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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4/28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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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권능과 신성과 지혜와 힘과 영예를 받으소서. 알렐루야.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려 주셨으니 저희가 성령의 사랑으로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하게 하소서.

 

2023년 4월 28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4월 2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요한 6,58)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요한 6,58)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9,1-20)
    그는 민족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 오늘 복음
    (요한 6,52-59)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4월 28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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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복음
요한 6장 52-59절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그때에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4월 28일 (금)
박유민 세례자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8:50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4월 28일 (금)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44

📌 강론시작 17:03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28일 (금)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4:38

📌 강론시작 13:47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4월 28일 (금)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매일미사 오후 4시
야렉 카미엔스키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3:59

📌 미사시작 1:04:00

📌 강론시작 1:13:2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진만 안젤로 신부

 

믿음은 예수님과 나를 이어 주는 고리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소개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유다인들은 그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직까지 가시적 세계 속에서 물질적 이익을 좇는 유다인들의 오해와 몰이해를 없애시고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을 가르치시고 설득하시려고 사용하신 방법은 대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 표현에 이어 긍정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에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살은 ‘참된 양식’이며 그분의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달하시려는 요점을 부정과 긍정의 대조로 강조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는 유다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은 오직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로써 가능하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살과 피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과 함께 주님 곁에 머물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불신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나를 이어 주는 고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마음 아픈 거, 정상이야.

 

뉴스를 보면 많은 사건 사고를 보게 됩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에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아프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뉴스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안 좋은 일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픕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그 무게가 분명히 더 무겁지 않은데, 사랑하는 사람의 일에 대한 것이 훨씬 더 자기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마음 아픈 거, 정상이야. 마음이 아프다는 건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최선을 다한 사랑의 대상 앞에서는 아픔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무게가 가벼워도 최선을 다한 사랑이기에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마음 아파했습니까? 부활을 알고 있기에 그냥 넘어가는 하나의 과정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슬퍼해야 할 주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내 마음의 아픔이 작았던 것입니다. 
 
먼 훗날, 주님 앞에서 섰을 때, 우리 마음의 아픔 정도를 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얼마나 사랑을 많이 했느냐고 물으실 것 같습니다. 무관심을 통해 아픔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아픈 것이 싫다면서 불평불만만 늘어놓았음을 지적하실 것 같습니다. 사랑의 삶에서 멀어지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아파서 더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어떻게든 용서하며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마음의 아픔을 만들지 말라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얼마나 큰 마음의 아픔을 간직하셨습니까?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식인종들의 말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저 사람’은 ‘이 천민 출신’이라는 경멸의 뜻도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경멸과 모욕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사랑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온몸을 내던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삶을 통해서 모범을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몸을 내던지신 사랑의 모범을 보고, 우리 역시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마음의 아픔을 겪게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음의 아픔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더 많이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랑의 치료 약은 없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아니면 구원이 없는지 설명하시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 사이에서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논쟁이 일어납니다. 어쩌면 우리도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라는 말씀에 ‘조금 지나치고 억지 아니신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무조건 지옥이라고 하신다면 그 말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나요?

가톨릭에서는 많은 경우 영양제나 치료제처럼 성체를 설명합니다. 상처나 병이 생겼을 때 성체성혈을 영하면 힘이 생기고 상처가 치유된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설명은 예수님의 성체성혈에 대한 커다란 모욕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음식이 단순히 건강만 유지하게 만드는 데 사용될까요? 하느님 자녀가 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을 인식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에 관련되어서 말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이 구절을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을 통해 배우고 이해함을 통해 하느님 자녀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살과 피, 곧 성체 성혈은 단순한 성경 말씀과 구별됩니다. 부모가 살과 피를 주지 않고 가르침만으로 자신처럼 아이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루마니아의 차우슈에스쿠 정권(Nicolae Ceaușescu)은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를 다스린 공산주의 정권이었습니다. 차우슈에스쿠 정권은 높은 출산율을 통해 인구 증가를 추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대부분 가정이 무거운 세금을 물지 않으려면 다자녀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회적 문제로 인해 가정에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동이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이렇게 버려지는 아이들을 위해 차우슈에스쿠 정권이 설립한 아동 보호 시설은 상당히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기초 시설과 인프라가 부족하였고, 사람들이 아동에게 필요한 보살핌과 사랑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시설 내에서 아동들은 영양 부족, 체계적인 교육과 의료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곳에서 자란 아동들은 발육부진, 정서적 및 인지 문제 등 다양한 건강 문제를 겪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고아원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 고아원은 1941년 독일군 침공으로 인해 발생한 굶주림과 대규모 사망으로 인해 수많은 고아가 생겼습니다. 루마니아 시설과 마찬가지로 이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발육부진과 인지, 학습 문제의 연구 결과가 보고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설에서 자란 아이들은 단 한 번도 엄마와 같은 포옹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생존하려는 방법으로 이 아이들은 몸을 앞뒤로 흔드는 일을 합니다. 동공이 풀려있고 머리를 처박는 등의 자해를 하기도 합니다. 음식은 먹었지만 사랑은 먹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분이 하느님임을 믿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마치 엄마 젖을 먹는 아이가 자신도 엄마와 같은 존재임을 믿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나 자신을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로 믿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탄생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시는 분이 하느님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분의 말씀이 나에게 의미가 있게 됩니다. 같은 말이라도 엄마의 말이 힘을 발휘합니다. 엄마는 나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젖은 엄마의 살과 피입니다. 아기가 젖을 먹을 때 엄마의 살과 피가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곧 엄마의 죽음인 것입니다. 엄마는 그 죽음으로 아기를 살리고 아빠가 벌어오는 돈으로 다시 생명을 되찾습니다. 이것이 죽음과 부활의 과정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성경에서 이 신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알아보려면 예상해야 합니다.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체 안에서 하느님을 볼 줄 모르는 이유가 바로, 이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개에게 먹을 것을 받아먹은 옥사나 말라야는 자신이 개라고 믿기에 인간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옥사나 말라야를 인간으로 만들려면 한 인간의 살과 피가 필요합니다. 그를 부모라 믿고 그 부모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절대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저는 이 교리교육이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기에 냉담자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그리스도 죽음과 부활의 신비가 왜 성체성혈과 연결이 되는지를 깨닫고 그분의 살과 피가 아니면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없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깊이 깨닫고 가르쳐야 합니다. 

지금은 성체신심이 매우 약해졌습니다. 이 신학이 확립되지 않으면 코로나와 같은 것이 오거나 어려운 일들이 생길 때 또 쉽게 성체를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엄마의 젖 없이 아기가 아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살과 피 없이 누구도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고단한 인생일지라도 행복한

 

오늘은 일찍 일어났는데도 수녀님들 피정 동반으로 긴장한 뒤끝이라 그런지 바로 복음 묵상이 되지 않고 나눔을 하고 싶지 않았고 한참 빈둥댔습니다. 쉬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선지 무슨 나눌 거리가 떠오르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바오로 사도를 보니 바오로 사도의 회심이 과연 복되다 할 수 있는 건지 생각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바오로 사도와 같이 되라면 나는 그것을 과연 은총으로 생각할지 그것이 의문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이제부터 자기의 인생은 없는, 아주 고달픈 인생이 바오로 사도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이때 이후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오로”라고 하거나 “그리스도의 종인 나 바오로”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실제로 주님의 종으로 아주 고단한 일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바오로를 당신의 그릇 곧 도구라고 하시고 그의 인생이 고단한 인생이 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자기 이름은 날리지 않고 주님의 이름이나 알리는 자. 자기 인생은 없고 주님이 전부인 인생. 이런 인생인데도 바오로를 행복하게 한 것은, 예수님을 소유함의 행복이 그렇게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후에 필리피서에서 이렇게까지 얘기합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 쓰레기로 여깁니다.” 

저도 이 지고한 가치 때문에 피곤한 줄 모르고 주님의 이름을 알리는 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갈증이 있기에 기도가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구원이 있고 거짓이 있기에 참됨이 있습니다. 갈증이 있기에 음료가 있고 허기가 있기에 양식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삶의 맛을 배우고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의 삶을 닮아갑니다. 삶에서 만나게 되는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인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만납니다.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삶을 십자가로 안고 가십니다. 십자가 뒤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그 자체가 이미 영원한 생명임을 믿습니다. 욕망이 죽어야 참된 양식 참된 음료가 될 수 있음을 또한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셨던 그 길이 공동체를 살리는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십자가로 아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참사랑이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입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마음과 마음을 이어줍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삶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양식과 음료가 되어 살리는 삶 살게하는 삶을 우리가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되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비껴갈 수 없는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님께서 오늘도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되시어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십니다. 인격은 사랑을 필요로 하고 인격은 참된 양식으로 영원한 사랑이 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사랑을 마시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는 생명의 이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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