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슬기롭고 지혜로운 동정녀는 등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갔네. 알렐루야.
하느님, 복된 가타리나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교회에 봉사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여 세상에 드러난 그분의 영광을 보고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2023년 4월 29일 (토)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오늘 성경 말씀 카드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요한 6,67)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9,31-42)
교회는 굳건히 세워지고,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 오늘 복음
(요한 6,60ㄴ-69)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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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복음
6장 60ㄴ-69절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60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29일 (토)
최남식 베드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1:14
📌 강론시작 09:16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29일 (토)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19
📌 강론시작 15:07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29일 (토)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5:04
📌 강론시작 14:26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29일 (토)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믿고 따를 때 이해된다.
오늘 복음으로 생명의 빵에 관한 사건과 담화가 마무리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곧 생명의 빵에 관한 담화를 들은 제자들의 서로 다른 반응을 중심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전개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일부 제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생명의 빵’으로 당신을 계시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군중이 수군거렸던 듯이(6,41 참조),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거부하며 그분을 떠나갔습니다.
반면에,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곁에 머물고자 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열두 제자입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 머무르려는 이유를 밝힙니다.
먼저, 예수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생명을 주시는 말씀으로 고백합니다. ‘말씀’은 ‘영’과 함께 생명을 주는 요소입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이는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호칭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맺는 유일무이한 결속 관계(3,2; 5,19; 10,30 참조) 또는 하느님께 속한 예수님의 신적 신분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원천이시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부류의 제자들은 우리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를 거부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들을 구분 짓는 요소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 몸에서 제일 똑똑한 곳은?
우리 몸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당연히 생각하는 뇌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뇌과학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뇌가 그리 똑똑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또 복잡한 것 같지만 너무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뇌를 속이기가 쉽답니다.
우선 뇌는 진짜 행복과 가짜 행복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가짜로 웃고 있는데도 뇌는 ‘지금 행복하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짜로 울고 있거나 자주 화를 내고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되면, ‘지금 불행하구나’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실제로 행복과 불행의 느낌은 평소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뇌가 어떻게 받아들이냐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떻게든 웃고, 어떻게든 긍정적인 말을 행동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뇌가 ‘지금 행복 중’이라고 표시합니다. 이렇게 웃음 짓는 사람 곁에 어떤 사람이 함께하고 있을까요?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함께 다니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함께하게 됩니다.
‘죽고 싶다. 환장하겠다. 미치겠다. 화가 너무 나.’
이런 말로 가장 힘들어지는 것은 결국 ‘나’뿐입니다. 뇌는 불행을 말하는 사람에게 ‘불행’을 기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왜 부정적으로만 생각할까요? 진짜로 손해 보는 것 같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뜻은 곧 사랑의 삶입니다. 기쁨과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무조건 내게 도움이 되는 삶입니다.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만을 보고 있기에 신앙 자체를 포기할 뿐입니다. 결국 손해는 온전히 자기 몫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의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육적인 말씀으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영원한 생명을 본성으로 하고, 육적인 것은 썩어 없어지는 것을 본성으로 합니다. 그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거북한 말씀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수준 낮음은 생각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완고함을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 손해는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자신에게 그 손해가 온전히 돌아갈 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그 모든 것은 철저히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으로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마음으로 믿음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긍정적인 행복의 마음이 진짜 행복을 내게 전해줄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지금이 최악이라고 말할 힘이 있다면 아직은 최악이 아니다.
- 윌리엄 세익스피어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회개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보이는 특징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거북하여 그분을 다 떠나갑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도들은 이렇게 말하며 그분 곁에 머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도대체 유다인들은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고도 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일까요? 또 사도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요? 이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바오로 사도는 영적인 사람을 내적인 인간이라 하고 육적인 사람을 외적인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인간은 영혼을 살리려는 사람이고 육적인 인간은 육체를 살리려는 사람입니다. 관심사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를 살리려고 하면 다른 하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 4,16)
그리고 영적인 인간과 육적인 인간이 나뉘게 되는 방식은 아버지의 이끄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 아버지를 상징합니다. 그의 아들 이사악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에 합당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은 당신 종을 보내십니다. 그 종들을 통해 육적인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이 된 이들을 아버지는 아드님과의 결합으로 초대하십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자신의 종을 시켜 레베카를 이사악에게 인도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이미 영적인 인간이 되어있어야 합니다.
육적인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이 되는 순간을 ‘회개’라고 합니다. 육적인 인간은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합니다. 삼구는 우리 육체를 살리기 위한 생존욕구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욕구가 사랑의 욕구입니다. 이것은 영혼을 살리는 욕구인데 이것을 위해서는 나의 육체가 사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사랑은 나의 생명을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삼구가 아닌 십자가 사랑이 행복임을 알게 된 이들의 특징은 이제 하느님의 말씀이 맛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내적인 인간인 영혼에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됩니다. 그러니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로마 7,22) 구약에서는 에제키엘이 말씀을 받아먹는데 입에 꿀처럼 달다고 말합니다(에제 3,3).
또한 요한 묵시록에서도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요한 10,10)라고 나옵니다. 두루마리는 하느님 말씀이고 영적 인간은 그 말씀을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즐깁니다.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은 미국의 정치인이자 변호사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으로 일하며 자기 능력을 철저히 믿고 승리만 거듭해 온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에 의한 그의 평가는 잔인한 숙청자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성공하기 위해 하는 불법은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콜슨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법정에서 증언해야 했으며, 사건과 관련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1974년, 콜슨은 방해 공작과 폭로된 정보를 이용한 국가 기밀 유출에 대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굳세게 믿어왔던 그에게 이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이때 그의 한 친구가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책을 주며 읽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만 믿던 그가 비로소 말씀에 관심을 두게 된 것입니다. 콜슨은 이 책을 읽고 신앙은 받아들였으며 그의 장례식에서 딸이 증언하듯이 삶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콜슨은 석방된 후, 복지와 교정 시스템에 대한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고 감옥에 있는 이들을 교화시키는 것을 그의 가장 중요한 소명으로 삼았습니다. 1976년 ‘프리즌 펠로우십’라는 이름의 기관을 만들어 수감자들의 교화에 힘을 썼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만나고 부시 대통령에서 영예로운 상도 받는 등의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믿을 때는 보이지 않던 성경 말씀을 “들고 읽어라!”라고 하는 목소리에 읽게 되었고 그렇게 삶이 180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회개 한 사람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싶어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주는 말씀들을 마치 입에 단 꿀처럼 흡수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흥미롭지 않은 이유는 아직 회개하지 않고 육적인 인간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거북한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성체를 영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육적인 인간은 하느님이 살 영혼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내가 회개했는지 아닌지는 주님께 대한 지식을 갈구하는지 아닌지로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말을 맛있어하지 않는다면 당신께 회개한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조언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드디어 요한복음 6장의 끝부분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 대한 긴 얘기의 끝부분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살과 피를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리라는 말씀에 반응이 갈립니다.
사람들은 듣기 너무 거북하다며 주님을 떠나고, 베드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어딜 가냐고 합니다.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서로 딴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때뿐 아니라 지금도 그대로 갈립니다.
같은 주님의 말씀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해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안 되며, 같은 주님의 말씀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북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달콤하며, 같은 주님의 말씀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무의미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말이 되고 심지어 영원한 생명의 말이 됩니다.
이것은 어떤 차이일까요?
머리가 좋고 나쁨의 차이일까요? 심성이 좋고 나쁨의 차이일까요? 아니면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까요?
머리가 좋고 나쁜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심성이 좋고 착해도 이해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습니까? 분명코 믿음에서 갈리고, 그리스도교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믿음이고, 그러기에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요 생명이라고 믿고, 우리 인생 전부를 이 생명의 주님께 거는 우리지요.
이는 마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의 믿음과 같습니다. 이 길로 갈 수도 있고 저 길로 갈 수도 있는데 누구 말을 믿고 따르느냐에 따라 길이 전혀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고작 이 세상 갈림길이 아니라 영원과 생명을 가르는 정말로 고민이 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요즘 주식 투자와 관련하여 작전꾼들의 말을 믿었다가 자기와 아는 이의 전 재산을 날리게 되는 일이 허다한데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식에서 대박과 쪽박이 갈리는 그 정도가 아니라는 거지요.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황천길이 될 수도 천당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신앙 역사를 보니 주님을 믿게 된 후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전에는 주님 말씀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조언 정도로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주님 말씀이 점차 조언이 아니라 영원의 갈림길에서 듣는 구원의 말씀이 되어가고 그만큼 절실하게 받아들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나이 드신 분들은 마찬가지로 어떤 길을 선택할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절실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시는데, 그래서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고 베드로 사도처럼 대답할 수 있는 나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살과 피가 되시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도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갔습니다. 영원한 고백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과 함께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수 많은 기도와 수 많은 묵상이 오늘의 우리입니다. 믿음의 길은 지도에도 없는 길이기에 믿음으로 말씀으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믿음도 우리의 마음을 열듯 마음을 주님께 내어주지 않고서는 깊어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믿음의 거리입니다. 가장 맑으신 예수님의 이름을 다시 배우고 다시 찾는 시간입니다. 세속적인 기도가 삶의 출구를 찾는 진실한 기도로 바뀝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언제나 거룩한 삶은 단순합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떼시어 우리에게 주십니다. 모른 척하시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믿음은 일생에 걸쳐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이며 고백입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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