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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5/04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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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당신 백성에 앞장서 나아가실 제, 그들 가운데 사시며 길을 열어 주실 제, 땅은 흔들리고 하늘은 물이 되어 쏟아졌나이다. 알렐루야.

하느님, 사람을 구원하시고 처음보다 더 영광스럽게 하시니 자비로이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시고 세례로 새로 난 저희에게 영원한 은총과 복을 내려 주소서.

 

2023년 5월 4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5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7)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13,13-25)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3,16-20)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5월 4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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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 죄를 씻어 주셨네.

 

 

복음
요한 13장 16-20절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5월 4일 (목)
김민회 시몬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8:31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5월 4일 (목)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23

📌 강론시작 15:22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4일 (목)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26

📌 강론시작 14:41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4일 (목)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0:1

📌 미사시작 0:58:53

📌 강론시작 1:07:58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강수원 베드로 신부

 

아버지와 하나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순간마다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을 다스려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처럼 풍랑 치는 바다를 잠재우실 때도(마태 14,27 참조), 당신을 믿도록 백성을 설득하실 때나(요한 8,24.28 참조) 최고 의회에서 심문받으실 때도(루카 22,70 참조), 언제나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시며 ‘아버지와 하나’이신 당신의 신원을 깊이 의식하셨습니다.

죽음이 가까웠음을 아신 주님께서 시편 말씀을 들어(41[40],10 참조) 유다의 배반을 미리 알려 주신 것은, 제자들에게 배신당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에게서 ‘힘없는 하느님’이 아닌 “나는 있는 나”이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올바로 바라보도록 사랑하는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신 일이었습니다.

몸을 굽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이 그분께 수치와 굴욕이 아니었던 것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깊은 자의식에서 온전한 자유와 사랑으로 하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벌거벗은 원조에게 가죽옷으로 수치심을 가려 주신 아버지의 그날처럼, 주님께서는 오해와 무지와 배반으로 때 묻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성부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온전히 보여 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원 경륜의 정점에서 사명을 완수하고서도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며 종보다도 더 낮은 이로서 겸손을 보여 주었습니다(제1독서 참조). 

주인의 발을 받쳐 들어 더러움은 씻어 내고 상처에는 기름을 발라 주는 종의 마음으로 가족과 이웃을 섬기며 겸손하게 살아간다면, 우리도 반드시 주님처럼, 나를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어느 신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새로운 소임지를 받아서 부임했는데 계속해서 불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런 곳에서 사목할 사람이 아니라며 이곳에 온 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편하고 쉬운 곳, 또 화려함을 가져다주는 곳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모욕과 박해를 당하고, 힘들고 어려움이 가득한 곳이라도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기억하며 기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니, 결국 주님 말씀을 따르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 신부만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복잡한 세상에서 억울한 일은 늘 계속됩니다. 가족 안에서, 친구들과의 관계 안에서, 직장이나 교회 안에서 억울한 일은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억울함에만 갇혀 있으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누군가로부터 무례한 대우나 괴롭힘, 냉소 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가 바로 주님과 함께할 때이고, 자신이 한층 더 성숙할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계속해서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잠 못 이루고, 피폐한 삶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찾으면 주님을 보지 못하고 불평불만만 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그때 제자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실 수 있는가?’ 특히 이는 종이 주인에게 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행동 강령을 제시해주신 것입니다. 
 
권력 지향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솔선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억울하다며 불평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계명을 따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억울한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은 그만큼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신 주님이시기에 주님과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늘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욕심을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열린다.

- 에피쿠로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구원과 은총을 보는 눈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그저 같이 사는 한 인간으로만 받아들입니까? 어떻게 인연이 되어 동반자가 된 사람으로 받아들입니까?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더 특별한 사람 곧 예언자로 받아들입니까? 

그저 같이 사는 한 인간 정도라면 어쩌면 소와 닭처럼 무심할 것이고, 동반자라면 이 세상 사는 동안 서로의 삶을 의미 있게 할 짝이 될 것이고, 예언자로 받아들인다면 서로를 통해 구원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격려를 청하는 사람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하신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아주 장황하게 들려줍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으며 얼마나 많은 예언자를 보내셨는지를 얘기한 다음 마침내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셨음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는 구원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는 비 구원의 역사가 훨씬 더 많고, 우리의 역사 안에도 구원보다 비 구원의 역사가 더 많습니다. 

이 비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없이 많은 예언자를 우리 구원을 위해 보내셨고, 결정적으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지만 그들을 예언자와 구세주로 맞아들이는 데 우리가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역사가 내 구원의 역사가 되려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그저 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로 내게 보내신 사람임을 알아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는 마치 성사가 사효적이지만 성사의 효력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효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도 그렇고 성사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은총도 그런데 그것은 마치 햇빛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신다고. 그러나 그늘에 있는 사람, 아니 골방에 처박혀 있는 사람에게는 햇빛이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햇빛이 싫은 사람, 그가 악한 사람이고 그는 은총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비가 좋고 그래서 비를 맞는 사람, 그가 선한 사람이고 그는 은총의 비를 맞을 것입니다. 

은총이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그런데 빛이 빛일 뿐 은총이 아니고 비가 비일 뿐 은총이 아닐 수도 있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한 인간일 뿐 구원이 아니고, 이웃도 귀찮은 자일 뿐 은총이 아닐 수 있으며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나의 눈은 구원을 알아보고 나는 은총을 받는 존재인지. 

나는 시메온처럼 지금 노래할 수 있는지, 지금이 아니면 죽기 전에라도 그럴 수 있는지.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ㅡ 

어제는 제가 어처구니 없는 큰 실수를 하여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 강론을 올리지 않고, 부활 강론을 올렸습니다. 

이러는 수도 있구나 하며 어제는 저에 대해 약간 허탈해 했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하셨을 것이라고 믿지만, 그러나 죄송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신앙의 탄생은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 맞아들이는 탄생입니다. 맞아들이는 것이 행복입니다. 맞아들이는 신앙으로 그 무엇도 연연할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반목과 대립이 상생과 웃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행복해야 할 신앙의 삶입니다. 함께 하기에 행복한 우리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인 사람은 함께 있어 행복합니다. 행복을 빠져나가게 하는 이기심은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 이기심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요히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사랑으로 견디어 내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성당에 많은 시간을 다니고도 여전히 인간적인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예수님을 맞아들인 적이 없는 우리들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넘어오시며 우리 마음을 씻어주시는 주님께 이 모든 마음을 봉헌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닌 예수님의 마음을 맞아들이는 행복의 시작입니다. 신앙과 행복 마음과 사랑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우리에게서 빠져있는 것이 사랑임을 깨닫는 오월의 새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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