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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8/29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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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임금들 앞에서 당신 법을 말하며, 저는 부끄러워하지 않으오리다. 당신 계명을 되새기며 끝없이 사랑하나이다.

하느님,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복된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성자의 탄생과 죽음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를 본받아 저희도 끝까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게 하소서.

 

2023년 8월 29일 (화)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예레미야서 1,17-19)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오늘 복음
    (마르코 6,17-29)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8월 29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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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르코 복음
6장 17-29절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때에 

17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29일 (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명겸 사도 요한 신부

 

📌 성 요한 세례자 소개 00:05

📌 미사시작 01:03

📌 강론시작 06:53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29일 (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8:03

📌 강론시작 16:05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29일 (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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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29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네 사람 이야기

 

오늘 복음에는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네 사람이 나옵니다. 이들에 대하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첫 번째는 헤로데 임금으로, 한마디로 ‘부패한 사람’입니다. 그는 부정과 부패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부도덕함 말고도 많은 부정을 저지르며 권력을 지키고 키우려는 열망으로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앙심(증오)은 암흑의 힘으로, 마귀의 호흡(숨)과도 같습니다. 마귀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집요하게 질투하며 시기하고 미워합니다. 헤로디아는 증오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세 번째는 헤로디아의 딸(소녀)입니다. 그는 허영심에 가득 찬 춤꾼입니다. 술에 취한 헤로데는 그의 춤을 보고 ‘무엇이든 모든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 한 말과 같습니다(마태 4,9 참조). 이렇듯 이들의 뒤에는 언제나 악마가 있습니다. 여인에게 증오를, 소녀에게 허영심을, 남자에게 부정과 부패의 씨를 뿌려 키워 갑니다.

그리고 네 번째 사람으로 세례자 요한이 나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자리를 내드리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 없어진 위대한 순교자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랑과 진리와 다른 이들 안에 온전히 자기 인생을 내줌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갑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하여 살면서 자기 안에 생명을 가두려 하는 사람들, 곧 부패한 임금, 증오에 갇힌 부인, 허영심에 사로잡힌 소녀는 결국 허무 속에 자기 인생을 말라 버리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증언 앞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과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봅시다(프란치스코, 성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 강론, 2019년 2월 8일 자 참조).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 눈치 보느라 정작 주님 눈치는 신경 쓰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

 

지난주에 있었던 휴가 때, 경상도에 있는 수목원을 방문했습니다. 모든 것이 예약제였는데, 입장이나 그 안에서의 식사도 예약해야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가격도 상당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책에서 소개한 내용을 보고는 관심이 갔고, 올해 첫 휴가인데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것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다녀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약간의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런 곳을 혼자 가는 사람이 있을까?’, ‘다들 누군가와 함께 올 텐데 나만 혼자 가면 어색하지 않을까?’, ‘식사 가격도 상당하던데, 나 혼자 가는데 이렇게 비싼 식사를 하면 사람들이 흉보지 않을까?’ 등의 생각들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저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저는 대단하지도 또 중요하지도 않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제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좋은 곳에서 굳이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까지 신경 쓸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이 점을 생각하니 그저 저에게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에게만 대단하고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아주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고, 힘들어도 그곳에서 멋진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남 눈치보다 내 눈치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눈치는 주님 눈치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남 눈치 보느라고 정작 주님 눈치를 신경 쓰지 않는 어리석은 우리의 삶을 반성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는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질책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몇 명의 사람들을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서 요한 세례자의 참수를 명하는 헤로데 임금, 잘못된 자기 행동을 질책하는 요한 세례자를 제거하려는 헤로디아, 그리고 잘못된 행동임을 알면서도 어머니의 명령이라면서 따르는 헤로디아의 딸, 마지막으로 죽음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외치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요한 세례자가 가장 불행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요? 그 어떤 사람도 헤로데,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이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치만 보았을 뿐, 주님 눈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 눈치 보느라 정작 주님 눈치는 신경 쓰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치를 보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될 때, 하늘 나라에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변화는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

- 앤디 워홀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해야 할까?

 

오늘은 요한 세례자가 수난당하고 죽임을 당한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헤로데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춘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한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는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왕이 아니라 노예였습니다. 세상의 시선 때문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방식대로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살로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춤을 잘 추고 자신의 상품을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헤로디아도 노예였습니다. 쾌락과 돈과 권력의 노예였습니다. 헤로데에게 붙어있기 위해 그것을 비판하는 요한을 죽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다 가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오직 요한만이 세상 것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 뜻에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 발버둥 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다 이루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것이 믿는 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크게 세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죽음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기 직전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숨넘어가는 소리로 “내 돈 2억 갚아, 임마!”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모두가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삶과 완전히 별개로 여깁니다. 

두 번째는 체념하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라 여깁니다. 저희 할머니는 임종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가 성당 나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란 이름으로 대세를 받으셨습니다. 저희 고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불교를 믿으셨고 끝까지 하느님을 믿기를 거부하셨지만, 마지막 순간 대세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이 삶의 일부가 된 경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죽음을 삶과 별개가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삶에서 실천해오던 하느님 뜻을 죽음과 연결합니다. 부활이 보장되어 있기에 죽음도 삶의 일부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도구로 죽음을 이용합니다. 요한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가면서도 며칠 동안이나 설교했다고 합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라이언을 구하러 왔던 주인공은 죽어가면서 라이언에게 “잘 살아야 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라이언은 평생 자신을 위해 죽은 사람들 때문에 못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그들의 무덤 앞에서 아내에게 묻습니다. 

“여보, 나 잘 살았지?”

이런 이들은 죽음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이용할 줄 안 사람들입니다. 전태일도 근로기준법전을 끌어안고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라며 죽었습니다. 누구는 자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자기 죽음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보았던 가장 감동적인 죽음은 어떤 자매님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방학 동안에 이태리 본당에 실습을 나갔는데 어떤 분들이 한 자매님을 가리키며 저분이 말기 암 환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아 귀여겨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의 여름에 다시 갔는데 그분이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이라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과 함께 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왠지 저를 기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장례식 때는 시골 본당이 가득 찼습니다. 그분은 3개월 산다고 암 선고를 받았는데 3년을 사셨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아픔을 호소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분은 항상 오늘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이웃에게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분이 죽기 직전이라는 것을 안 사람들은 그 자매에게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그분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용한 분입니다. 죽음이 삶의 일부였고 그래서 그분의 삶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먼저 자신이 왕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왕이 아닌 하느님 자녀인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는 이 세상이 멸망해도 영원히 삽니다. 그러니 왕은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영향은 주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지는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영향을 받으면 어떻게 자녀를 교육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예언자의 면모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의 죽음은 이 지상의 노예로 사는 이들의 민낯이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죽음으로 세상이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교육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사제임이 드러나야 합니다. 

헤로데는 나중에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죽인 요한이 아니냐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죽음으로 헤로데를 그리스도께 오게 하였습니다. 물론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자기 선택입니다. 그러나 돌아가시면서 자녀들에게 꼭 성당 다니라고 한 마디는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의 심장을 지닌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오늘 독서 예레미야서는 예언자라면 떨지 말고 주님께서 명령한 것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인데 우리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순교 축일에 이 예레미야서를 독서로 읽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런 예언자였고, 그래서 순교했다는 뜻일 겁니다. 예언자란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하느님께 파견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브리엘과 라파엘 천사처럼 그렇게 파견된 존재가 아니라 쓴소리를 해야 할 사람이나 집단에게 파견된 존재입니다. 

가브리엘이나 라파엘 천사가 좋은 소식의 전달자라면 예언자는 듣는 이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그것도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는 존재이고, 그러니만큼 평소 하느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늘 역행하던 자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지금 하는 나쁜 짓을 멈추지 않고, 고치지 않으면 미래에 불행해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 나쁜 짓을 할까요? 그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고 세상 권력에 흠뻑 취한 자들입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돌아가고 세상 사람들을 자기 맘대로 주무르다 보니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하고 하느님이 두려운 줄 모르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심장이 센 자가 아니면 이들 앞에서 떨리고 하느님 말씀은커녕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떨지 않으려면 강심장을 가져야 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려면 하느님 심장을 장착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심장에는 용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심장에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에 대한 연민이 먼저 있습니다. 

이들이 당신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분노를 터트리시거나 포기해버리셨다면 하느님은 예언자도 파견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아직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있으시기에 벌을 주시기 전에 곧 분노를 터트리시기 전에 지금 하는 짓을 멈추고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라면 이런 하느님의 심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언을 듣는 사람이기도 하고, 예언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기도 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회개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예언해야 함을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견디어 내는 법을 다시 배웁니다. 슬픔과 수난도 견디어 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남의 말이나 체면에 온통 신경을 더 많이 쓰며 살아갑니다. 조금 힘들면 외면해 버리고 갈등과 고민을 극복하려 노력하기보다는 회피에 익숙하며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부정보다는 타협을 인내보다는 굴복을 너무 빨리 선택합니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볼 시간적 여유조차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장과 성숙이 없는 삶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만한 댓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는 내면의 기쁨입니다. 소중한 생명을 말과 행동으로 죽어야 나의 욕심을 채울 수 있다고 잘못 믿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수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정신이 올바르지 않으면 신앙 또한 굳건해질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정신이 함께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자기정화가 서로를 도와주고 서로의 관계를 살리는 복음의 첫 시작입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빚어진 사람이라는 존재는 혼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혼자만의 행복 끼리끼리만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은 전부 가짜입니다. 사람이라면 신앙인이라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합니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존귀한 복음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 관계와 관계 사이에 계시는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피와 눈물이 사랑과 참된 감사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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