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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8/30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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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2023년 8월 30일 (수)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요한1서 성경 말씀 카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 (1요한 2,5)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 (1요한 2,5) 요한1서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테살로니카1서 2,9-13)
    우리는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23,27-32)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8월 30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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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

 

 

마태오복음
23장 27-32절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30일 (수)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형균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4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30일 (수)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조인기 암브로시오 신부

 

📌 미사시작 06:37

📌 강론시작 15:16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30일 (수)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장화기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9:27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30일 (수)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 성체조배 0:03:13

📌 미사시작 1:01:44

📌 강론시작 1:08:4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대개 바위를 깎아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돌문으로 무덤 입구를 막아서 외부인의 침입과 약탈을 막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무덤이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면 어디가 무덤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아서 이것이 오히려 이스라엘의 정결법을 어기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무덤의 뼈나 시신에 몸이 닿으면 일주일 동안 다른 사람과 접촉하거나 만나는 것이 일체 금지되었기에, 사람들은 해마다 3월 초에 무덤에 회칠을 하거나 석회 가루를 뿌려 하얗게 만들고, 무덤을 주변 환경과 구별하는 표식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보고 회칠한 무덤과도 같은 사람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지닌 바리사이의 성향을 성찰하게 됩니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떠받들려 만족감을 얻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남들 앞에서 신심 깊고 열심인 신앙인처럼 굴며 사람들의 칭송을 얻고 거기에 즐거워하면서, 복음의 요청을 따르는 것에 무관심한 속마음과 태도는 없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주님께서 우리 내면을 알고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얼굴(모습)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강점에 집중해야 한다.

 

세계 최고봉은 ‘에베레스트’로 무려 해발 8848.86미터에 달합니다. 이 에베레스트를 많은 사람이 정복했지만, 하리 무다 마그르의 정상 도전은 사람들로부터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두 다리는 무릎 위까지 절단되어 완전히 의족에만 의지해서 정상에 오를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산악인보다 세 배가량 느린 속도였지만 결국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는 네팔 용병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했고, 2010년 4월에 사제 폭탄을 밟아 안타깝게 두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져 오랫동안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으며, 극단적인 시도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자선 단체를 통해 스카이다이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리가 없어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약점과 장애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강점에 집중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약점에만 더 집중하는 우리가 아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약점에만 집중하면 할 수 있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할 수 없는 일만 보이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지 않게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겉으로는 스스로 의로운 사람인 척하면서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들에게는 ‘죄인’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했지요. 약점에만 집중하게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런 모습을 하느님께서 좋아하셨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강하게 “불행하여라.”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위선의 허울을 뒤집어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목적은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말씀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보시니 참 좋을 수 있도록 ‘강점’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고, 더불어 남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통해서도 보시니 참 좋을 수 있도록 ‘강점’을 바라보고 이를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그 옛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모습처럼 약점만을 바라봅니다. 자기 약점만 바라보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며, 남의 약점을 바라보면서 깎아내리는 데만 집중합니다. 보시니 좋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불행하여라.”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의미 있는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자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신은 구불구불한 글씨로 똑바르게 메시지를 적는다.

- 류시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당신의 조상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의 대답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꼬집으십니다. 겉으로는 회칠한 무덤처럼 깨끗하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판단하시는 이유는 예언자들을 죽였던 이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조상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조상들이 한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예수님은 인간의 힘으로 조상의 전통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기십니다. 조상은 곧 우리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전갈이 개구리와 함께 살고 싶었지만, 결국 자신이 전갈이라는 사실을 잊지 못하여 개구리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는 동화가 있습니다. 자신이 전갈이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엔 전갈의 본성이 나옵니다. 우리도 인간이라는 본성을 완전히 잊지 않으면 언젠가는 인간의 본성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원탁의 기사’로 유명한 아서 왕에 대한 전설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서 왕의 전설은 돌에서 검 엑스칼리버를 뽑은 후 자신이 영국 왕위 계승자임을 알게 된 어린 소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혈통을 깨달은 아서는 왕의 역할을 맡아 원탁의 기사단을 결성하고 이 땅에 정의를 가져오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을 극화하여 영화로 만든 것이 ‘킹 아서: 검의 전설’(2017)입니다. 아서의 아버지는 한 왕국의 왕이었지만, 동생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그는 전설의 검 엑스칼리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이 돌이 되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아 죽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혈통만이 그 검을 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천하게 자란 아서는 우연히 그 칼을 뽑을 기회가 생겼고 사람들 앞에서 그가 진정한 왕족임이 증명됩니다. 하지만 어린 아서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자기 친구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어서 검을 다시 집어 듭니다. 그러자 검에서 큰 힘이 나와 자기 부모를 죽인 왕을 이기고 새로운 왕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영화 슈퍼맨도 그렇고 듄이라는 영화화된 소설도 같은 내용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혈통을 새롭게 깨닫고 새로운 소명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조상의 전통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나의 본성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세는 자신의 혈통에 대한 믿음으로 삶이 완전히 변화된 대표적인 성서의 인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새로운 존재임을 믿고, 인간이었음을 잊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조상의 죄에서 벗어나 하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조상을 바꾸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조상은 교회이고 그 시조는 그리스도와 성모님이십니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우리는 곰의 후손들입니다. 잘 참아낼 줄 알았던 곰이 결국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만약 자신을 곰의 후손으로 여긴다면 곰처럼 살 것입니다. 그러나 곰의 본성을 벗고 인간의 본성을 입었기에 우리는 곰을 닮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창조된 교회의 백성입니다. 우리 조상은 교회의 선조들입니다. 성인들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이 세속의 사람이냐, 교회이냐에 따라 우리 삶이 결정됩니다. 이는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조상이 운명을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기 조상의 운명대로 살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찐 복음 선포자와 찐 신자 

 

요즘 우리말에 ‘찐 스승’이니 ‘찐 친’이니 하는 말이 유행입니다. 순우리말로 바꾸면 참 스승이나 진실한 친구라는 뜻이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도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님은 위선자라고 야단치시는데 이들은 ‘찐 지도자’들이 아닌 거짓 지도자들이라는 뜻일 겁니다. 

이에 비해 오늘 독서의 복음 선포자들 곧 바오로와 동료들은 자기들이 ‘찐 종교 지도자’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것을 듣는 우리에게 이들의 얘기가 결코 자화자찬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고 진실하게 들립니다. 

사실 많은 경우 속으로는 자기를 자랑하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겉으론 겸손을 떨지요.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자기를 자랑할 마음이 전혀 없기에 겸손을 떨 필요도 없고 자기를 전혀 의식하지 않기에 자기 진실을 정말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바오로 사도는 자기들이 ‘찐 복음 선포자’라고 하는데 어떤 면에서 자기들이 ‘찐 복음 선포자’라고 얘기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자기들은 신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손수 일하여 먹고 사는 것, 다시 말해서 놀고먹지 않는 것, 이것이 프란치스코도 그렇고 바오로 사도가 당당하게 살고, 당당하게 복음 선포를 할 수 있는 힘 또는 근거였습니다. 

복음을 열심히 연구하고 그것을 열심히 선포하는 것도 사실은 놀고먹는 것이 아니기에 신자들에게 생계를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신자들과 똑같이 일할 때 더 당당하게 복음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몇 년 전 막노동할 때 저는 처음으로 부끄러움이나 죄송함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들은 그렇게 힘들게 일하고 고생하는데 그들의 봉헌으로 나는 호의호식하고 있구나 하는 부끄러움과 죄송함이 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같이 일하고 고생하니 신자들과 제가 같다는, 동질감이랄지 동료 의식이랄지 그런 것을 더 느꼈고 저의 복음 선포가 신자들의 현실과 겉돌지 않는다는 느낌, 신자들의 삶과 동떨어진 뜬구름 잡는 말이 아니라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 여러분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당신의 나라와 영광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였습니다” 

도매 복음 선포와 소매 복음 선포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신자들을 도매금으로 그러니까 한 묶음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하나 소매금으로 대하며 복음을 선포하였다고 얘기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천 명, 만 명을 상대로 말로 하는 대중 복음 선포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을 상대로 인격적인 복음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착한 목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하나하나 이름으로 부르며 불러낸다고 하셨고, 다른 양들을 놔둔 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맨다고도 하신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모두 다 사랑하시면서도 나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정말로 나만 사랑하시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고 내가 도매금이 아니라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은 것이지요. 

이렇게 인격적으로 사랑하며 동시에 부르시는 하느님께 합당하게 살라고 바오로 사도가 권고하고 격려하며 역설하니 신자들은 그 말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의 말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바오로와 신자들의 관계가 참으로 아름답고 부럽지만 바오로 사도 같은 ‘찐 복음 선포자’가 없더라도 여러분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제 말과 다른 사제들의 말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로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찐 신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가짜와 거짓에 기대어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가짜를 내놓고 진짜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우리 내면의 가짜를 아프게 만납니다. 양심의 질서에도 없는 가짜는 늘 시끄럽고 가짜는 늘 어수선하며 가짜는 늘 나쁜 짓만 골라서 합니다. 마음이 썩으면 이와 같이 우리의 삶도 썩어 악취가 납니다. 

이제 그만 끝내야 할 가짜의 삶입니다. 진짜의 맛 진짜의 기쁨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부끄럽고 죄송한 우리들 내면입니다. 하느님께 멀어지는 것은 언제나 탐욕으로 가득찬 우리자신들입니다. 생명의 질서를 깨뜨리는 저마다의 가짜를 십자가에 못박는 시간입니다. 역사는 가짜가 아니라 사랑이며 진짜의 참된 부활입니다.

 더 이상 죽이는 일에 가담하는 가짜가 아니라 예언자들을 살리는 일에 가담하는 진짜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죽이는 삶은 가짜의 영원한 노예이지만 살리는 삶은 거센 풍랑 속에서도 자유로운 자유인의 삶입니다. 진짜는 진짜이기에 언제나 자유롭습니다. 회칠한 무덤같고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찬 삶에서 벗어나는 행복의 시작은 가짜를 멈추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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