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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2/27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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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 때 주님 품에 기대어 있던 요한, 천상 비밀을 계시받은 복된 사도, 생명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파하였네.

하느님, 복된 요한 사도를 통하여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계시하셨으니 저희에게 슬기를 주시어 생명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2023년 12월 27일 (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2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요한 20,4)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요한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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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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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요한1서 1,1-4)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 오늘 복음
    (요한 20,2-8)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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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영광에 빛나는 사도들의 모임이 주님을 기리나이다.

 

 

요한복음
20장 2-8절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2월 27일 (수) 05:00
구본석 사도 요한 신부

 

✚ 성 요한 소개 00:05

✚ 미사시작 01:12

✚ 강론시작 07:59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오늘 우리는 요한 사도를 기억합니다. 공관 복음서에 따르면, 요한은 자신의 형인 야고보,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거룩한 변모 사건에서 드러났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겟세마니에서 고뇌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제자였습니다. 넷째 복음서는 성인을 지칭할 때, 요한이라는 이름 대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이를 달리 ‘애제자’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런 특별한 호칭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복음서는 요한 사도가 어떤 이유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지 자세히 전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여 보입니다. 그도 예수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애제자의 사랑은 예수님 수난의 때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한나스에게 끌고 갔을 때, 그는 저택의 안뜰까지 들어가는 용기를 보이며 바깥뜰에서 스승과의 관계를 부인하던 베드로와 대조된 모습을 보입니다(18,12-27 참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는 예수님 곁에 남아 있던 유일한 제자였고,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게 됩니다(19,25-27 참조). 특히 오늘 복음에서 그는 베드로와 함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가는데,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먼저 무덤에 다다릅니다. 

예수님을 향한 애틋한 사랑, 그리고 부활의 현장을 한시라도 빨리 목격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그토록 빨리 달려가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봅니다.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은 그만큼 누군가를 또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크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우리를 향한 예수님 사랑의 크기를 잘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루카 7,47)

그렇다면 우리는 적게 용서받은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하여, 먼저 예수님께 얼마나 큰 용서와 사랑을 받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여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은 결과적으로 상대적이다.

 

어제 스테파노 축일에 이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도 주님을 바라봄 곧 관상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어제 스테파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성탄으로 주님께서 나타나심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에 성탄 축일 다음에 두 성인의 축일을 이어 지내고 있고 주님을 바라봄, 관상과 관련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상은 두 성인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시력의 문제가 아니고 사랑의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신학 공부를 아무리 많이 했어도 관상에 있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한은 진정 사랑꾼이고 관상가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자신에 대해 아무 주저함 없이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은 사랑하지 않고, 요한만 사랑했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타볼산에 오르실 때나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나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실 때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요한만 데리고 가신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사랑을 요한이 사랑했다는 뜻일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 자기가 더 사랑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적절한 예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어미 새가 먹이를 가지고 올 때 입을 더 크게 벌린 새끼에게 먹이를 주지요. 그래서 새들은 어미가 왔을 때 더 크게 입을 벌리고 더 크게 소리를 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무시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마다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에 투정을 부리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조금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스펀지 빨아들이듯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사람에 따라 사랑에 달리 대응하기에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아 결과적으로 사랑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주님 사랑을 다 받아들이기에 결과적으로 흠뻑 사랑받고, 더 받아들이기에 안 받아들인 사람에 비해 더 많이 받은 셈이 되지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모두가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는, 요한만 성모님과 여인들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요한이 더 사랑했다는 표시가 아닐까요? 주님 사랑을 더 사랑했기에 더 주님 사랑을 많이 받은 요한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많이 사랑하여 주님을 사랑을 더 많이 받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신앙인은 일반인보다 더 외로울까?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분명 예수님을 사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골고타 위에까지 예수님과 함께 머문 유일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무덤에 첫 번째로 도달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는 사람들을 자신과의 친교로 이끕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엔 하느님과 또 사람과의 친교가 안 돼 자기 자신과 지하 세계의 것들과 친교를 맺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들은 매우 외롭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어둠의 세력과 친구가 됩니다. 

요한이 사람들을 자신과의 친교로 이끄는 무기는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평화’가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그분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바로 마음의 평화를 주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바라는 게 바로 평화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이때 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만, 여전히 살아계신다는 사실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전해주는 이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자신과의 친교로 남편과 나누는 친교에 자녀를 참여하게 합니다. 자녀는 그 덕분으로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영원한 친구를 얻는 법입니다. 

AIA 생명에서 만든 동영상입니다. 뇌사 진단을 받은 10대 소년이 장기 기증으로 새 생명을 나누고 떠났습니다. 세월호 희생자 중 교사 대부분은 마지막까지 학생들을 구하다가 의로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문을 열고 우리 타니까 불러줄 것만 같아요. 제자도 하나 보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제 흔적도 없잖아요. 흔적도 없잖아요.” 

“흔적도 신랑의 빈자리가 많이 느껴지죠. 이렇게 되어 신랑 생각하면 저는 그냥 아까운 생각 그게 제일 커요.”

그렇게 시작된 작은 응원. 한 단체에서는 남겨진 가족이 아픔을 극복하고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4주간의 심리 치료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그리고 이별한 가족에 남아 있는 사진과 영상을 수집하며 얼굴과 음성의 특징은 전문가들이 분석하고 사진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더해 갑작스럽게 떠난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죽은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다든지 듣고 싶은 말을 듣게 되는 일들이 만들어진다면 슬픔을 극복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 40일의 상담이 끝나는 날 상담사는 말합니다. 

“오늘 이제 편지 읽으실 거예요. 마음을 터트려 놓는 거예요.” 

이분들은 자신들이 떠나보낸 이들에게 써 온 편지를 읽습니다. 

“보고 싶은 내 신랑 여보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이제 곧 튼튼히도 태어날 텐데 당신 없이 내가 잘 낳고 키울 수 있을까?” 

“그토록 사랑했던 들어가 생일날 영원한 수학여행을 떠나고 말았고 너의 생명을 나눌 수 있었다는 게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으니 우리야 대견해.” 

그렇게 못다 한 이야기를 전하는 동안 한 통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를 받자 자신들이 읽어주고 있던 자녀와 남편이 화상으로 등장하여 그들의 목소리로 말을 합니다. 

“아빠 나 잘했어요. 사랑하는 제자들이랑 진짜 잘했어요. 난 해야 할 일을 했고 그래야만 했어. 나를 이런 선생님으로 키운 게 우리 아빠잖아. 고마워요, 아빠.” 

“비록 저는 엄마의 곁을 빨리 떠나게 됐지만 저로 인해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탄이도 언제나 엄마 곁에 있는 거예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튼튼히 만날 준비는 잘하고 있지 튼튼히 태어나면 민감한 경찰이었다고. 그리고 우리 시누도 아빠가 항상 곁에서 지켜줄 거라고 이야기해줘 오래오래 살다가 예쁜 할머니 돼서 와.” 

이분들은 그것이 컴퓨터로 생성된 영상이고 목소리인 것을 알지만 큰 감동을 하고 마음의 위로를 얻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나타났다는 생각이 반가움에 또 서러움에 말하는 거 같아서 어쩌면 이렇게 내 마음을 알고 이렇게 하셨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좋았어요.”

이미 자신들 곁을 떠나 영원히 그리워해야 하는 대상의 목소리와 마음을 전해준 이 단체는 이제 그들에게 평화를 주어 희생자들 유가족에게 영원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영원한 친구가 되려면 영원한 것을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제가 어떤 건장한 예전엔 알아주는 조폭이었다는 사람을 한 마디로 울린 적이 있습니다. 그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딸이었습니다. 저는 그 딸이 마치 아빠 보고 걱정하지 말고 잘 살다 나중에 하늘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울었습니다. 

친구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줍니다. 그러나 나를 아주 짧은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친구를 만나면 안 되고 그런 친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탐욕과 술이나 쾌락, 명예와 인기처럼 순간 부풀었다가 꺼져버리는 것을 주려는 이들은 영원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이들은 마치 선악과를 건네는 하와와 같습니다. 

영원한 것을 주어야 영원한 친구가 됩니다. 하늘 나라를 주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주어야 하고 평화를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고 그것을 받으면 영원히 감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불안을 없애주는 평화를 가져다줍시다. 만약 그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었다면 나는 그 사람과 영원한 친구가 될 것입니다. 은총과 진리를 전해주십시오. 영원한 친교를 이룰 친구들이 생길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부자의 고민

 

어느 부자가 지혜롭다며 많은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고민을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돈을 안 쓰면 자린고비라고 흉보고, 돈을 좀 쓰면 잘난척한다고 흉을 봅니다. 도대체 어떻게 돈 관리를 해야 할까요?” 
 
현자는 한동안 침묵 속에 있다가 주먹 쥔 손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제가 만약 주먹을 쥐고 펴지 못하면 이 손은 어찌 될까요?” 
 
그리고 이번에는 손을 쫙 편 뒤에 부자 앞에 내밀면서 또 물었습니다. 
 
“이렇게 편 손을 주먹 쥐지 못한다면 이 손은 뭐가 되는 거요?” 
 
“돈을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꼭 써야 할 때 손바닥을 쫙 펴서 흔쾌하게 쓰고, 돈을 아껴야 할 때는 주먹을 꽉 쥐어 철저하게 아껴야 불구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분별력이 있어야 사람들도 함부로 입을 가볍게 놀리지 않을 것이고, 더러 입을 놀리는 사람이 있어도 자기 주관만 뚜렷하면 전혀 신경 쓸 것이 없습니다.” 
 
주먹을 쥐고만 있어도 또 손을 펴고만 있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도 아껴야 할 것은 아끼고 나눠야 할 때는 나눌 수 있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돈만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도 그렇고, 나의 능력과 재능도 그렇고, 그 밖의 여러 부분에 있어서 이런 분별력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주먹 쥔 삶만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나누지 않고 혼자만 간직하는 마음은 큰 잘못입니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되는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주요 사건에 늘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성모님을 맡길 정도로 믿고 사랑했던 제자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가 이렇게 예수님께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멈출 때와 앞으로 가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늘 살피셨고, 또 곧바로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무덤이 비었다는 말을 듣고서 베드로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아무래도 더 젊은 요한이 더 일찍 도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또 자신도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무덤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몫을 베드로에게 넘깁니다. 주님께 수위권을 받은 베드로를 배려한 것입니다. 
 
이렇게 멈출 때와 앞으로 갈 때를 분별력있게 구별하셨던 요한 사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그 분별력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포기하면 그 순간 경기는 끝나는 겁니다.

- 이노우에 타케히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사랑은 물음표가 아닌 뜨거운 느낌표입니다. 낯설고 두려운 세계로 우리는 초대되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랑으로 다시 걸어갑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시작된 사랑의 삶이 드디어 예수님의 복음으로 다시 뭉칩니다. 요한 복음의 이야기는 사랑의 진실한 이야기이기에 우리의 생각보다 더 빠릅니다. 

생각보다 더 빠른 것이 복음의 진실한 사랑입니다. 사랑하기에 깨닫게 되고 사랑하기에 보게 되는 사랑의 삶입니다. 서로의 의미는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의미입니다. 서로 사랑할 때 서로는 우리가 되고 우리는 기도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성 요한 사도의 첫 마음을 만납니다. 사랑은 언제나 처음이고 마지막입니다. 

집착은 소금기둥이 되지만 사랑은 부활이 됩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과 함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은 뜨거운 심장이며 뜨거운 빛입니다. 성 요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이 옳았음이 드러납니다. 

성탄과 부활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매일매일이 성탄과 부활입니다. 사랑의 복음이 생명의 복음이듯 생명은 하느님 사랑으로 환하게 빛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오늘입니다. 끝까지 사랑에 충실하였던 성 요한 사도 복음 사가의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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