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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8/28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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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옷을 입혀 주셨네.

주님, 일찍이 복된 아우구스티노 주교에게 부어 주신 그 정신을 주님의 교회 안에서 새롭게 일깨우시어 저희도 그 정신을 따라 참된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을 그리워하고 영원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을 찾게 하소서.

 

2023년 8월 28일 (월)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한 10,27)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한 10,27)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테살로니카1서 1,1-5.8ㄴ-10)
    여러분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섰습니다. 다시 일으키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여러분이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23,13-22)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8월 28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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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마태오 복음
23장 13-22절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17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9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21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22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28일 (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장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

 

📌 성 아우구스티노 소개 00:05

📌 미사시작 01:21

📌 강론시작 08:19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28일 (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10시)
전두병 요아킴 신부

 

📌 미사시작 10:12

📌 강론시작 19:2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28일 (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8

📌 강론시작 10:1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라는 낱말은 단죄나 위협보다는 안타까움과 아픔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랑으로 훈육하는 탄식입니다. 이 표현이 오늘 복음과 이틀 뒤 복음에 잇달아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오늘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와 우리 가정, 교회와 사회를 비추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사람들에 대하여 탄식하십니다(13절 참조). 그들이 소개하는 하느님께서는 무섭고 엄한 심판관으로 좀처럼 자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성경 본문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이들에 대하여 탄식하십니다(14절 각주 참조). 예수님께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자들을 꾸짖으시면서 이들은 더 엄한 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고, 살면서 일정한 수고의 대가를 받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루카 10,7; 1코린 9,13-14 참조).

그러나 기도를 비롯한 종교적 의례와 행위를 자신을 부유하게 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위선으로 가득 찬 행동입니다. 그것은 종교를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전락시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상인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1,15-19 참조).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은사를 돈으로 매수하려 한 시몬이라는 자가 베드로 사도에게 엄중한 질책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8,18-24 참조).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식들에 대하여 하나씩 묵상하며 우리가 끊어 내고 걷어 내야 할 것들을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들은 행복해 보인다는데 정말로 그 ‘남’이 행복한 것일까요?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는 분이 많습니다. 병으로, 경제적으로, 가정 문제로, 직장의 일로, 사람과의 관계 등등의 이유로…. 힘든 이유는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이 이유를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한두 가지로 힘든 것은 오히려 다행이 아니겠냐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변을 보면 아무 문제도 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많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통과 시련이 다가오면 갖게 되는 감정이 억울함이라고 합니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닥칠까요?”라는 말을 하면서 눈물짓습니다. 이 억울함과 함께 다가오는 감정이 바로 후회입니다. “내가 이러려고 열심히 살았나?”, “저 사람을 내가 왜 만났을까?”, “돈이 뭐길래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 등의 후회를 반복하게 됩니다. 
 
자기 삶의 불행을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상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기 삶을 온전히 자기 것을 바라보면서 문제를 뒤섞지 말아야 합니다. “너 때문이야.”라면서 괜한 분노만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 온전히 바라봐야 문제의 해결점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남들은 행복해 보인다는데 정말로 그 ‘남’이 행복한 것일까요?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에서 뒹굴며 사는 사람이 행복해 보입니까? 그 방에서는 특별히 하는 것도 없으니 걱정도 없고 어려움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람을 그 누구도 행복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열심한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 없음보다 더 주님께 간절하게 원해야 할 것은 열심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위선자들이고, 눈먼 인도자이며, 어리석고 눈먼 자라면서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말씀하십니다. 사실 그들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율법의 세부 조항도 열심히 지켰고, 단식과 자선과 기도도 전혀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그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열심’으로 인해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심’은 단순히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심’,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길에 동참하면서 그 길에 많은 이가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열심’이었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일에 열심하지 않는 그 모든 것이 위선자이고, 어리석고 눈먼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나의 ‘열심’을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열심’을 말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보람된 일은 그것 자체가 기쁨이며, 사람이 거기에서 얻는 이익에 대한 기쁨이 아니다.

- 알랭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눈먼 인도자 : 규칙만을 강조하는 자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법체계 안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법인지, 무엇이 덜 중요한 법인지를 헛갈리게 만들어 사람들이 작은 계명에 에너지를 집중하게 합니다. 그러며 정작 더 중요한 사랑과 정의, 자비와 의로움 같은 법은 잊게 만듭니다. 

그들은 바로 옆에 사람에게 충실하지도 못하며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며,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전의 황금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 성전에 거하시는 하느님이신데도 말입니다. 또 제단 위의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하지만,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보다 황금을 더 섬기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이전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이러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은 성전보다 황금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나요? 성당을 굳이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지을 필요가 있을까요? 요즘은 조립식으로 지어도 20~30년은 거뜬합니다. 사실 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건물이 아닌 사람들 안에 사십니다. 

제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단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 자리가 거룩해져서 하느님께서 오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보다 더 큰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바치는 제물은 거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해성사한다고 할 때 우리가 보속을 하지 않으면 마치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죄가 씻기는 것은 우리가 하는 보속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값 때문입니다. 

소 신부와 호랑이 신랑이 결혼하였습니다. 소 신부는 호랑이 신랑에게 샐러드만을 주었습니다. 샐러드는 몸에 좋습니다. 그러나 호랑이 신랑은 샐러드만 먹으며 점점 인내력에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고기를 물어옵니다. 하지만 소 신부는 자꾸 고기만 물어오는 호랑이 신랑이 밉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법이 있습니다. 서로 상대를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법에 매몰되어 정작 상대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마음을 알아주면 모든 법은 저절로 지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법만을 강조하면 마음을 잃습니다. 

영화 ‘위플래시’(2014)에서 플레처는 자신의 음악적 위대함을 달성하기 위해 종종 가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학생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을 믿는 매우 존경받고 동시에 두려운 음악 강사입니다. 앤드류는 음악, 특히 재즈에 대한 열정을 지닌 젊은 드러머입니다. 그는 최고가 되고자 열망하며 플래처 밑에서 학생이 됩니다. 플래처의 극도의 규율과 완벽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앤드류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자기 행복과 개인적인 관계를 위험에 빠뜨리게 만듭니다. 플래처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앤드류는 여자 친구와의 관계가 정리하고 사고로 몸이 아픈데도 연주에 참여합니다. 결국 앤드류도 학교에서 퇴학당합니다. 

플래처는 법과 같습니다. 그 법을 지키면 분명 위대한 드러머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드러머가 되려는 이유는 행복 때문입니다. 플래처는 그 사랑과 행복을 포기하게 하면서 길을 잃게 만드는 못된 선생입니다. 언제나 목적을 위해 법만을 강요하는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된 교사들은 율법의 디테일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다 정신을 잃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운전을 배운다고 합시다. 운전을 잘하기 위해 차의 조작법과 스킬을 열심히 배웁니다. 그래서 운전을 잘하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 잘해서 사고가 나는 수가 있습니다. 운전의 정신은 안전입니다. 세세한 규정이나 규칙에 집중하다 보면 그 정신을 잃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 가게에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때 그 사람들이 속이는 것 같기도 하고 돈을 주면 술을 사 마시기 때문에 돈을 갚으라고 하며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한 것인지 걱정을 합니다. 이런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런 때는 저렇게 하라는 식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모든 법은 그 만든 당사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을 통해 당사자의 마음을 알려고 해야 합니다. 잘못된 인도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만 치중하게 하여 그 정신을 잃게 만듭니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게 되어 길을 잃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율법 가운데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하느님은 지금 나에게 이럴 때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를 자주 자신 안에 계신 성체께 여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도자는 아닌지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어제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불행하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문을 잠가 자기들도 다른 이들도 못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겁니까? 베드로는 어떻게 하길래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그들은 어떻게 하길래 하늘나라 문을 잠가버리는 겁니까? 

그런데 어제도 봤듯이 하늘나라 문을 여닫는 것은 근본적으로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하늘나라 문을 잠가버린다는 말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이렇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길이라고도 하시고 목자라고도 하시고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도 하시지요. 

그런데 길이요 목자요 문이라고 하심이 다 하늘나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시고 하늘나라로 이끄시는 목자시며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성인들은 양들을 주님이라는 간선도로로 이끄는 지선이고, 그래서 양들을 하늘나라로 이끌고 하늘나라의 문을 통과하게 하는 데 비해 그들은 주님을 목자가 아니라 베엘제불이라고 함으로써 주님을 따라가지도 못하게 하고 주님을 하늘나라의 문이 아니라 지옥문이 되게 하는 거겠지요. 

또 다른 관점 곧 사랑과 율법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늘나라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나라이고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가는 나라인데 율법 중에서 첫째가고 둘째가는 계명인 사랑보다 다른 계명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침으로써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하늘나라의 길을 오도하는 것입니다. 

오도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잘못된 길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길을 가본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갈림길에서 이쪽으로 가야 하는데 다른 길로 인도하면 오도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길, 사랑의 길이 아닌 율법의 길, 미움의 길을 가게 하면 그것이 오도 중에서도 최고의 오도이며, 자신도 불행해지고 다른 사람도 불행해지게 만드는 길이겠지요. 아무튼, 오늘 우리는, 아니 저는, 내가 오도자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무엇이 더 중요하냐?

 

마음을 적시는 가을 내음이 기꺼이 우리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합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결코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다시 사람이 되는 사랑을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을 통해 깨닫습니다. 그 사랑으로 쉽게 고백할 수 없는 고백을 하느님께 하게 됩니다. 고백 아닌 것이 없고 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고백은 사랑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뜨겁고 눈물겨운 고백 하나 하나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으로 알게 되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삶을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 내어주는 것이 참된 평화입니다. 하느님 외에는 그 어디에도 안전기지가 없음을 압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만나는 참된 사랑입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뒤늦게 깨닫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늦게야 사랑하게 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우리들이 다시 소중한 사랑이 됩니다. 방탕했던 갈증의 시간도 하느님을 향하는 좋은 은총이 됩니다. 좋은 사랑이 좋은 사람을 만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날 되십시오. 좋은 사랑이 끝내 가장 향기로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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