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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7/17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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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2023년 7월 17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7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시편 성경 말씀 카드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시편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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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탈출기 1,8-14.22)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다.

  • 오늘 복음
    (마태오 10,34─11,1)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7월 17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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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복음
10장 34-42절 / 11장 1절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7월 17일 (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최해용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05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7월 17일 (월)
서울 명동대성당
매일미사 (오전 7시)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56

📌 강론시작 16:04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17일 (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15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18

📌 강론시작 14:19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7월 17일 (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15시)
매일미사 (16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1:16

📌 미사시작 1:00:11

📌 강론시작 1:08:1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허규 베네딕토 신부

 

합당한 제자가 되는 길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의 업적으로 표현된(이사 9,5-7 참조) 평화는 단순히 다툼이나 싸움이 없는 상태로 여겨지기보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평화는 죄를 넘어서고,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하거나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되찾은 상태를 말합니다. 칼은 글자 그대로 군사적인 의미에서 싸우는 도구가 아니라 칼이 주는 표상과 함께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리나 분열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평화가 아닌 칼’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됩니다.

일상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가족 관계입니다. 그 시대의 사회상을 생각하면 가족은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유대를 맺고 있었습니다. “칼을 주러 왔다.”라는 것은 비교를 위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자들은 가족에서 분리되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사회의 유대가 아닌 예수님과 이루는 관계가 먼저입니다. 제자가 되는 길에는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께 합당한 제자가 되는 길은 기존의 관계와 자신을 위한 길을 벗어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제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철저하게 스승을 따르는 자세입니다. 넓은 의미로 제자인 신앙인들도 비슷합니다. 그 길에는 다른 것에 앞서 말씀을 따르려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도둑놈은 도둑놈을 알아본다.

 

도둑놈은 도둑놈을 알아본다고 합니다. 운동선수도 상대방을 보고서 운동선수인지 아닌지 쉽게 알아봅니다. 공부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같은 계통에 살고 있으면 상대방을 알아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을 누가 알아볼 수 있을까요? 당연히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을 쉽게 판단합니다. 특히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 내릴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 모습이 맞다고 단정을 짓기 전에 자신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지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살지도 않으면서 하는 판단은 절대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둑놈이 도둑놈을, 운동선수가 운동선수를,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처럼, 상대에 대한 알아차림은 그 모습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누군가의 틀린 점을 발견했다면 내 안에 그 틀린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되돌아볼 수 있는 지혜와 겸손이 늘 필요합니다. 
 
‘내 안에 그 모습이 있구나. 그래서 이렇게 판단하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담고 있어야 할까요? 사랑을, 평화를, 친절을, 기쁨을….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서 내가 가진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뜻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을 통해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하신 첫마디가 ‘평화’일 정도로 평화를 강조하신 분이신데,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예수님께서 가져오실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악에 순응해서 얻어지는 거짓 평화가 아닌, 참된 평화를 가져오시기 위해 칼을 들어 거짓 평화를 잘라 버리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칼이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서 세상의 모든 악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편하고 쉬운 것,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수 있는 것만을 따르는 것이 아닌,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의 모습으로 보이는 자기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잠에서 깨어나라.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리라.

- 에페 5,14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두려운 양 떼가 되느니 외로운 늑대가 되련다.

 

강형욱 훈련사는 TV와 유튜브 방송을 하며 개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반려견을 키우는 이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냥 행복할까요? 요즘 그의 모습은 조금은 슬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는 훈련이 안 된 강아지들을 좋은 반려견이 될 수 있도록 훈련하고 많은 조언을 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견주들에게 화를 낼 때도 있고 호통을 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반려견을 떠나보낸 가족들에게는 위로도 해 줍니다. 

한 번은 성탄절 선물로 반려견을 잃은 가족들에게 그 반려견과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들어 선물로 위로를 해 주는 방송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의 사연을 들으며 자신이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도 얼마 전 반려견이 하늘의 별이 되었는데, 자신은 정작 삶에 치여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도 위로받고 싶었나 봐요….”

‘고독한 훈련사’에서 훈련사 24년 차에 찾아온 슬럼프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뭐라고 잘 키우고 있다 못 키우고 있다를 말할 수 있나…. 모르겠어요. 그냥. 아직도 개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배우고 싶고 세상의 모든 개를 만나고 싶어요. 나도 좀 위로를 받아보고 싶어요. 잘하고 있다고.”

최고가 되면 다 좋을까요? 이렇게 외롭고 고독합니다. 누구도 위로해주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의 위로가 있어야 하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계속 사람들에게 칼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혹은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최고에 있는 사람이 결국 주게 되는 것이 이러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안식이 없습니다. 다 안식을 요구하는 사람들만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도 이 세상에 칼을 주어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맞추기 위해,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목표를 낮추겠습니까? 

최고가 세상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의 생태 교란종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잘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교란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박해받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모든 이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무리에 속하는 것보다 옳은 방향으로 고독하게 나아가는 편이 낫습니다. 

백종원 씨가 나폴리에서 음식 장사를 하는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줄을 많이 섰는데 다 감당할 수 없을 때 생각해 낸 것이 ‘도시락’이었습니다. 굳이 그런 것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스태프들이 10유로에 먹는 도시락이 너무 허접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태리는 식사를 매우 오래하기 때문에 도시락으로 빨리 먹고 끝내는 것은 생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시락을 팔아도 그 상태가 매우 열악합니다. 실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는 비주얼이 좋은 도시락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폴리의 10유로 도시락을 전멸을 내고 가는 거야. 내 특기거덩, 시장 교란시키는 거.”

백종원 씨는 요식업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어떤 틈으로 들어가면 성공할 수 있는지가 보입니다. 그것이 보이면 그 시장은 교란 상황이 일어납니다. 최고는 어쨌거나 세상을 교란합니다. 그러면 그 세상에서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제거 대상이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들도 이와 같습니다. 돈과 맛있는 것, 명예욕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하면 이 세상에 누가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더라도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백종원 씨는 예산 국밥 거리에 분열이 일어나서 결국엔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또 골목상권에 독점이 심하다고 국회에 불려 가서 “의원님, 너무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 때문에 포기해야 할까요? 절대 그래 보이지 않습니다. 약한 양 떼에 속하느니 고독한 늑대가 되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차갑게 있느니 불을 지르는 사람이 되고 비겁한 평화 속에 머무느니 칼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칼을 주신다면

 

오늘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범상치 않습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주님은 일치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주님도 일치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 주님의 본 모습입니까? 주님께서는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주시고, 갈라서게 하시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잘못된 인연은 끊고, 잘못된 관계는 갈라서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관계와 하느님께 같이 가려 하지 않는 사랑은 아무리 서로 사랑하여도 잘못된 인연과 관계이기에 칼같이 끊고 갈라서라는 뜻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프란치스코가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려고 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자기 집 재산을 거덜낼 거라고 생각하였기에 프란치스코를 고소하고 상속권을 뺏으려고 했지요. 

이때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자기가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자기는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자유롭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고, 오늘 주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아들이나 딸이 주님과 일치하고 주님을 따르는 데 더 문제입니다. 부부의 인연은 잘도 끊고 부모와는 갈라서도 자식과의 관계는 못 끊는 것이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제가 짓궂은 질문을 엄마들에게 던진 적이 있습니다. 죽어 부활한 뒤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과 지금 내 자식의 엄마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지금 자기 자식의 엄마가 다시 되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자식을 수도원에 봉헌하라고 주님께서 하신다면, 그보다 더 아예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끊으라고 하신다면, 오늘 주님께서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그 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평화는 하느님이라는 중심을 지킬 때 더욱 예리하게 빛나는 살아있는 칼과 같습니다. 중심을 먹고 사는 평화입니다. 칼과 평화는 그래서 함께 공존합니다. 무딘 평화가 아니라 칼날처럼 깨어있는 평화입니다. 

깨어있는 칼은 이미 평화의 다른 이름입니다. 어디에서 우리는 평화를 찾고 있는 것입니까.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만나는 평화입니다. 자르지 않고서는 죽지 않고서는 결코 밥이 될 수 없는 평화입니다. 

칼다운 칼이 되는 평화입니다. 주님의 칼이 되어 중심에서 결코 빗나가지 않습니다. 평화를 향하는 길이 하느님께 집중해야 하는 칼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칼이 지나간 길이 십자가의 평화입니다. 

아직도 하느님께 집중하지 않는 우리들 삶입니다. 악습을 도려내는 칼은 평화를 지키는 평화의 이치입니다. 잘라내고 도려내고 끊어내는 자아의 죽음이 참된 평화임을 아시기에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우리에게 복음의 칼을 주십니다. 

깨어있는 평화는 시들지 않으며 잘 벼리어 진 칼처럼 하느님을 비춥니다. 분산이 아니라 집중의 칼입니다. 중심을 다시 잡는 오늘의 평화 주님의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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