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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1/04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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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처음 시간이 생기기 전, 말씀은 하느님이셨네. 그 말씀이 세상의 구원자로 태어나셨네.

하느님, 외아드님의 탄생으로 신비로이 인류 구원을 시작하셨으니 하느님의 종들에게 굳은 믿음을 주시어 그리스도를 따라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2024년 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무엇을 찾느냐? 와서 보아라. (요한복음 1장 38-39절)

 

무엇을 찾느냐? 와서 보아라. (요한복음 1장 38-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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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38-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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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요한1서 3,7-10)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복음 1,35-42)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월 4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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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이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네.

 

 

요한복음
1장 35-42절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1월 4일 05:00
김민회 시몬 신부

 

✚ 교황님 1월 기도지향 00:23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6:22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재덕 베드로 신부

 

믿음은 어떻게 생길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누군가를 믿게 되었나요? 첫 만남부터 믿음이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주 만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앎’이 생깁니다. 그 앎이 좋아 더 자주 만나면 좋아하게 됩니다. 좋아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그 사람을 믿게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거쳐 누군가를 이미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누군가를 믿을 때는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좀처럼 예수님께는 이러한 과정을 겪을 기회를 내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을 자주 만나지도 않고,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과도 이러한 과정을 함께하십시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와서 보아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다음과 같이 행동합니다.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가다’(직역: 오다), ‘보다’, ‘묵다’(직역: 머무르다). 제자들은 이 세 가지 행동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예수님에 대한 ‘앎’과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오다’, ‘보다’, ‘머무르다’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여 주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하여 주는 행동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어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고, 믿음이 언제나 제자리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제자들이 보여 주는 세 가지 행동을 예수님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께 ‘오십시오.’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믿음은 다른 과정이 아닌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생기고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속지말고 믿어라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오늘 요한의 서간은 속지 말라고 합니다. 속는다고 함은 무엇이 사실이 아닌데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는다는 것이 실은 믿는 것입니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는 것이고 믿기 때문에 속는 것이고, 그렇기에 속는다는 것은 무조건 좋지 않거나 나쁜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좋은 방법을 찾는 것이 낫겠습니다. 속지 말자는 것은 탁 느끼기에도 수세적이고 부정적이지요. 

아무에게도 속지 않기 위해서 모두를 의심하게 되겠지요. 좋은 것인데도 나쁜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도 되고요. 그래서 좀처럼 그리고 점차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요. 의심이 심해져 불신까지 하게 되면 문제는 의처증이 중증이 되듯이 더 중증이 되고요. 

그러므로 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음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속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제대로 믿는 것? 

첫째는 믿을 분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속지 말라는 것은, 아무나 믿지 말라는 것이고, 더 나아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불신을 조장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제 말은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말라는 것이요, 사람은 아무도 하느님처럼 믿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사람으로만 믿어야 합니다. 그 정도의 사람을 그 이상의 사람으로 믿었다가는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기에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도 않고 속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또 하느님을 믿더라도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 웃기는 얘기할 때 많이 하던 얘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목욕탕에 갔는데 아버지가 먼저 탕 안으로 들어가 ‘아, 시원하다.’했고, 그래서 아들이 들어갔다가 너무 뜨겁자 ‘믿을 놈 하나도 없네’라고 했다지요. 

주님께서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당신에게 오라고, 당신에게 오면 안식을 주겠다고 또 짐을 가볍게 해주겠다고 하신 말씀을 짐을 안 지게 해주시고 고생이 없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믿었다가는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한 자식처럼 주님도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속이는 사람들 때문에 넌덜머리가 나 주님께 왔는데 주님께도 속았다 할 것입니다. 사실 많은 신자가 하느님을 믿으면 고통을 없애주실 거라고 믿음 때문에 믿기 시작하는데 주님은 고통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으십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지요. 주님은 짐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고, 주님의 길은 꽃길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짐을 지지 않게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짐을 잘 지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꽃길 걷게 해주겠다고 귀를 간질이는 인간에게는 속지 말고, 반대로 자기 십자가를 매고 당신을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하시는 주님을 오히려 믿고 따라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라삐를 만남과 메시아를 만남의 차이

 

오래 신앙생활을 했더라도 자신 있게 “나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인은 많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오랜 신앙생활 끝에 자녀에게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든지, 하려는 일이 잘 안되게 될 때는 신앙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신앙을 가졌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다고 해서 신앙을 포기한다는 말은 아직 진정한 신앙인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세속적으로 바라는 것만을 청하지는 않더라도, 메시아가 아닌 라삐만 만나려 해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는 말을 듣고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쫓아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동사는 ‘머무르다’ 입니다. 우리는 가지로 포도나무에 머물러야 삽니다. 그들이 주님과 머무르고 난 다음에는 주님께서 랍비에서 메시아가 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왕이고 예언자이고 사제로서 나를 지켜주고 가르쳐주고 아버지께로 이끄시는 구원자를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점점 그분이 랍비에서 메시아가 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누구에게도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서바이브’는 2020년 개봉한 영화입니다. 외딴 눈 덮인 산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은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자살로 극심한 우울증과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여주인공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압도적인 죄책감, 무력감, 버림받은 느낌으로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러다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해 남자 동료와 함께 눈 덮인 외딴 산에 좌초된 자신을 발견하면서 극적인 전환을 이룹니다.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여자 주인공에게 힘과 지지의 기둥이 됩니다. 

영화의 결정적인 순간은 남자 주인공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궁극적인 희생을 합니다. 이러한 이타적인 행위는 여주인공의 심리적 변화를 위한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현실에 직면한 그녀는 자신의 가치와 생명 자체의 가치를 재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여자는 다쳐 더는 걸을 수 없는 남자를 살리기 위해 혼자 산에서 내려옵니다. 여기서 내면의 악마와 투쟁에 대한 은유인 늑대와 대결합니다. 유리 조각만으로 무장한 그녀는 늑대와 싸우고 죽이며, 이는 그녀의 우울한 생각과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유리 조각은 본래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준비했던 도구였습니다. 그녀는 변화된 경험을 통해 새로운 목적의식과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없었을 때 그녀를 믿어준 남자를 기리며 살아갑니다.

사람은 나 때문에 죽은 이가 아니라 나를 ‘위해’ 죽은 이가 필요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말로만 전한다면 그것은 라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나의 선생님!”이라 불렀습니다. 아직은 그분이 메시아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라뽀니에서 메시아로 당신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형제들에게 가서 당신을 보았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과 이웃이 삶의 의미가 되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선 시간은 제10시입니다. ‘열’은 십계명을 상징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삶의 의미가 되는 순간이 그리스도와의 머묾을 통해 이뤄집니다. 저에게도 라삐로서 ‘하.사.시.’가 함께 하였다면,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분이 삶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메시아, 곧 내 삶의 구원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머물며 그분이 나의 삶의 이유가 되게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무엇을 찾느냐? 와서 보아라.

 

에픽테토스의 ‘담론’을 보면, 이런 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행복과 자유를 얻으려면 한 가지 원칙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건 바로 세상에는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통제 불가능한 것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 중에 어디에 집중해야 할까요? 에픽테토스는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면 비참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과거에 연연하시는 분을 종종 봅니다. ‘그때 그것을 했더라면. 그때 그것을 하지 않았다면….’ 등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타임머신이 없는 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습니다. 즉, 과거는 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면 어떨까요? 후회로 인해 지금이 비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통제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다’라면서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남이 대신해 주길 바랍니다. 이 역시 비참해지는 삶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는 ‘평온을 비는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하느님, 제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지혜를 주소서.” 
 
우리도 이 평정심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삶이 비참한 삶이 아닌 행복한 삶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뒤따라오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고 계신 곳을 묻지요.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어디에 사시고 어떤 음식을 드시며 어떤 일상을 보내고 계신지 알고 싶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씀하신 분, 그분을 알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모두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소개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일상을 살고 있는지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주님을 아는 것은 주님이 직접 해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접 주님을 찾아가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합니다.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리더는 자기가 가는 길을 알고, 그 길을 가고, 또한 그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다.

- 존 맥스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따뜻한 말씀처럼 따뜻한 복음이 있습니다. 어중간한 삶을 살았습니다. 뜨거움도 모른 채 살았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정녕 무엇인지를 보게됩니다. 모든 것을 버려도 아깝지 않을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가장 가슴벅찬 기쁨의 순간입니다. 좋은 만남은 언제나 함께할 기쁨이 있습니다. 

만남의 절정은 머무름의 절정입니다. 좋은 마음을 따라 가다 보면 좋은 마음을 만납니다. 어떤 것이 좋은 삶인지를 깨닫게됩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기쁨임을 배웁니다. 기쁨이 먼저 가 닿는 곳에서 만남은 선물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거기에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만남을 통하여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이와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말씀의 만남이며 관계의 기쁨이며 머무름의 사랑입니다. 가장 좋으신 메시아를 만나는 은총의 날입니다. 은총은 주님을 따름으로 가득한 축복이 됩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 머무러고 주님과 함께 사는 오늘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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