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4/01/02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 2.
반응형

 

뭇 백성이 성인들의 지혜를 기리고 회중이 그들을 칭송하리라. 그들의 이름은 대대로 살아 있으리라.

하느님, 복된 바실리오와 그레고리오 주교의 삶과 가르침으로 교회를 빛내셨으니 저희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배우고 사랑으로 충실히 실천하게 하소서.

 

2024년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월 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요한1서 2장 28절)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요한1서 2장 28절)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요한1서 2장 28절

240102_오늘성경구절이미지.jpg
0.55MB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월 2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하느님이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네.

 

 

요한복음
1장 19-28절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매일미사 평화방송

 

 

2024년 1월 2일 05:00
김준호 하드리아노 신부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소개 00:05

✚ 교황님 1월 기도지향 01:47

✚ 미사시작 02:01

✚ 강론시작 09:05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김재덕 베드로 신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세례자 요한에게 보냅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왔다는 것은, 세례자 요한이 당시에 정치권에서도 의식할 정도로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여겨볼 점은 세례자 요한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아도, 그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 증언과 함께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을 향하게 합니다.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 앞에서도 그는 예수님을 증언하여,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훗날 자기 곁에 남아 있던 제자들이 “스승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3,26)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참된 증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을 이용해서 나도 주인공이 되고 싶은 유혹을 겪습니다. 

내가 기억되기를 바라고 내가 주목받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내 노고를 인정하여 주지 않으면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을 좇다 보면, 우리의 믿음은 어느새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부르심을 받았든지, 어떤 직분을 받았든지,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묵상하며, 교회 안에서 어떤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곰곰이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제소리는 개소리

 

우리는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처럼 누구인지 질문을 받습니다. 질문을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묻지 않고 물음도 받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며 살게 되겠지요. 그래서 하인인데도 주인처럼 행세하며 살다가 나중에 큰코다치고, 주인인데도 종처럼 일생을 슬프고 불쌍하게 심지어 불행하게 살게 되겠지요. 

그렇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아니, 누구로 알고 살아야 합니까? 이 물음에 정답은 있습니까? 있다면 그 답은 무엇입니까? 

그 답이 오늘 세례자 요한의 대답이 아닐까요? 아니, 틀림없이 요한의 대답이 정답이고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나는, 우리는, 외치는 분의 소리랍니다. 그런데 소리라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개소리이기도 하고, 시끄러운 스피커 소리이기도 합니다.,무의미하거나 남에게 괴로움만 주는 소리일 뿐이라는 얘깁니다. 

시끄러운 스피커 소리라고 하니 가끔 차에 큰 스피커를 달고 다니며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류의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의 소리는 아무리 커도 사람들이 듣지 않아 시끄러운 소리 곧 소음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아무튼 소리는 아무리 그 소리 커도 소리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고 말을 만나야지만 의미를 지니고 말씀과 만나면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과 같이 말씀을 전하는 소리는 의미가 있고, 성당의 종소리도 그 소리가 예수님을 실어 나르기에 의미 있지요. 

그런데 성당의 종소리도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큰 의미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말이랍시고 하지만 제소리를 내기에 의미가 없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에게 제소리는 개소리입니다. 

반대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낮추고,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며 주님을 높일 때 우리의 소리는 주님께 영광 드리는 말이 되고 의미 있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왜 많은 사람이 당신을 따르느냐고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 많은 은총을 자기에게 주셨기 때문이라고, 같은 은총을 강도에게 주셨다면 그는 자기보다 더 훌륭했을 거라고, 자신은 낮추고 하느님 은총은 드러냈기에 우리는 그를 성인이라고 하고 그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듭 얘기하지만 제소리는 개소리입니다. 제소리는 아무리 커도 아무 의미가 없는 개소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확연한 차이

 

비안코(BIANCO)는 1987년에 설립된 덴마크의 신발 브랜드입니다. 2019년 비안코는 ‘승강기’(The lift)라는 타이들의 짧은 공고를 선보였습니다.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두 남녀가 주인공입니다. 

승강기에서 종종 마주치던 이들은 금세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머릿속으로는 결혼까지 상상합니다. 하지만 여자가 회사를 그만두는 날까지 두 사람은 서로 망설이다 끝내 입을 열지 못합니다. 그리고 광고의 마지막 메시지가 뜹니다. 

“Step out of your head(머릿속에서 걸어 나와라).”

사람 대부분은 ‘자존심’이라는 배에 타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면 나는 버틸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과감히 전진하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망망대해에 가라앉고 있는 배 위에 서서 먼 곳만 바라보는 한 남자와 같습니다. 

“엄마는 항상 이런 말을 했어요.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 네가 어떤 것을 얻게 될지 결코 알 수 없거든.”

영화 ‘포레스트 검프’ 속 주인공의 말처럼 인생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맛이 없는 초콜릿이 걸릴 수 있고 맛있는 초콜릿이 걸릴 수 있습니다. 실패를 주저하다가는 맛있는 초콜릿을 결코 입에 넣어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행하려면 자존심에 타지 말고 거인의 어깨 위에 타야 합니다. 

야구선수 추신수는 롯데 자이언츠 선수였던 외삼촌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야구에 입문했습니다. 이대호와 부산 수영초등학교 동기였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미국에 진출했습니다. 시애틀 매리너스 마이너리그로 시작한 그는 매년 3할이 넘는 타격과 도루도 20~30개씩 하고 홈런도 두 자릿수를 넘기는 장타도 많이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팀에서는 그를 메이저리그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같은 포지션에 메이저리그 안타왕 스즈키 이치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구선수는 최저임금 적용 대상이 아니기에 한 달에 1,000달러(약 120만 원) 정도를 겨우 벌었던 그는 식비를 아껴 아들 기저귀를 사야 했습니다. 빵에 잼을 발라 먹는 게 식사의 전부였습니다. 

이렇게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마이너리그에서 7년을 버텼습니다. 그러나 그는 근력 운동과 배팅 훈련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고 코치들을 찾아다니며 더 배울 것이 없나를 찾았습니다. 결국 팀을 옮기면서 메이저리그로 승격했고 점차 주전 선수로 경기에 나서게 됩니다. 

2013년에 텍사스 레인저스와 7년간 총 1억 3,000만 달러(약 1,600억 원)에 계약했고, 2018년에는 현역 메이저리거 최다 연속경기 출루 기록(52경기)을 세우며 한국인 타자로는 최초로 미국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합니다. 2020년 추신수의 연봉은 팀 내 최고액인 2,100만 달러(약 259억 원)이었습니다. 

그가 메이저리그로 호출받고 첫 게임에 들어섰을 때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아내가 그 경기를 TV로 봤다. 2회부턴가 3회부턴가 더그아웃 카메라에 내 모습이 잡혔다더라. 내가 장갑 끼고, 방망이 쥐고, 헬멧도 쓰고 감독 옆에 앉아 있었다. 감독이 누군가 대타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준비된 상태로 눈에 띄도록. 사실 메이저리그에서 5회 이전에는 대타 안 쓰지 않나. 그런데도 계속 그러고 있었다. 아내가 그거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했다.”

추신수는 그날 경게에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는 기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은 운이 좋은 케이스가 맞다. 하지만 그 운을 잡으려면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갑 끼고, 헬멧 쓰고 감독 옆에 앉아 있었다. 기회는 1년 뒤, 어쩌면 10년 뒤에 올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일 올 수도 있다. 기회가 눈에 띄게 올 수도 있고, 몰래 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잡으려면 준비가 돼 있어야 하고, 나는 그 준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뒤에 누군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엄청난 거인이십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누군가를 모시고 오려면 자신의 자존심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그 누군가를 믿으면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가 무릎밖에 안 차는 거인 손 위에서 육지를 찾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가라앉을 일이 없습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항우와 유방은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 시대의 라이벌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격돌은 약 8년 동안 지속되었고 처음에는 항우가 유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항우는 기원전 232년 초나라 명문가에서 태어나 키가 8척이 넘었고 힘은 커다란 쇠솥을 들어 올릴 정도였습니다. 가히 힘은 산을 뽑을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만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자기를 믿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이 몇 번이고 유방을 쳐야 한다고 간했지만, 그는 주저하며 그 기회를 잃었습니다. 

반면 유방은 결단에 머뭇거림이 없었습니다. 본래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방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건달들과 어울리던 시정잡배 주정꾼이었습니다. 장년에 이르러서야 하급 관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유능한 부하들이 생겨났고 결국 빠른 결단력을 내려야 할 때 주저하지 않아 세력을 키워 한나라의 첫 재상이 됩니다. 유방은 항우와의 전투에서 연패했지만 결국 해하 전투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사면초가에 이른 항우는 자결합니다. 

우리는 내가 무엇을 딛고 서 있는지 살피고 깨달아야 합니다. 언제나 성공하는 이들은 수많은 실패도 아랑곳하지 않는 자존심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인의 어깨에 타고 실패에도 두려움 없이 나아갑니다. 세례자 요한의 기개가 그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기대하지 맙시다. 거인에게 파견받읍시다. 우리의 거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같은 일도 다르게 한다.

 

어떤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보다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가는 글을 쓸 때 쾅쾅 울리는 시끄러운 옛날 노래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면 글이 잘 써져서 빗소리 ASMR을 듣는다는 분, 클래식을 듣는다는 분, 벌거벗은 채로 글을 쓴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거의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지만(주로 제 방입니다), 잘 써지지 않을 때는 백색 소음이 있다는 카페를 이용하곤 합니다. 
 
글 쓰는 것은 똑같은데 그 상황은 모두가 달랐습니다. ‘같은 일도 다르게 한다’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렇다면 다르게 한 것을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다를 수도 있는 부분을 틀렸다고 하면서 자기 방식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까지 잃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라면서 획일화시키려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에게 ‘같은 일도 다르게 할 수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르게 하는 그 과정 안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결과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더 큰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는 것과 남이 찾아주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같은 일도 다르게 할 수 있음’을 주님께서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일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성장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려고 할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점을 인정하지 못하고 의심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보고도 그러했습니다. 자기들과 달리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나가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닌, 엘리야의 모습으로 극기와 겸손의 삶을 산 것입니다. 
 
자기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서 바리사이들은 따지듯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답인 ‘나는 그리스도다.’라고 말했으면 편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남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선택하면서, 스스로 낮춥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얼마나 겸손의 삶을 살고 있을까요? 교만과 이기심으로 다르게 할 수 있음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닐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은 너무 짧아서 다투고 사과하고 가슴앓이하고 해명을 요구할 시간이 없다. 오직 사랑할 시간만 있을 뿐. 하지만 그 시간마저도 순식간에 지나간다.

- 마크 트웨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사람의 참모습은 참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시금 성찰합니다. 신앙의 지침서는 매일매일의 양심성찰입니다. 양심성찰은 우리모두의 소명입니다. 참된 성찰이 우리를 키웁니다. 성찰을 통하여 주님을 뜨겁게 만납니다. 

소유와 명예가 무너져 내린 곳에서 만나게되는 주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일방적인 교만과 고집이 아닌 소통과 어우러짐으로 이어집니다. 겸손한 성찰로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우리가 살아갈 존재의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막연한 생각만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성찰을 바탕으로 한 의지와 결심 각오와 다짐이 필요합니다. 머리로만 이해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으로 뜨겁게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이제는 형식보다는 실제의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소중한 생명의 시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성찰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참사람의 길은 참된 성찰이며 참된 실천의 길입니다.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습니다. 성찰을 도와주시는 성령께서 새로운 변화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 변화의 날이 바로 소중한 오늘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