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시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의 위업을 선포하여라. 알렐루야.
하느님, 파스카의 천상 영약으로 세상을 치유하시니 저희가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살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2023년 5월 6일 (토)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5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요한복음 성경 말씀 카드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요한 8,31-32)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사도행전 13,44-52)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4,7-14)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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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복음
요한 14장 7-14절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5월 6일 (토)
김보습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7:01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5월 6일 (토)
이철규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7:12
📌 강론시작 16:35
팔로티회 매일미사
홍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6일 (토)
팔로티회 홍천
매일미사 오후 3시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8
📌 강론시작 07:00
분당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5월 6일 (토)
팔로티회 분당
성체조배 오후 3시
성모신심미사 오후 4시
김지학 요셉 신부 집전
📌 성체조배 0:01:11
📌 미사시작 1:02:09
📌 강론시작 1:09:58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강수원 베드로 신부
요즘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을 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유다인들의 믿음은(탈출 33,20 참조) 하느님의 초월성과 인간의 한계성에 관하여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예언자들과 성경을 통하여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때가 차자 외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온전히 계시하셨습니다.
필립보는 “나를 알게 된 이는 아버지를 이미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아버지를 뵐 수 있게 하여 달라고 청합니다. 지금껏 주님께서 아버지와 이루시는 일치에 대하여 가르치신 것이 참으로 무색해집니다.
주님께서 오천 명을 먹일 빵을 ‘어디서’(주님에게서) 구할 수 있는지 물으셨을 때도 필립보는 ‘얼마’(이백 데나리온)가 필요하다며 동문서답합니다(요한 6,5-7 참조). 필립보는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과, 주님께 모여든 이들을 모두 배불리고 싶은 열정을 지닌 훌륭한 제자지만, 여전히 자기 생각과 기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충분하다’(동사 ‘아르케오’)는 표현은 두 번만 나오는데(6,7; 14,8 참조), 모두 필립보가 한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뵙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이백 데나리온은 되어야 ‘충분하겠다’는 그의 기준은 매번 주님의 뜻과 달랐습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만족하는 방법으로만 주님을 찾는 자는 진리를 유연하게 받아들여 참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제1독서는 자기 생각에 갇혀 진리를 고집스럽게 밀어낸 유다인들과,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기쁘게 살며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한 이방인들의 서로 어긋난 모습을 전합니다. 요즘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산란한 마음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의 바람은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편에 속해 있나요?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 갑곶성지 개발을 위해 강화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성지 안에는 그래도 잘 정리된 잔디밭이 있어서 성당이 없는 관계로 이 잔디밭에서 매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래서 잔디밭 관리를 잘해야만 했습니다. 유일하게 미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관리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잔디만 있어야 멋진데, 봄부터 잡초가 잔디 사이에서 삐죽삐죽 나오는 것입니다. 시간 날 때마다 잔디를 뽑았습니다. 넓은 잔디밭 안의 잡초를 이제 다 뽑았다 싶었는데, 처음에 뽑았던 그 자리에 또다시 잡초가 잔디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것입니다. 할 일도 많은데, 매일 쪼그려 앉아서 잡초를 뽑아야 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어느 날, 잡초를 뽑고 있는 제게 어떤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잡초는 뿌리까지 뽑아야지 그렇게 위만 잘라내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맞습니다. 조심조심 땅을 해쳐서 잡초를 뿌리째 뽑지 않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급하게 힘으로만 잡아당기다 보니 윗부분만 잘려 나간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뿌리까지 뽑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시간과 힘을 절약하는 것입니다.
잡초의 뿌리까지 뽑아내야 한다는 어느 자매님의 말씀이 문득 생각납니다. 우리 죄도 그렇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도 뿌리째 뽑아버려야 다시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뿌리보다 순간을 모면하는 데 급급합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보지 못하면서, 반복된 죄의 무게에 힘들어할 뿐입니다.
죄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어느 편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느 편을 믿느냐에 따라서 나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단체 스포츠 경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편을 믿지 못하면 결코 경기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어느 편에 속해 있어야 할까요?
주님을 굳게 믿고, 주님과 같은 편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가장 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당신의 말씀과 많은 표징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약속해주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뿌리까지 뽑는 방법은 주님을 굳게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주님의 힘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너의 약점을 단련하라, 너의 강점이 될 때까지.
- 크누트 로크니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진리 안에 사는 법을 알려주신 성모 마리아.
예수님은 세상에 왜 오셨을까요?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그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
하지만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라는 짤막한 질문으로 대화를 급하게 마무리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유는 진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리에 속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영화 ‘매트릭스’에서 가상현실 세계가 참 세상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두 알약이 제시됩니다. 하나는 진실을 알게 하는 약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지금의 현실이 진리라고 믿고 살아가게 하는 약입니다. 주인공은 진실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은 기계 안에 갇혀 있고 지금 보이는 현실은 가상현실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영화를 보며 충격을 받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사는 이 세상이 가짜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도 사람의 숫자만큼 이 세상이 창조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각자는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상한 종교에 빠진 사람입니다. 결혼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귀여운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는 세상을 무한히 반복되는 하나의 게임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번 생엔 에너지가 다 되어서 다음 생에 더욱 완전하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유서를 썼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웅다웅하며 사는 사람들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진리를 알고 다른 이들은 모른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예 외에도 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같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음을 자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이 하나의 세상을 보면서 자신의 머릿속에 서로 다른 세상을 만들어놓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극도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천국의 평안함으로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걱정할 것이 없는데도 두려움에 거짓말하고 사람을 공격하고 숨기도 합니다.
이 모든 각기 다른 행위들은 자기 나름대로 이 현실을 해석하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의 현실을 해석하여 각자의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에 맞게 자신을 세팅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 맞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모기를 닮았건, 예수님을 닮았건.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올바른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와 같은 모습의 우리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사람이 각자 다른 세상을 만들고는 있지만, 이 세상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도 하나입니다. 그 하나인 진리를 해석하려 들면 안 됩니다. 우리 자아는 그것을 해석하여 진화하였느니, 윤회하느니 등의 말을 붙입니다.
하지만 원숭이가 자동차의 원리를 알까요? 이 세상의 원리는 이 세상을 만든 분만이 압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만든 이에게 ‘순종’하는 길만이 참 진리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어린이가 부모에게 순종하면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듯이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임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그분을 해석하려 들지 말고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이렇게 진리를 받아들이십니다. 자신에게 인사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이 세상을 만든 이로부터 온 것임이 믿어지기 전까지 그분은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세상과 자신을 만든 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자신보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천사는 하느님에게서 왔으며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기까지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 안에 진리가 없고 자신이 해석한 세상이 진리라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생만 하게 됩니다.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는 자신이 창조자가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외롭고 힘든 투쟁에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외로움과 공허와 두려움과 고통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창조자의 세상에서 산다면 안식을 얻습니다. 이는 아이가 부모를 믿고 안 믿고의 차이와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어떤 믿음의 길이 참 진리 안에 머무는 길임을 아셨습니다. 바로 “창조자에게 순종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진실을 알게 하는 빨간 약과 그냥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살게 되는 파란 약을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우리입니다. 진실을 알고 싶으면 빨간 약을 먹으면 됩니다. 이것이 창조자가 있고 그의 법에 순종하려는 결단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만든 각자의 세상에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됩니다.
“주님의 종이오니!”는 이러한 어린이와 같은 지혜를 담은 말입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서 주님의 뜻대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이러한 삶이 참 행복임을 느끼셨고 마니피캇을 노래하셨습니다. 진리를 벗어난 삶은 노예 생활일 뿐이고 고통일 뿐입니다. 참 행복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따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이중 충만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뵌 것으로 이미 하느님을 아는 것이고 뵌 것이라고 하시자 필립보는 뵙긴 무엇을 뵈었다느냐는 뜻에서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고 하면서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하겠다고 합니다.
필립보 사도뿐이 아니겠지만 주님 입장에서는 필립보가 답답하실 겁니다. 기껏 당신을 본 것이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했는데 뵙게 해달라니 말입니다.
그런데 답답하긴 필립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주님과 필립보 사이에서 누가 더 답답할지 모르겠습니다.
필립보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를 뵙지 못했는데도 이미 뵌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답답하고 이미 뵙는데 왜 또 뵙게 해달라고 하냐고 야단맞을 때는 야속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을 겁니다.
사실 저는 주님 편이 아니고 필립보 편이고 필립보의 그 심정을 이해하고 다른 한 편으로 필립보의 그 뵙고 싶은 열망을 높이 사고 뵙는 것으로 충분하겠다는 그 말의 뜻을 십분 백분 공감합니다.
사실 하느님을 못 뵈어서 그렇지 뵙기만 하면 너무도 충분하고 다른 것은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는 것쯤은 저도 압니다.
제가 장가 안 것이나 살면서 늘 형제들이 불만인 것은 어떤 여자도 충분치 않고 어떤 형제도 충분치 않기 때문이지요.
충분할 만큼 만족을 주는 존재와 사랑이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받지 않기로 하였고 사랑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받는 사랑은 나를 만족케 할 수 없기에 하는 사랑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그래야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사랑인 거지요.
하느님이 이런 분이고 하느님의 사랑이 이렇다는 것을 필립보는 알고 그래서 하느님을 뵙기만 하면 충분하고 남을 거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저도 이것을 안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필립보처럼 저도 이것을 알기는 하지만 아직 이 하느님과 그 사랑을 만나 뵙지 못하여 답답할 따름이지요.
아무튼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 사람은 오늘 바오로 사도와 같이 성령과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고 그래서 인간과 인간의 어떠한 것에 좌우되지 않을 겁니다.
모욕을 줘도 모욕을 받지 않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모욕을 주는 사람을 피하고,그래서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인간의 사랑이나 칭송을 바라지 않고 그래서 미움이나 모욕도 받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나 칭송을 받으려는 사람이 미움과 모욕도 받는 것입니다. 사랑과 칭송을 받고 싶기에 미움과 모욕을 받을까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기에 그 두려운 미움과 모욕에 사로잡히고 마는 거지요.
그러나 하느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받아서 충만하고 함으로써 더 충만합니다.이중으로 충만케 되는 것인데 이런 충만함 때문에,앞서봤듯이 미움이건 모욕이건 인간의 그 무엇도 범접치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뵙는 것으로 충분한 제가 되고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기에 보고싶은 것만 보며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가슴을 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쓰러진 것을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서로를 의심하고 물어뜯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연결된 우리의 생활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의 결핍이 바로 의심이며 분열입니다. 믿음을 지키는 일은 주님의 일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의심으로 모든 불행은 시작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새아침을 여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사라질 것을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날마다 하느님의 일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장이 뜨거운 믿음이길 기도드립니다. 믿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믿음의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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