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목자, 당신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네. 당신 양 떼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네. 알렐루야.
주님, 주님의 오른팔로 주님의 가족을 영원토록 감싸 주시어 외아드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저희가 어떤 죄악에도 물들지 않고 천상 은총을 얻게 하소서.
2023년 5월 8일 (월)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5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5주간 월요일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리라. (요한 14,26)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14,5-18)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헛된 것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4,21-26)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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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리라.
복음
요한 14장 21-26절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5월 8일 (월)
전호준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32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5월 8일 (월)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42
📌 강론시작 17:3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8일 (월)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3:56
📌 강론시작 12:49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8일 (월)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0:51
📌 미사시작 1:00:55
📌 강론시작 1:10:34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강수원 베드로 신부
사랑으로 가는 첫걸음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설교하면서 앉은뱅이 하나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태어나 걸어 본 적이 없던 그가 복음을 들으려고 집을 나서서 복잡한 군중 틈에 끼어들기까지는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보았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는 이’에게는 반드시 하느님의 현존과 기적이 따르지만, 기적이 꼭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본 군중은 사도들을 이교 신들로 오해할 뿐, 복음을 전하여 듣고도 정작 바오로가 돌팔매질을 당할 때 그를 내버려 둡니다(14,19 참조).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많은 이가 이 시대에 믿음을 가지기가 어렵고 모호하다는 핑계를 대지만, 주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첫걸음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계명과 규정’이 ‘의무와 속박’으로 괴롭게만 느껴지거나 자신이 지킬 계명이 무엇인지 의식 없이 사는 사람은 아직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태 22,36-40 참조])과 ‘새 계명’(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을 주셨고, 당신의 말씀과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아버지와 함께 가시어 그와 더불어 사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앉은뱅이 같은 내가 하느님의 현존과 기적에 가닿는 길은 주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삶에 있습니다. 지혜가 간절한 순간마다 하느님의 뜻을 일깨워 주시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협조자 성령께 의탁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수신거부
휴대전화가 울립니다. 휴대전화의 주소록에 등록되지 않은 ‘053’으로 시작하는 지역번호로 시작하는 번호였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저의 경우는 받지 않고 ‘수신 거부’를 합니다. 제가 사는 곳 지역번호는 ‘032’이고, 지역번호 ‘053’은 대구이니 저와 아무런 연관이 없기 때문이지요. 혹시 강의 문의로 전화한 것인가 해서 받은 적도 있었지만, 항상 스팸 전화나 보험, 대출 권유의 전화였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전화를 받았다가 ‘이렇게 좋은 상품을 받으려고 하지 않느냐?’면서 상대로부터 무시하는 말을 들으면서 기분이 아주 안 좋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제는 무조건 모르는 번호는 ‘수신거부’합니다. 이제 전화로 인한 스트레스는 없어졌습니다. 하긴 택배도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품이나 수취거부를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내뱉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도 이런 방법을 쓰면 어떨까요? 부정적인 말과 행동으로 내게 다가오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힘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처를 만들지 않고 돌려주면 됩니다. 자신이 받지 않았으니 내 것이 아니라, 상대의 것이 되고 맙니다.
많은 성인 성녀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가까이에 두고 또 죄를 받아들이면 사랑이신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의 유혹이 다가왔을 때, 흔쾌히 받아들여서 나의 죄가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거부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달콤한 유혹이고, 정말로 내게 큰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예 발을 내딛지 않도록 시작부터 거부해 버리면 갈등의 시작도 없습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주님의 사랑은 당신의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시는 너무나 큰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 이후 많은 혼란에서 힘들어할 제자들을 위해 성령을 약속해주십니다. 이 성령을 보내시어 사도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성령은 과거에 일회적으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이 성령을 받은 우리는 용기를 내서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와 악은 철저히 수신거부하고 선이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1독서에도 나오지만, 과거 사도들이 박해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과만 함께하는 사람은 이렇게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이가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작은 일을 소중히 여겨라. 모든 것은 사소한 일에서 출발한다. 씨앗이 하늘을 찌르는 큰 나무가 되는 것을 보라. 행복도, 불행도, 성공도, 실패도 모두 그 처음은 조그만 일에서 시작된다.
- 랠프 월도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말씀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 곧 성경 말씀이 율법이고 하느님 뜻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면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알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유다 지도자들은 그 성경 말씀을 공부했음에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말씀을 해석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해석한다는 뜻은 내가 그 말씀을 한 이보다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라는 짤막한 질문으로 예수님과의 대화를 급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진리란 세상이 창조된 원리입니다.
스마트폰의 원리는 그것을 창조한 인간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가 스마트폰을 해석하려 든다면 어떨까요? 그냥 과일을 깨 먹는 도구로밖에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만든 인간이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사용 설명서를 쓸 것인데 이것이 성경 말씀과 같습니다.
아이는 그 설명서에 순종하여 스마트폰을 사용해보면 그 원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진리가 그 아이에게 밝혀지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고 설명서의 의미를 해석하려 든다면 자신이 그 스마트폰을 만든 사람보다 뛰어나서 스마트폰을 옳게 만들었는지를 심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부모의 말을 해석할까요?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합니다. 해석하려 드는 즉시 아이는 부모 위에 서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사람 수만큼 많습니다. 각자가 하나인 세상을 각자의 주관대로 해석하여 어떤 사람은 세상은 돈이 없으면 안 되는 곳으로, 어떤 사람은 명예가 꺾이면 안 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무시당하면 안 되는 곳으로, 어떤 사람은 마치 컴퓨터 게임과 같다고 믿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세상에 자신을 맞추어 살고 그 세상에 합당하게 변해갑니다.
오직 성모 마리아만이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순종’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천사의 말에 ‘인간이 어떻게 감히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며 말씀을 해석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그것을 이해하거나 해석하고 분석하려 들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순종하려 든다면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성령은 사랑이신데 사랑은 사랑할 자격을 갖춘 이에게 오십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말씀을 잉태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말씀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어린 소년이 학교에서 편지 한 장을 가져왔습니다. 아이는 선생님이 편지를 줬다며 엄마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잠시 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이 학교는 그를 가르치기에 너무 작은 학교이며 좋은 선생님도 없습니다. 당신이 아이를 가르쳐주기를 바랍니다.”
엄마는 교사의 말을 따랐습니다. 병에 걸려 죽는 순간까지 직접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어머니가 떠난 지 수 년이 지나, 아들은 유능한 발명가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의 유품들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보냈던 그 편지도 놓여있었습니다. 그는 편지를 펴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저능아입니다. 우리 학교는 더 이상 이 아이를 받아줄 수 없습니다. 아이에게 퇴학 처분을 내립니다.”
아들은 편지를 읽고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다이어리에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습니다.
“토머스 에디슨은 저능아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 시대의 천재로 변화시켰다.”
이 이야기는 토머스 에디슨의 어린 시절에 관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화입니다. 실제로 에디슨의 어린 시절에 관한 공식 기록에서는 이러한 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한쪽 귀가 안 들리고 몸도 온전치 못한데 쓸데없는 호기심만 많은 아이를 무시하는 학교와 선생님들에게 화가 난 어머니가 아이를 집에서 직접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아이의 머리가 썩었다느냐 저능아라느니 아이를 무시했지만, 어머니만이 그를 이해해주고 믿어주었습니다. 아이는 선생님이 아닌 어머니 낸시의 말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엔 자신이 믿는 대로 되었습니다.
어머니만큼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머니의 말씀은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의 말씀은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시고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자신이 피땀 흘려 만든 작품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창조자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결국 창조자의 본 모습을 알아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창조자의 사랑이 피조물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라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의 말씀에 “아멘!”(Fiat)이라고 하시는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께서 잉태되시는 것과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 안에 말씀을 잉태하게 하신 성령께서는 이제 성모 마리아께서 방문하신 엘리사벳도 성령으로 가득 차서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게 하셨습니다. 에디슨도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사랑의 힘으로 커다란 업적을 이뤄내고 기뻤을 것입니다. 이 기쁨이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성모님께서 ‘마니피캇’을 노래하실 때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심을 바라보는 순간입니다. 에디슨이 “얘야,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단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정말 실현하고 나서야 어머니의 마음을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에 먼저 순종하고 나서야 그 뜻을 이해하고 그렇게 말씀하신 분의 마음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보아야 진정으로 그 사람을 본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말씀 묵상이란 말씀을 해석하기 위함이 아닌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을 듣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라고 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기 위함이 아니라 순종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믿음의 순종은 이해가 되어서가 아니라 겸손해서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의 말씀은 순종하였을 때 ‘기쁨’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럼으로써 진정 그 말씀을 하신 분의 본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묵상을 통해 성경에서 어떤 새로운 진리를 찾아내려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기에 합당한 겸손을 기르기 위함이 묵상기도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라고 하신 말씀은 해석이 아닌 순종해야만 행복할 것이란 뜻입니다. 진리의 본모습은 이렇게 순종하는 이에게서 드러나고 자기가 만든 거짓된 세상에서가 아닌 진리의 세상 안에서 사는 사람은 그 창조자의 목적대로 변화되어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받는' 과 '하는'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오늘 주님 말씀을 묵상하다가 '받아'라는 말에 눈이 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저 '계명을 지키는 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라고 하시는데 주님 사랑과 계명 준수 사이에 어떤 단계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ㅈ차치하고 받는 것조차 아예 거부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겁니다.
가끔 사고 싶지 않은 것을 사지 않아도 좋으니 한번 보시기라도 하라며 억지로 보내겠다고 하면 저는 아예 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받아서 보고 좋으면 사고 안 좋으면 안 살 것이 아닌, 결코 사고 싶지 않고 결국 사지 않을 것을 괜히 받았다가 돌려보내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도 지킬 생각이 아예 없으면 계명을 아예 받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 아예 받지도 않는 사람은 주님을 조금도 사랑치 않는 사람일 겁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다른 백성들이 자기들의 신을 만들고는 그 신에게 경배하였는데 바로 그런 꼴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신명기 4장에서 이렇게 얘기하지요.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모세는 잡신이나 우상이 아니라 하느님같이 위대하신 분이 법 나부랭이가 아니라 진짜 위대한 법규를 다른 민족에게는 주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것은 대단한 영광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위대하신 분이 다른 사람에겐 주지 않고 내게만 주신다면 대단한 영광이고, 또 주신 것이 대단한 것이라면 더 대단한 영광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하느님을 위대한 분으로 생각지도 않고 법규도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니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차버리지 않고 받아들인 것은 주님도 사랑하는 것이고 계명도 고마운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계명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은 그만큼 주님을 사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받아놓기는 하고 지키지 않는다면 그만큼 덜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계명이라고 하면 어쩐지 거부감이 있습니다. 의무나 강제와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그렇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주님의 계명이 의무나 강제로 느껴지는 것인데 그렇기에 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주님 마음에 들고 싶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주님의 계명을 기꺼이 실천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주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주님의 계명도 초월할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계명을 주시지 않을 텐데 그것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계명을 주시기 전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먼저 알아서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알고서도 그 원하는 것을 스스로 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치 않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저는 사랑치 않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랑한다고 하기 어려운 저임을 성찰케 되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오늘입니다.
어제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제목만 올라가고 강론 내용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강론은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아무튼, 어제 강론 올리지 못한 것에 대해 양해 바라고, 앞으로도 예고 없이 강론 올리지 못하면 그런 이유 때문인 줄 아시고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성령께서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초록으로 더욱 깊어지고 번지는 감사의 날 어버이 날입니다. 감사의 길로 나가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진심어린 감사가 사라지면 진심어린 나눔도 사라집니다. 기억하는 것만큼 감사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사라지는 시간 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기억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사랑의 역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법이 감사와 기억임을 뜨겁게 배웁니다. 기억으로 연결된 사랑의 일상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기억이 오늘을 살게하는 참된 고백이 되고 기도가 됩니다. 지나간 시간이 선물이듯 지금의 시간은 간절한 감사입니다. 끊어지고 이어지는 삶의 역사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참된 사랑을 믿는 우리들입니다. 어버이의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드립니다.
그리움과 감사는 사랑으로 더욱 뜨겁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가르침과 기억으로 더욱 깊어집니다. 모든 사랑에 기억과 감사의 카네이션을 달아드립니다. 어버이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기도하는 사랑의 새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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