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2024년 1월 18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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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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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내 편이심을 나는 아네. (시편 56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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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6장 10절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무엘기 상권 18,6-9; 19,1-7)
나의 아버지 사울께서 자네를 죽이려고 하시네. - 오늘 복음
(마르코복음 3,7-12)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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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마르코복음
3장 7-12절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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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8일 05:00
최영진 그레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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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재덕 베드로 신부
참된 믿음은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믿음이다.
수많은 사람이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더러운 영들의 고백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있게 하여 주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을까요?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처음 고백한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모두 지켜본 백인대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15,39).
예수님의 진짜 모습이 십자가 위에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진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기적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 목숨을 내놓으심으로써 드러나십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더러운 영들의 고백에는 십자가가 빠져 있습니다. 기적만 있을 뿐입니다. 악은 이렇게 우리가 십자가로 향하지 않게 만듭니다. 십자가 없이 기적만 바라보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게 만듭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게 하고,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조금만 힘들면 언제든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좋아하고 편한 방법으로만 우리를 구원하셔야 한다.’는 교만이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합니다.
고통 앞에서, 어렵고 힘든 일 앞에서, 진짜와 가짜가 명확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탄의 우정이 진짜라는 것도 죽을 위협 앞에서 드러나게 된 것처럼(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진짜임을 십자가 위에서 드러내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주님께서는 우리를 십자가로 향하게 하십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를 위한 진짜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믿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의 바다로.
내가 하느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사람들이 내게 오지 않고 하느님께 몰려가도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해도 그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잘하는 거라고 칭찬하고 여전히 사랑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을 묵상한 내용입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업적을 숨기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과 업적을 소문내지 말라고 엄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러시는 겁니까? 꼭 이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심이 주님께서 겸손 떠시거나 당신을 더 높이시려는 인기 전술이거나 괜히 그러시는 것이 아니고 진심이라면 사람들의 사랑을 아버지께 돌리기 위해 당신께는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사랑을 숨기는 이유는 사람들의 사랑이 당신께만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그 목적은 사람들의 사랑이 당신을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절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정이 들었지만 좁은 고향을 떠나야 하고, 더 큰 스승을 만나도록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주님께 넘겨야 하며, 자식이 평생의 짝을 만나기 위해서는 부모 곁을 떠날 수 있게 해야겠지요.
그런데 만일 아들을 너무 사랑하여 마마보이가 되게 하고, 자기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면 진정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가 아니겠지요?
만일 이렇게 한다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며 결국 참사랑이 아니라 욕심이요 애욕이겠지요.
이런 애욕은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자기도 불행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 사랑 안에 가둘 뿐 아니라 자기도 그 사랑에 갇히기 때문인데 그런데 이런 사랑만큼 지옥도 없습니다.
옛날 노래에 ‘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수 없네’라는 노래가 있는데 애욕이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무엘기는 또 다른 사랑 욕심에 관한 얘기입니다. 여인들의 사랑이 자기한테서 다윗에게로 향하자 사울이 시기 질투하는 얘기입니다.
어른이고 왕인 자기가 그 어린애를 두고 시기 질투하니 그런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그 마음은 얼마나 지옥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감정이 오죽 복잡하고 지독하면 죽여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 하겠습니까?
요즘 데이트 폭력이니 스토킹이니 하는 말이 무성하고, 그런 사랑에서 비롯된 살인이 빈번한 것이 다 이런 사랑의 현상입니다.
애욕이란 시기 질투하게 하고 가질 수 없으면 죽여 없애버리게 하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 이것이 다 넓은 사랑의 바다에 도달하지 못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마치 사랑이 수족관에 갇힌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바다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면 인간의 하찮은 사랑에 매이지도 갇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두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나도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고, 너도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도록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가두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휘둘리는 사람이 휘두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나 악령에게 절대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얻으려고 그분 옷에 손을 대려 하자 예수님은 배에 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악령들도 그분만 보면 달려들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악령 들린 칭찬은 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허락 없이는 칭찬도 하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자유는 인간 존엄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런 이유로 에덴동산에 선악과도 있었고 뱀도 있었습니다. 저절로 생겨난 것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하신 것들이었습니다. 뱀은 특별히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징합니다.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창세 3,1)
뱀은 타락한 천사라기보다는 주님께서 어떤 연유로 인간이 유혹받음을 가능하게 하도록 창조하신 동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치 뱀을 밟은 성모님처럼 뱀의 유혹을 하찮게 여겼어야 합니다. 어쨌건 하느님은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인간에게도 당신을 배신할 자유를 주셨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게도 휘둘리지 않으셨기에 사람들을 마구 휘두르는 분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야말로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줍니다. 성경에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휘둘려 그 일을 합니다. 그런 헤로데와 같이 우유부단한 사람이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독재자가 됩니다.
차르 니콜라스 2세는 러시아 마지막 황제입니다. 그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폭군이었습니다. 그의 제관식 때 3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압사당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1905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도 유명합니다. 노동자와 그 가족을 포함한 평화로운 시위자들은 니콜라스 2세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행진했습니다. 시위자들은 더 나은 근무 조건, 더 많은 개인의 자유, 선출된 국회의원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황실 근위대가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해 천여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러일 전쟁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는데 많은 군인이 죽는 것 외에는 얻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폭군은 정말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을까요?
그 반대입니다. 그는 아내 알렉산드라와 라스푸틴이라는 정교회 수사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알렉산드라가 낳은 유일한 아들이 혈루병을 앓자 신비주의에 빠진 아내가 폭력적이고 음란한 라스푸틴을 소개합니다. 니콜라스는 알렉산드라와 라스푸틴이 은밀한 관계라는 소문이 이는 데도 불구하고 아들을 살리자는 희망으로 그들의 모든 뜻에 복종합니다. 그렇게 러시아 왕국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라스푸틴은 물론이요 티콜라스 2세와 일가족은 모두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무언가 잃을 것이 있으니 휘둘립니다. 잃을 게 없는 이만 자유롭고 자유로운 이만 자유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이는 자기 자유도 잃고 타인의 자유도 빼앗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아내와 아들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고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잃을 게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한 인물을 그렸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것은 목숨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자유를 위해 싸웠습니다. 이런 사람이 오히려 타인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유의 귀중함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이 자신을 휘두르려 할 때도 ‘노’(No!) 하며 모든 결정을 자기 자유의지로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을 아는 것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보면, 20세기 초 황금기를 달리고 있던 미국으로 아메리칸드림을 가슴에 품고 성공을 바라는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미국행 배 승선권을 구입하려고 열심히 노동했습니다. 드디어 승선권을 사고서 배에 오른 그는 돈을 아껴야 했습니다. 더는 쓸 돈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돈을 아끼려고 식사 때마다 식당에서 사람들이 남긴 우유와 빵 그리고 치즈 조각을 모아서 끼니를 때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본 식당 지배인이 그가 식사비를 아끼기 위해 그렇게 식사한다는 이야기를 알고는 직접 말해주었습니다.
“손님, 승선권에 식당 이용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어요?”
이 청년은 배에서 굶주림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기만 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요. 사서 고생한다는 말도 있지만, 굳이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알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함께함 그 자체로 주님의 축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면서 주님과 온전하게 함께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주님의 축복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의 자녀가 됨은 큰 은총과 주님의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과 함께하는 길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또 보여주셨던 사랑은 ‘악’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사랑에 집중하면서,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의 축복 안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로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특히 병자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이 몰려왔지요. 그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죄의 결과로 병에 걸린 것이고,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 역시 공동체에서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 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도록 이런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다가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더 알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주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 모두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친구들의 기억이 마음속에 있는 한 나는 인생이 좋다고 말할 것이다.
- 헬렌켈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예수님께 침묵의 주파수를 고정합니다. 예수님을 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끌 수 있도록 우리자신을 맡겨드리는 일입니다. 때로는 해답처럼 가장 정확한 고백이 가장 멀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자신에게 진실한 마음이 없음을 일깨워줍니다. 여태껏 예수님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가까워지려는 믿음의 마음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삶의 구원자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할 우리들의 진실한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로 이어진 사랑을 받으면서도 수천번 수만번 마음을 바꾸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우리자신을 보고 사는 것이 신앙인의 첫시작입니다. 입을 다물면 더 깊어지는 우리들 내면입니다. 사납고 독한 우리의 혀를 다스리는 것이 모든 치유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참된 변화입니다.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뜨거운 이 여정은 가장 좋은 침묵의 여정입니다. 고요한 침묵을 모르는 우리들을 측은히 바라보십니다. 고요한 침묵은 순서를 앞지르지 않습니다.
먼저 예수님과 함께 할 목숨보다 소중한 이 여정에 충실할 뿐입니다. 우리의 날카롭고 사납고 독한 혀를 봉헌합니다. 사랑 속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침묵입니다. 다른 사람의 침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의 침묵이 오늘을 이끕니다. 빈말이 아닌 침묵이 가장 진실한 고백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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