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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8/27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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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2023년 8월 27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1주일

 

 

로마서 성경 말씀 카드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로마서 11,36)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로마서 11,36) 로마서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8월 27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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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오 복음
16장 13-20절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27일 (일)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규흠 베네딕토 신부

 

📌 흑석동성당 소개 00:22

📌 미사시작 00:47

📌 강론시작 14:4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27일 (일)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 미사시작 07:49

📌 강론시작 18:53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27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4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우리는 그리스도께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헤로데 임금은 죽기 전 아끼는 아들 필리포스에게 자기 왕국의 북쪽 영토를 줍니다. 바산, 곧 지금의 골란고원과 그 너머 북쪽의 영토입니다. 비옥한 땅과 단에서 흘러나오는 깨끗한 물에, 가축을 위한 목초지도 풍부하여 번영의 조건을 고루 갖춘 곳이었습니다. 

필리포스는 그 땅에 수도를 정하고, 이름을 “카이사리아”(카이사르의 도시)라고 짓습니다. 그가 충성하는 로마 황제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필리포스는 샘물이 솟아나는 자리 위에 판테온(만신전)을 짓고 풍요와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에게 나는 누구인가?’ ‘너희에게 나는 누구인가?’ 아마도 제자들 앞에는 그들의 눈을 사로잡는 무엇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자연의 선물인 비옥한 땅과 샘솟는 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려한 궁전과 신전들의 위세였을 것입니다. 이 광경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지신 질문의 요지는 결국 이렇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가? 많은 신과 왕과 나 사이에서 너희는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필리포스가 지은 판테온에는 사람들에게 유독 사랑받던 두 신, 곧 목축의 신 ‘판’과 정령의 신 ‘님프’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풍요와 다산을 주겠노라 약속한 신들입니다. 거기에다 그들에게 충성하는 필리포스의 친구들은 임금이 주는 부와 풍요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유혹입니까? 

과연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과 차별되는 어떤 것을 제자들에게 주십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낱낱이 밝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다른 성경 구절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적잖이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우리의 고백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께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예수님을 과연 어떤 분으로 고백하고 있을까요?

 

갑곶성지에 있을 때, 식기 세척기를 하나 마련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설거지가 힘들기도 했지만, 성지를 떠나 다른 사목지로 이동한다는 말을 듣고 후임 신부를 위해 좋은 식기 세척기를 마련해주고 싶었습니다. 식기 세척기가 도착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디자인도 좋고 세척력도 너무 좋은 것입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알록달록한 세제 캡슐은 정말로 신기하고 편했습니다. 이 조그마한 캡슐 하나로 그 많은 그릇이 깨끗하게 된다는 사실이 정말 신세계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를 들었습니다. 이 식기 세척기 캡슐로 인해 6세 미만의 아이들이 심각한 중독 사고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세척된 식기에 세제 성분이 남아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글쎄 세제 캡슐을 맛있는 사탕으로 오인하고 먹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예쁘고 실용적인 모양이었지만 아이에게 치명적이었기에, 미국 소비자 동맹에서는 캡슐형 세제 이용을 완전히 중단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좋아 보이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좋아 보인다고 반드시 유익한 것이 아님을 삶 안에서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하느님 나라는 어떻게 보입니까? 솔직히 많은 규제와 의무 수행 문제로 인해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좋은 것이며,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순간적인 만족, 나의 욕심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곳이며 참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즉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 유다 사회는 단순히 예수님을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해했습니다. 이것도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한 큰 기대가 있었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의 지배로 힘들어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달해 줄 예언자로 여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위로만 주는 예언자로서 당신을 바라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정답을 이야기하지요. 그리스도는 예언자와는 전혀 다른 호칭입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러 온 수많은 예언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 하느님의 구원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도 바로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님과 함께하기에 교회는 기뻐하며 희망을 품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과연 어떤 분으로 고백하고 있을까요? 예언자만도 못한 자기 욕심만을 채워줄 그리고 자기 생각만을 다 들어주는 한 명의 종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문제를 바르게 파악하면 절반은 해결된 것이다.

- 찰스 F. 케터링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을 믿으려 하는데 잘 믿어지지 않아요? 그 이유는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는 눈을 지닌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 나라 열쇠를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알아보는 눈, 곧 믿음은 우리 능력이 아닌 성령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하늘 나라 열쇠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쫓겨난 이유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죄가 용서되면 다시 하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씻겨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곧 성령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령이 주님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하십니다. 

곧 내가 죽지 않으려 하는 이는 성령을 받아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마르틴 루터도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며 죽기를 거부하여 교회에 주어진 죄를 사하는 권한을 자신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베드로는 자기 뜻을 죽이고 물 위를 걷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농구공을 몇 분 주고받느냐의 수를 세느라고 정신이 팔려 그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는 고릴라를 보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욕망이 한쪽에 빼앗기면 다른 것은 볼 수 있는 힘을 잃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를 믿으면 하느님을 믿을 힘을 잃습니다. 믿고 싶지 않아집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어지는 것입니다. 

아주 먼 옛날 앞을 못 보는 남자가 하느님께 한 번만 세상을 보고 싶다고 소원을 청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부엉이 한 마리를 불러 낮에는 눈이 필요 없으니 그 소경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보게 된 소경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밤에도 눈을 부엉이에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부엉이는 먹이를 먹을 수 없어 죽었고 그때 소경의 눈은 흐려지다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죽는 만큼 내 안에 성령께서 살아나십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믿음이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이 살아나는 만큼 교회의 성사는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체를 영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에 불과하다면 인간의 본성에 사로잡혀 성령의 불이 꺼지고 맙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선악과를 자신이 차지하여 스스로 주(인)님이 되고 선악과를 먹어(육체적 욕망) 스스로 창조자가 되며 사람을 심판하여 스스로 심판관이 되라고 유혹했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이 될 수 있는데 다른 하느님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셨겠습니까? 

계셨습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눈을 잃었습니다. 자아를 긍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소유욕-성욕-지배욕이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를 살리기 위한 욕망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이 있다면 주님의 뜻, 곧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덜 가지고 절제해야 하며 겸손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뱀의 욕망과 반대됩니다. 따라서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을 버려야만 함을 압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인식하고 그분께서 우리도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불러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있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저주와도 같습니다. 더는 돈을 좋아할 수 없고 더는 여자에 끌릴 수 없으며 더는 다른 이들보다 높아질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고 싶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자신을 버려야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잘 믿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을 십자가에 봉헌함 없이 우리를 하느님처럼 만들려는 분을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는 천국의 열쇠지기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의 문을 열게 해주겠다고 하시는데 그 뜻이 무엇일까요? 틀림없이 좋은 뜻인 것 같기는 한데 그 뜻이 무엇일까요? 

하늘나라의 열쇠가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의 자물쇠도 있다는 것이고, 그 열쇠가 베드로에게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를 여닫는 권한이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베드로에게 달려 있다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아무리 잘살아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열어줘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나의 구원이 베드로에게 달려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구원이 주님께만 달려 있다는 것이 우리 믿음인데 베드로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말이 아닙니까? 그리고 베드로에게 그럴 능력과 자격이 있기는 한 겁니까? 

없지요. 하느님 없는 베드로에게 그럴 능력과 자격이 없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당신의 신원을 베드로가 안 것은 인간의 머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것을 알려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하늘나라 열쇠를 위임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 열쇠를 위임하시는 것이고, 하느님의 지혜를 받고 힘을 받는 사람에게 위임하십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자기를 머리를 믿고 자기 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 열쇠를 맡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를 베드로에게 위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 맡기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베드로를 반석 삼아 세우신 교회에 맡긴다는 뜻이며 그것은 교회의 일원인 우리에게도 맡기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복음 다른 곳에서 너희가 무엇이든 이 세상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신 바가 있지요. 그러니 이것은 베드로 한 사람의 영광이 아니고 교회 일원인 우리 모두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위임은 책임입니다. 주님의 위임이 우리에게는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당신의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려는 뜻은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은 당신과 우리의 공동책임이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한 당신 사명을 마치시면서 당신을 대신하여 이 사명을 계속 이어갈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나라를 여닫는 대표 책임을 베드로에게 맡기시고, 베드로의 신앙을 이은 교황들에게 맡기신 것인데 우리도 천국 열쇠 지기의 책임에 공동참여하고 있다는 책임감을 지녀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용서의 가르침을 제시해야 하는 임무가 우리 신앙공동체에 있습니다. 우리 자아가 죽지 않고는 결코 닫힌 것을 열고 푸는 열쇠가 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기록은 사랑과 용서의 위대한 기록입니다. 매듭이 묶이고 풀릴 때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뜨겁게 체험합니다. 희망과 빛 기도와 소금을 주는 것은 사랑이라는 실천적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우리 모두를 위하여 존재하십니다. 어리석음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의 교회를 통한 구원은 구체적인 현실 위에 구체성을 띤 실천의 완성으로 드러납니다. 

존중받아야 할 최고의 가치는 언제나 사랑의 실천입니다. 실천이라는 기본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땅에서 묶인 것을 결코 풀 수 없을 것입니다. 

기본을 갖추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잣대이며 열쇠입니다. 차분한 실천으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기쁜 주일 되십시오. 올바른 신앙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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