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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12/26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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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스테파노에게 하늘의 문이 열렸네. 첫 순교자로 오른 그는 하늘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받았네.

주님, 첫 순교자인 복된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에 거행하는 신비를 저희가 삶으로 드러내게 하시고 숨을 거두면서도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성 스테파노를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소서.

 

2023년 12월 26일 (화)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2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주님,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시편 31,6)

 

주님,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시편 31,6)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시편 31장 6절

오늘성경구절이미지_23122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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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6,8-10; 7,54-59)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이 보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0,17-2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12월 26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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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마태오복음
10장 17-22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12월 26일 (화) 05:00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

 

✚ 성 스테파노 소개 00:05

✚ 미사시작 01:15

✚ 강론시작 08:56

 

 

 

그 외 성당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6장과 7장에서 성인의 발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식탁 봉사를 위하여 뽑힌 일곱 봉사자(부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식탁 봉사의 직무 말고도, 말씀을 선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설교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것인데, 특별히 스테파노의 설교(사도 7장 참조)도 함께 전하여진다는 것은, 그가 초대 교회에서 두 사도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드러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스테파노의 순교 장면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떠올립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처럼 최고 의회로 끌려가 심문을 받고, 거짓 증인들의 모함도 받습니다. 특히 스테파노가 숨을 거두기 전에 드린 기도는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와 매우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하고 기도하셨듯이, 스테파노도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스테파노도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하고 말합니다. 

이처럼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가 스테파노를 마치 예수님처럼 묘사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참된 제자는 스승님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전부가 아닌 일부만, 또는 편하고 쉬운 부분만 닮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예수님께 충실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때로는 그분을 닮으려다가 사람들의 미움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시련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이만이 참제자로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교환의 신비에 초대받은 우리

 

“첫 순교자인 복된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에 거행하는 신비를 저희가 삶으로 드러내게 하시고 숨을 거두면서도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성 스테파노를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소서.” 

성탄절에 그리고 그것도 주님 성탄 바로 다음 날에 성탄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순교자 축일을 지내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을 지내는지 그 의미가 오늘 본 기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세상에 태어나시고 스테파노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지요. 주님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스테파노를 포함해 우리 인간이 천상에 태어나게 됨을 뜻하는 겁니다. 

주님의 모든 신비는 교환의 신비이고 성사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는 주님의 죽음으로 우리 인간이 부활하게 되고, 주님의 성탄과 육화의 신비는ㅈ주님의 땅으로 내려오심으로 우리 인간이 하늘로 오르게 되고, 주님의 성탄으로 우리 인간이 천상에 태어나게 되는 신비지요. 

문제는 있습니다. 교환이 이루어지려면 그 교환에 동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늘과 땅을 교환하자고 하시며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면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오르겠다고 동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주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셨어도 우리가 하늘로 오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주님의 성탄은 우리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아무리 구원 열차에 오르라고 초대해도 우리가 그 열차를 타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로 지내는 스테파노는 이 교환의 제의에 처음으로 응답하여 처음으로 천상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스테파노에 대해 사도행전은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라고도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였다.”라고도 하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는 적대자들을 이렇게 초대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늘을 보지 못하고, 그 초대에 응답도 하지 않지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분노로 가득 찼기에 하늘 대신 스테파노에게 증오의 눈길을 보냅니다. 

스테파노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초대를 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정의롭지 못하면 자비롭지도 못하다.

 

오늘은 성 스테파노 순교자 축일입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따를 자가 없었습니다. 그를 시기한 자들도 그를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하느님은 스테파노에게 이 세상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스테파노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신 것과 같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나를 모함하여 십자가에 못 박거나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분들은 어떻게 그런 자비의 마음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자비는 ‘정의’의 열매입니다. 

자칫 정의가 자비와 반대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정의로 심판하여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은 자비롭지 않은 처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정의와 자비는 결국 같은 선에 있습니다. 

‘오은영쌤 육아지침서’에 동생들을 지극히 싫어하는 5학년 딸아이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동생들을 “없어져 버려!” 혹은 “쟤네 입양 보내!”라고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의 애정을 그리워하면서도 동생들을 낳은 엄마가 매정하기만 합니다.

왜 금쪽이는 동생들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그리도 모질까요? 자비롭지 못한 이유는 정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정의롭게 사랑을 준다고 여기지만, 자신은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롭다면 더 큰 사랑을 받기 위해 더 노력할 것입니다. 불평만 하지는 않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라는 시를 쓴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심한 뇌성마비로 말을 하기도, 움직이기도 힘들지만 하느님을 “공평하다”라고 노래합니다. 이 가사는 주님께서 불러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평하다고 쓰라고 할 때는 쓰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뭐가 공평하냐는 것입니다. 이때는 자신의 처지를 친구들과 비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늘이 자신에게 해 준 은혜를 봅니다. 그랬더니 공평함을 넘어서 ‘감사함’이 생겨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라고 노래합니다. 하느님을 정의롭다고 여기게 되면 누구에게나 넘치는 사랑을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다른 이들이 받지 못한 것들이 보이게 되어 다른 이들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부모가 불공정하다고 여기는 아이에게 어떻게 사랑을 주어야 할까요? 문자로 사랑을 전달할까요? 그것으로 될까요? 한 아이에게 잘해주면 다른 아이가 질투합니다. 정의롭다면 노력하는 만큼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노력해서 인정받습니다. 그 인정은 내가 형제들과 같은 수준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동생이 태어나자 질투가 늘어버린 꼬마 아가씨가 나옵니다. 여기서 금쪽 처방은 아기가 부모처럼 동생을 돌보는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자신이 동생과 같은 수준이 아니라 부모와 같은 수준임을 믿게 됩니다. 그러자 질투가 사라집니다. 자비로워집니다. 

오늘 스테파노가 하늘이 열리고 삼위일체 사랑을 바라봄이 이와 같습니다. 스테파노는 정의롭기에 노력하는 만큼 하느님께서 보답을 주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불쌍하게 바라볼 눈을 얻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이들을 자신들에게 돌을 던져도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테파노는 자신이 그런 것처럼 하느님도 사랑에 대해서는 공평하신 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십니다. 부모가 그렇듯 누구든 당신 수준으로 높여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정의롭지 못해서 하느님도 공평하지 못하다고 믿는 이들에겐 아무것도 주실 수 없습니다. 은총으로 주어도 믿음의 열매가 맺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끝까지 형제들을 향해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결국 정의는 하느님 자비를 얻게 하고 하느님 자비는 이웃을 정의롭게 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모든 이들에게 대한 자비입니다. 결국 정의와 자비는 하나입니다. 자비는 본성상 정의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비는 모든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신의 불편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면 어떨까요?

 

어느 신부로부터 성체 분배 때문에 항의를 들었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성체 분배를 제대로 못 한다는 항의가 아니라, 신부가 한 곳에서만 성체 분배한다는 항의였습니다. 

그렇게 한 군데에서만 성체 분배를 하면, 다른 곳에 앉아 있는 신자들은 한 번도 신부님께 성체를 받지 못하지 않느냐는 항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매번 자리를 바꿔서 성체 분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신부가 지난번에 했던 곳에서 또 성체 분배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쪽에 앉은 사람만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하더군요. 
 
별의별 항의가 다 있다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항의를 하지 않는 저희 본당 신자들에게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사실 이런 항의를 들어도 저는 옮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고정된 자리에서 성체 분배를 해야 아직 세례받지 않은 사람, 첫영성체를 하지 않은 어린이들이 안수받으러 오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자리를 계속 바꾼다면 이들의 혼란이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항의하는 요즘 세대를 종종 봅니다. 자신의 불편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면 어떨까요? 또 무엇보다 사랑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마음을 담아보면 어떨까요? 
 
얼마 전에 병자성사 갔다가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확장 주차’ 자리를 보았습니다. 요즘 큰 차량이 많기에 배려 차원에서 넓은 주차선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주 작은 경차가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경차 주차선이 따로 있었고, 텅 비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자기 불편을 따지기보다 함께 사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 나라가 바로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을 맞이한 오늘, 제1독서는 용기 있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스테파노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민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테파노의 지혜로운 언변이 그들을 물리쳤고, 이 점이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투석형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과연 스테파노의 죽음을 원하셨을까요? 단순히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화가 난다는 이유로 자기들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인정하실까요?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간직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복음에서도 전해주듯,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은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 이기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성탄도 순교도 우리에게 참된 사랑을 가르쳐주는 사랑의 참된 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게 하시며 예수님께로 다가서게 하시는 성령이십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성령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무엇을 우리가 한 적이 없는데도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다시 사랑할 힘을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애썼는데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멈추는 법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멈추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멈추면 어느새 하느님께 닿아 있습니다. 우리에겐 너무 힘들었던 문제들이 너무 쉽게 해결됩니다.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을 사랑이 답입니다. 이렇듯 사랑이신 예수님을 뵙는 것이 우리 삶이 가야할 길이며 우리 삶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은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뵙는 사랑의 기쁜 날입니다.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는 가장 소중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뵙는 성탄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듯 성 스테파노는 순교로 예수님을 뵙습니다. 

성탄도 순교도 그 중심에는 예수님의 구유와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음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예수님 당신이셨습니다. 이루시는 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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