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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8/22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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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하느님, 성자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를 저희 어머니요 모후로 모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분의 전구로 보호를 받아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 자녀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2023년 8월 22일 (화)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8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마태 19,26)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마태 19,26) 마태오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판관기 6,11-24ㄱ)
    기드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9,23-3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8월 22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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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마태오 복음
19장 23-30절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4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7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30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8월 22일 (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조대윤 야고보 신부

 

📌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소개 00:05

📌 미사시작 01:26

📌 강론시작 09:54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8월 22일 (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7:34

📌 강론시작 17:48

 

 

 

팔로티회 매일미사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8월 22일 (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부의 위험성을 깊이 생각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전합니다. 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이에게 언제나 큰 걸림돌이 됩니다. 돈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거의 대부분 부가 가져다준다고 믿게 합니다. 부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보장하고 그것이 실현되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한 가장 올바른 풀이는 ‘불가능성’입니다. 부자도 심지어 가난한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이 많건 적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형제들에게 내놓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르려면 포기하여야 하는 일곱 가지 목록이 나옵니다(29절 참조). 거기에는 부모, 형제자매, 자녀, 곧 가족도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와 자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분명히 옳고 좋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일도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 안에 자기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앞에서 우리가 꼭 붙든 채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좋은 것이 많지만 그 가운데 참으로 좋은 것은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뿐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마르 10,21, 오늘 복음의 병행 구절). 

그 하나를 얻고자,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고자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 좋은 것들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잃지 말고 삽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의 정성이 곧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다.

 

병자성사를 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환자 교우의 상태에 대해 여쭤보니, 병원에서 이제 해야 할 치료가 없다면서 마지막을 잘 준비하라고 했답니다. 낮에 두 군데에서 특강이 있어서 곧바로 가지 못하고, 저녁 늦게 그 집에 방문했습니다. 다행히 형제님께서는 아주 밝으셨고, 또 기운도 넘쳐 보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얼마 안 남았다고 했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더군요. 
 
정성껏 병자성사를 드리고 성당에 돌아왔습니다. 그 가족에게는 매달 봉성체가 있으니 꼭 신청하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열흘쯤 지났을까요? 병자성사를 받은 형제님께서 선종하셨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빨리?’라는 생각과 함께, 병자성사를 드리기 전에 나눴던 대화가 마지막 대화였음을 깨닫습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과연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의 만남 뒤에도 계속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만남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만남이 마지막 만남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뒤로 미룹니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라는 말과 함께 말이지요. 
 
주님과의 만남에서도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성이 곧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만나기보다 세상을 만나야 하고, 주님의 일보다는 세상의 일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우리이기에 오늘 복음을 통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크게 와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기가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가 이 세상에서 말하는 억만장자를 비롯한 갑부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뜻보다 세상의 뜻을 더 중요해서 재물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권력과 재물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주님과의 만남을 소홀히 여깁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일에 매여 있으면 주님을 찾거나 청하지 않으며 또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에 온 정성을 쏟는 사람은 무엇보다 주님이 먼저가 됩니다. 그리고 그 보상을 백 배로 받게 되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에 정성을 쏟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정성을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이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맞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도 당신이 맞습니다.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 로저 베니스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우울해진 부자를 보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그 ‘크기’로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낙타의 크기이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늘귀보다 작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정말 크기가 다양합니다. 본래 우리의 크기는 태어날 때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우리는 숨만 쉬고 있어도 행복한, 그러나 낳아주지 않고 만들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본래 크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뜻은 이렇게 작아져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작아짐이 겸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성장하면서 세상의 영향으로 자기의 몸집도 키웁니다. 누군가의 자녀로, 누군가의 형제로, 누군가의 친구로, 무엇을 가진 사람으로, 어떤 스팩을 지닌 사람으로, 예쁜 사람으로 자신을 덮어씌워 갑니다. 이 껍데기들이 마치 양파처럼 자기 몸집을 키웁니다. 그것들이 마치 나의 살과 피가 되어 그것을 떼어내면 살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껍데기가 벗겨질까봐 두려워서 쉽게 화를 냅니다. 

창세기 6장에 나필족이라는 거인이 나오는데 그 거인은 하늘의 사람, 곧 바늘귀보다 작아서 하늘을 날 수 있는 크기였다가 땅의 여인들과, 곧 재물이나 애정, 명예 등과 혼인하여 자신의 몸집을 키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나필족은 노아의 배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처럼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바늘귀보다 작은 존재가 돼야 합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힌 사람 때문에 열 명이 처형을 당해야 하는데 죽기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가차 없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었습니다. 어차피 세상에서 잃을 게 없는 존재로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몸집을 줄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떻게 껍데기를 벗고 바늘귀보다 작게 되도록 하신다는 것일까요? 

그리스에 알렉산더대왕이, 몽골에 징기스칸이 있다면 인도엔 아소카 대왕이 있습니다. 아소카 대왕은 정복 군주이면서도 알렉산더나 칭기즈칸과는 다른 덕목이 있었습니다. 가장 잔혹한 살육자에서 평화주의자로 극적인 전환을 이뤘기 때문입니다. 

아소카 대왕은 인도를 침략한 알렉산더의 군대를 몰아내고 인도 최초의 통일왕국을 연 마우리아왕조 창건자 찬드라굽타의 손자입니다.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왕은 중앙인도와 데칸고원까지 넓힌 영토를 분할통치하기 위해 무려 16명의 부인을 맞아들여 101명의 왕자를 두었습니다. 아소카 대왕은 친동생 한 명만 빼고 이복형제 99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즉위한 8년 뒤 치른 칼링가 전투는 피의 전쟁이었습니다. 칼링가국은 코끼리부대까지 갖춰 찬드라굽타마저도 정복하지 못한 강소국이었는데 마우리아국이 벵골만으로 진출해 동남아와 스리랑카까지 교역로를 넓히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칼링가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본 아소카대왕은 다야강에 칼을 버리고, ‘이제 (전쟁의) 북소리의 정복자가 아닌 담마(진리)의 정복자가 되자’라고 다짐했습니다. 자신의 정복으로 인한 파괴와 인명 손실에 겁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도 합니다. 

“왕궁 베란다에서 어느 날 길거리를 내려다보던 아소카 대왕은 어린 사문(승려)이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는 왕위 계승 1순위였다가 독살당한 이복형 수시마의 아들 니그로다였습니다. 그로부터 짧은 ‘법구경’을 듣고 아소카 대왕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하나, 이복형에 대한 미안함으로 니그로다의 종교를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아소카 대왕이 없었다면 불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못한 채 인도에서 소멸했을지 모릅니다. 아소카대왕이 담마 사절단 혹은 전법사를 스리랑카는 물론 지중해 연안인 이집트, 그리스, 시리아까지도 파견했기에 한·중·일 삼국은 물론 동남아 전체에 불교가 전통 종교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제국 전역의 바위와 기둥에 새긴 일련의 칙령으로 ‘다르마’를 공포했습니다. 이 칙령은 비폭력,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 다양한 종교적 관행에 대한 관용, 인간과 동물 모두를 위한 병원 설립을 설교했습니다. 

아소카 대왕이 인도의 가장 강력한 폭군에서 인도의 가장 덕망 있는 왕이 된 데는 바로 그 자신이 찌르고 죽은 이들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그를 작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작아지는 방법은 나의 욕심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양심이 있어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 내가 작아집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나의 잘못 때문이었음을 안다면 어떨까요? 작아집니다. 껍데기를 벗어버리게 됩니다. 

아이가 작아질 수 있는 이유는 부모가 자신 때문에 받은 상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느 소매치기가 자신의 범죄 때문에 어머니가 수술하지 못해 죽었다면 그가 이젠 소매치기로 커지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죄로 인해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러면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유일한 구원의 힘이 되는 이유는 그분이 바로 나 때문에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작아짐을 느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분이 나의 죄 때문에 흘린 피를 묵상하면 됩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주님 수난 7기도’를 바치기를 강력히 권고합니다. 내가 작아져 결국엔 연옥도 거치지 않고 바늘귀보다 작은 문으로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게 만드는 기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받을 자격과 능력

 

어제 부자 청년이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떠난 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놀라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오늘 저는 이 말씀이 특별히 눈에 들어오며 이어 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받을 수 있는가? 라는 말은 본래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묵상 말입니다. 

예를 들어 투수가 던지는 공을 받을 수 있냐고 얘기하는 것은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얘기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받는 것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
도움을 받는 것.
사랑을 받는 것.
위로를 받는 것. 

이런 것이 다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의 예로 만일 구원과 도움과 사랑과 위로를 구원과 도움과 사랑과 위로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것으로 오해하면 받을 수 없겠지요. 

하느님의 구원과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우리는 오늘 판관기의 기드온처럼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지요. 

오늘 기드온은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시자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을 들먹이며 “지금은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셨습니다.”라고 답함으로써 구원을 버림이라고 오해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구원도 사랑도 도움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받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인데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첫째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사람을 믿건 하느님을 믿건 믿는 자가 받을 자격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사람을 믿지 못하다가 하느님도 믿지 못합니다. 

이 사람도 믿지 못하고 저 사람도 믿지 못하고 하다 보니 믿지 않는 것이 그의 천성처럼 되어버렸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는 사람이 받지, 원치 않거나 다른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면 받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로 버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이 아닌 다른 사랑과 구원과 도움은 버리는,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는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버리는 사람이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첫째가 되시는 예수님의 보호자가 계십니다. 다름 아닌 우리의 어머니 모후이십니다. 끝내 십자가와 어머니만 남습니다. 충분한 사랑이 필요한 십자가의 관계입니다. 십자가로 사랑의 땅을 경작하는 어머니입니다. 서로 십자가를 공유하시는 예수님과 어머니의 관계입니다. 다 내어주는 것이 삶의 참된 영광입니다. 

한 번도 만만한 시간이 없었던 어머니의 시간입니다. 신앙의 모후는 뜨겁게 십자가를 봉헌합니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은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는 너무나 적습니다.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어머니의 삶입니다. 말씀과 말씀 사이에 어머니가 계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듯이 꼴찌가 첫째가 됩니다. 오늘 어머니는 우리 삶의 모후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구원의 모후는 오늘도 우리를 위해 뜨거운 기도를 바칩니다. 십자가로 여인에서 어머니가 되십니다. 어머니와 함께 걸어가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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