는 기도가 필수적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진정한 일치를 통해서만 우리의 모든 걱정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더 열심히 기도하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마라.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

- 윌리엄 보엣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아픈 우리를 언제나 먼저 찾아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치유의 일상입니다. 예수님 사랑이 불같이 뜨겁게 우리들 안쓰러운 일상에 스며듭니다. 보살핌으로 우리의 지친 일상을 고쳐 주시는 일상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에게서 보살핌을 배우는 일상의 시간입니다. 일상이 모여 우리들 삶이 됩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보살핌이라는 은총이 있었습니다. 보살핌이 미치지 않는 삶은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의 믿음과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 밖의 일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되찾아주십니다. 이와 같이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치유 뒤의 건강한 생활이 펼쳐집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픔을 치유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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