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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4/30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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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여셨네. 알렐루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앞장서 가신 나라로 나약한 양 떼인 저희를 이끄시어 하느님과 함께 천상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2023년 4월 30일 (일) 부활 제4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4주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요한 10,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요한 10,9)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2,14ㄱ.36-41)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 제2독서
    (베드로 1서 2,20ㄴ-25)
    여러분은 영혼의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0,1-10)
    나는 양들의 문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4월 30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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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복음
요한 10장 1-10절

 

나는 양들의 문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30일 (일)
전진 세례자요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5:11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30일 (일)
리백진 파비아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53

📌 강론시작 17:49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30일 (일)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도둑과 강도.

 

목자에 관한 예수님의 담화는 오늘 복음에 앞서 소개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의 논쟁(9,40-41)에서 시작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눈먼 자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자기만족과 교만으로 그들은 죄인으로 단죄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 머물러 있는 바리사이들에게 목자에 관한 이야기로 가르치십니다.

먼저, 목자에 관한 비유에서는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도둑과 강도’입니다. 그들은 양 우리로 들어갈 때 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 양들을 훔치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다른 부류는 ‘양들의 목자’입니다. 목자는 도둑이나 강도와는 달리 문으로 들어가서 양들의 이름을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고, 양들은 그를 따릅니다. 이처럼 목자가 양들에게 가는 이유는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비유에 이어지는 가르침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양들의 문’으로 계시하십니다. 앞선 비유에서 ‘문’은 양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상징되었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문’으로 소개하십니다. 양들은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좋은 풀밭으로 갈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의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주시는 중개자이십니다. 여기서 도둑과 강도는 예수님과 대립하는 바리사이들을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은 ‘양들의 목자’이자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을 조금 더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그분의 안내를 받을 수 있고, 그분을 통하여 풀밭으로 들어갈 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목자이신 예수님뿐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양 우리에 들어가는 두 부류의 사람

 

성당에서 나와 마트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몇 개의 신호등이 있습니다. 이 신호등 때문에 약간의 불편을 겪기도 합니다. 차가 전혀 없는데도 신호를 한참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눈치 보며 건너가는 것입니다. 누가 하면 나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 역시 급한 마음에 그분을 따라서 무단 횡단을 하려고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갑자기 커다란 경적이 울립니다. 진행 신호를 보고 멀리서부터 속도를 높여서 차 한 대가 달려온 것입니다. 진짜 위험했습니다. 몇 초 빨리 건너가려다가 정말 빨리 하느님 나라에 갈 뻔했습니다. 
 
적색 신호등은 분명히 정지 신호입니다. 당연히 멈춰야 합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고 커다란 혼란이 다가옵니다. 문득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즉, 우리 삶 안에서도 잠시 멈춰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옳지 못한 길일 때에는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눈치 보면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면서 말이지요. 또 그 멈춤의 시간이 고통스럽다면서 그냥 앞으로만 가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적색 신호도 어느 순간에는 녹색 신호로 바뀝니다. 영원히 적색 신호만 있는 신호등이 없는 것처럼, 고통과 시련으로 멈출 수밖에 없는 그 순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녹색 신호로 바뀌어서 다시 힘차게 나아가는 때가 분명히 옵니다. 그래서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라는 멈춤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완전히 멈췄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부활이라는 녹색 신호로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며, 지혜롭게 지금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께만 희망을 둘 수 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말씀해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양 우리에 들어가는 두 부류의 사람을 비교합니다. 하나는 양들의 목자이고,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도둑, 강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성경에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도둑’이라고 했고(요한 12,6), 예수님 대신 사면받은 바라빠는 ‘강도’라고 했으며(요한 18,40),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장사치들을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즉, 도둑, 강도는 모두 하느님 이름 밑에서 탐욕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름 붙여 부르는 당시 양치기 생활의 관습이었지요. 그만큼 양들을 소중하게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랑을 받은 양이 목자의 목소리를 외면할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모든 것을 내맡기고 우직하게 따라갑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들리면 산산이 흩어집니다. 우리는 과연 목자를 충실하게 따르는 양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요? 혹시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탐욕을 추구하는 도둑과 강도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또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따를 수 있는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소주일인 오늘, 우리를 부르심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떻게 말할까'하고 괴로울 때는 진실을 말하라.

- 마크 트웨인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분 목소리는 필요할 때 들린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기도 하고 착한 목자 주일이며 그래서 성소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이는 어쩌면 예수님의 양들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긍정하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우리 선택입니다. 내가 선택해야 상과 벌이 정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 목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제가 군대 있을 때 운전병을 하였습니다. 군대 차들은 그렇게 정밀하지 않기 때문에 고장으로 인한 사고가 자주 발생합니다. 그래서 항상 귀를 쫑긋 세우고 운전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엔진의 이상한 소리나 나사가 풀려 나는 소리 등을 무시하면 커다란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소리는 더 잘 들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록펠러는 크리스천이고 가장 큰 부자였지만, 나눌 줄을 몰랐습니다. 성경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라고 나와 있지만 그는 고집쟁이였습니다. 그가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서야 이 말씀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나눌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병도 치유되었고 새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분 목소리가 들리려면 내 목소리를 부정해야 합니다. 하와는 뱀의 목소리를 살려두었습니다. 아담은 하와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목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님께 청할 뿐이지 그분으로부터 이래라저래라하는 말씀은 듣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순종’하기 위해 기다립니다. 

이승복 박사는 어렸을 때 미국에 이민해 와서 미국 대표 기계체조 선수가 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까지 노려볼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만 연습 도중 척추가 망가져 손가락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식물인간이 됩니다. 이때 어떤 선교사가 그렇게 된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고 분명 이것을 통해 큰일을 하실 것이라는 말을 해줍니다. 다른 때 같아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는 이 목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음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공부하여 의대에 가고 존스 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 과장이 됩니다. 
 
양은 멍청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앞도 제대로 안 보이고 냄새도 잘 못 맡습니다. 힘도 없어서 맹수들에게 이만큼 좋은 먹잇감은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없으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서 알아듣는 것보다는 그러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알아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그 한 말씀이 없으면 나의 영혼은 죽은 목숨이라는 뜻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 말씀을 해주시고 우리를 살리십니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말씀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지, 안 들어주시는 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방향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그분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따를 힘입니다. 

어떤 병원장 사모님은 매우 돈도 많고 어릴 적부터 성공만 거듭하여 남부러운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천주교 신자였음에도 점을 치러 다니고 비싼 집과 비싼 차, 그리고 비싼 옷을 즐겨 입으며 으쓱하게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의 병원에서 의료사고가 발생했고 그 당사자는 우리나라 준재벌이었으며 원상태로 고쳐놓지 않으면 이 병원을 망하게 하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사모님은 하느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자기의 목소리와 비슷한 무당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 뜻대로 살아왔던 것이 어떤 고통을 주는 지 알았기 때문에 이제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할 때 “사~랑~한~다~”라는 말을 듣고는 완전히 회개합니다. 

병원이 잘 되건 안 되건 그건 상관없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주님의 말에 보답하고 싶어서 본당에 가서 가장 비천한 봉사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일도 잘 풀렸습니다. 

 그분 목소리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 나를 믿지 맙시다. 그러면 나와 비슷한 목소리도 믿지 않게 되고 오로지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그분 목소리만이 귀하게 여겨지고 비로소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착한 목자에게 합당한 사람은 착한 양이 되는 신앙인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는 어떤 성소자?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성소 주일을 맞아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좋아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부르면 좋아하지 않거나 겁을 냅니다. 제가 부르면 늘 일을 시키기 때문이지요. 

이런 생각 다음 누가 부르면 좋아할까도 생각해봤습니다. 깡패가 부르면 당연히 싫어하겠지만 예를 들어 애인이 부르는 것과 어머니가 부르는 것과, 주님이 부르는 것 가운데서 어떤 것이 좋아할까 말입니다. 

지난주 수녀님들 피정을 동반할 때 “공동생활”이 주제였는데 피정의 집 동산에 꽃이 만발했기에 다음과 같은 묵상 거리를 드렸습니다. 

꽃을 보면 그 아름다움을 같이 보고 싶은 존재가 있는가? 아무도 없는가? 같이 보고 싶은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인가? 같이 사는 자매인가? 밖에 사는 누구인가? 

아무튼, 이때 떠오르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로 엄마나 애인이 부르는 것보다, 주님이 부르는 것이 좋으면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그 반대이겠지요. 

그래서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왜 부르시고, 우리는 주님과 어떤 관계인가? 주인과 종의 관계인가? 아니면 목자와 양의 관계인가? 

주인과 종의 관계라면 주님께서 일을 시키려 부르실 것이고, 목자와 양의 관계라면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려 부르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와 주님 관계가 그 어떤 것 하나인지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요. 주님과 우리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 둘 다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먹이지도 않고 일을 부려 먹는 분이 아니라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라거나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당신에게로 부르시고 당신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나만 부르지 않으시고 열두 사도를 같이 부르시고, 목자가 한 마리 양이 아니라 양 떼를 부르시듯 같이 부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성찰케 됩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나는 혼자 가고 싶은가? 누구와 같이 가고 싶은가?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인가? 다른 누구인가? 

부부라면 지금 주님께로 같이 가는 동반자인가? 아직도 서로를 향할 뿐 주님께 같이 가지 않는 관계인가? 자식들은 어떤가? 같이 주님을 향하는가? 서로를 향하는 관계인가? 

수도자라면 나는 혼자 주님께 가도록 부르심 받은 독수자인가? 같이 주님께 가도록 함께 부르심 받은 공동체 수도자들인가? 

다음으로 우리는 소명을 받드는 주님의 일꾼들이라는 것을 보겠습니다. 소명이라는 말 자체가 성소적인 표현입니다. 

소명의 소자와 성소의 소자가 부르심이라는 같은 뜻이고, 명령을 받들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요, 부르심을 받아 명령을 받드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주님의 종이요 일꾼들이고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설마 일꾼은 싫고 사랑만 받겠다는 얌체나 어린아이는 아니겠지요? 일을 시킬까 봐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을 살살 피하는 나는 아니겠지요? 

이것을 돌아보게 되는 오늘 성소주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소자가 많기를 기도하는 오늘 성소주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입구와 출구는 모두 우리 주님께 있습니다. 막힌 문을 열어주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이십니다.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사제가 되고 수도자가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장 깊은 관계는 부르심의 관계입니다. 부르심의 관계는 사랑하지 않으면 걸어갈 수 없는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픔도 없습니다. 

성소(聖召)의 삶은 사랑과 함께 자라나는 삶입니다. 어제의 부르심보다 주님을 향한 오늘의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먹여 키우십니다. 다른 나로 태어나는 순간들을 맛보며 우리는 살아갑니다. 더 이상 제 자신과 싸우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시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이제는 서두르지 않고 마음의 길을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걸어갑니다. 드라마틱한 성소의 삶을 위해 두 손을 모아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광야도 풍랑도 목초지도 잔치도 시골도 도시도 모두 성소의 삶이었습니다. 한세상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치있는 일을 하며 기쁘게 살렵니다. 

하나의 기적이 한 사람의 성소에서 시작되었음을 믿습니다. 이 시대 이 땅의 소중한 사제와 수도자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리는 마음의 성소주일입니다. 행복한 사제와 행복한 신자분들이길 뜨겁게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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