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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2/17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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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2023년 2월 17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창세기 11,1-9)
    우리가 내려가서 사람의 말을 뒤섞어 놓자.

  • 오늘 복음
    (마르코 8,34-9.1)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2월 17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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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복음
마르코 8장 34-38절
마르코 9장 1절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17일 (금)
장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06:50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17일 (금)
전두병 요아킴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9:52

📌 강론시작 17:45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17일 (금)
안동억 프란치스코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19

📌 강론시작 06:4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바벨탑.

 

오늘 우리가 제1독서에서 들은 바벨탑 이야기는 사람들의 일치와 다양성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되풀이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의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의 도시, 하나의 탑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하여 한 가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흩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다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도시, 하나의 탑이 상징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름을 거절하는 것, 일치를 이룬다는 목표 아래 하나의 방식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진정한 배려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삶의 방식이 하느님의 창조 위업의 과정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읽은 창세기의 창조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과정에서 언제나 피조물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방식을 취하셨습니다(창세기 1장 참조). 

반면에 사람이 추구한 바벨탑 쌓기의 과정은 하느님의 창조 방식을 거슬러 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 일에 매우 강한 열정을 지니신 하느님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사도행전에는 바벨탑 이야기의 후속편을 보는 듯한 말씀이 나옵니다. 성령 강림의 이야기입니다(2,1-12 참조). 창세기의 첫 이야기들(카인, 홍수, 바벨탑)은 사람들이 어떻게 죽음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의 자율성을 존중하시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일치를 바라시고 그들의 다양성을 깨뜨리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것이 더 자라나도록 배려하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삼위일체 안의 하느님이십니다. 모두 고유한 자리를 잃지 않으시면서 충만한 일치를 누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믿음의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과 대화가 쉽지 않은 이유

 

크론시타트의 요한 성인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성인께서 어느 날 기도하고 있는데 악마가 찾아와서 이렇게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이 위선자야! 어떻게 감히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느냐? 내가 너의 생각을 다 읽었다. 너는 더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자 성인께서는 악마에게 별 상관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종종 “저 같은 사람이 감히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라면서 자격 없음을 들어 이야기하십니다. 겸손해 보이는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인의 말씀처럼 그렇기 때문에 더 기도해야 했습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입으로만 자격 운운하고 있을 뿐, 어떻게든 용서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유혹이 있어도, 또 때로는 온갖 분심으로 가득해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창 신부와 전화 통화할 때면 보통 30분에서 때로는 1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합니다. 특별한 대화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즐겁고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주님과의 대화도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벗으로 오신 주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벗으로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니, 주님과의 대화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에 이분을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종 커다란 착각에 빠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 대신 짊어진 키레네 사람 시몬(마르 15,21 참조)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서 따를 수 있을까요? 주님과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서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의 삶을 살면서 주님을 따르고, 또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영웅은 보통 사람보다 용기가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5분 정도 더 오래 용기를 지속시킬 수 있을 뿐이다.

-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녀는 언제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게 될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당신 뒤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만이 결국엔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그 말씀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예는 ‘순교’라 할 수 있습니다. 순교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배척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고 세상의 힘에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신일덕 기장이 조종하는 사이판행 대한항공 725편 비행기에는 신혼부부 61쌍을 비롯한 165명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이렇게 종교적으로 안내방송을 하였습니다. 출발하는 김포공항은 하늘이 높고 푸른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여 주었습니다.

“일생에 처음 가는 신혼여행이 알찬 여행이 되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비행이 되셨으면 합니다. 부디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철저한 불교 신자였던 부기장은 이런 기장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기내 방송을 마치고 비행기를 무리 없이 조종해 가고 있었습니다. 비행 도중 하와이 관제탑에서 사이판 기상이 너무 나빠 천둥이 치고 장대비가 내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열대성 기후는 예측하기 어려워 날씨가 변덕스럽지만, 염려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착륙 15분 전에 문제가 생겼다. 그는 기관사로부터 다급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기장님, 하이드롤릭이 새고 있습니다.”

하이드롤릭이란 비행기가 바퀴를 올리고 내리는 장치에 사용되는 유압입니다. 이것이 빠져나가면 바퀴를 자동으로 내릴 수가 없습니다. 보고받자마자 조처하였지만 내부 압력이 워낙 강하여 즉시 관이 파열되어 유압이 모두 새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수동으로 조작할 수밖에 없는데 몇 번을 시도해도 수동 장치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괌 관제소에서는 착륙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자 이상히 여겨 연락이 왔습니다.

“KE5725, 여기는 괌 컨트롤. 무슨 일인가?”

“괌 컨트롤. 여기는 KE5725. 랜딩기어 하이드롤릭이 모두 샜다.”

괌 관제소에서는 “자갈밭으로 된 보조 활주로에 동체 착륙하라”라는 긴급 지시를 내렸습니다. 연로는 얼마 남지 않았고, 비는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신 기장은 조종관을 부기장에게 맡기고 기관사와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비행기에 벼락이 내리꽂히며 전기가 나가 비행기 안은 암흑으로 가득 찼습니다. 탑승객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부기장의 조롱 섞인 말에도 기장은 일어서서 기도하였습니다. 

피를 말리는 기도는 울부짖음이었고 절규로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울부짖으며 기도하는데, 갑자기 하늘로 신 기장의 몸이 붕 뜨는 듯하며 황홀한 환상 속에서 세미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이사 41,10)

그 사이 객실 사무장은 비상 착륙을 대비해 비상 착륙 시 행동 요령을 승객들에게 교육하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신 기장은 용기를 내어 기관사에게 한 번 더 수동 착륙 장치를 돌려보라고 지시했습니다. 기관사는 포기한 듯 핸들을 돌리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노력해도 돌아가지 않던 핸들이 돌아가고 바퀴가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기적이었다. 조정실에서 신 기장은 소리쳤습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십니다.”

신 기장은 다시 한번 마이크를 잡고 승객들에게 이렇게 방송했습니다.

“승객 여러분, 저는 기장입니다. 모든 바퀴가 정상적으로 내려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 비행기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십니다.”

그는 모든 승객에게 감격에 떨며 이렇게 방송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큰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드립니다.”

그는 이 놀라운 은혜를 승객들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내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의 눈물은 비행기가 착륙해 계류장으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멈추지 않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기장의 얼굴을 보고 내리려는 승객들을 하나하나 다 인사하며 내려주고는 조종실로 갔습니다. 

불교 신자였던 부기장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고 신 가장은 하느님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힘들게 들어온 대한항공에 사표를 내고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대한항공 수석기장으로 30년을 근무한 그의 한결같은 기내 인사에서도 그가 믿음의 사람임을 짐작게 하고 있습니다.

“이 비행기는 하느님이 동승하고 계십니다. 편안한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신 기장이 월남전에서 비행기 조종할 때도 그랬습니다. 미군을 태우고 폭격을 나갔다가 밑에서 쏘는 포에 맞아 비행기 동체에 불이 붙었습니다. 미군들은 뛰어내릴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 기장은 조동관을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미군들은 이제 기장이 두려움이 미쳤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번개가 치는 듯하더니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신 기장은 불이 타는 비행기를 몰고 기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불이 다 꺼져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때 미군 39명이 신 기장이 양쪽 가슴에 넣고 다니는 작은 성경을 사 달라고 하였고 39명 모두 한 명도 전사하지 않고 미국으로 돌아가 다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1만 명을 전도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합니다. 

신 기장은 가슴에 항상 성경을 넣고 다닙니다. 덕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주일간 구금당하고 입국이 금지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은 박해가 따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죽는 법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믿지 않는 이를 싫어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를 비웃습니다. 하지만 보란 듯이 기도한다면 많은 이를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우리는 지나친 개신교의 전도 덕분으로 조용히 전도하는 게 좋다는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드러나게 성호를 긋고 사람들을 함께 기도하자고 이끌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언제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일까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아는 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창피해서 그렇습니다. 부모가 나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낄 때, 그래서 부모가 옆에 있어도 외면할 때 그것이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할 수 있는데 하느님께 청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느님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러면 하느님도 나를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대놓고 기도하는 좋은 예가 김연아 선수에게 세례를 주게 되는 계기를 만든 하늘 병원의 ‘조성연 요셉’ 원장입니다. 그분은 아침부터 다른 일을 제쳐놓고 믿는 직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며 시작합니다. 그때는 기도가 아니면 누구도 원장실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성호경을 긋고 하는 기도의 힘을 보여 줍시다. 우리가 기도하면 세상에서는 박해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보고 박해하여도 상관없이 대놓고 기도하는 것, 이것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목숨을 잃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 기도의 힘을 보여 줍시다. 하느님 아버지를 ‘능력’ 없는 분으로 만들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건강한 사람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 주님 말씀에 따르면 잃어야 할 목숨과 구해야 할 목숨이 있고, 죽어야 할 목숨과 살아야 할 목숨이 있고, 이 세상에서 사는 목숨과 하느님과 함께 사는 목숨이 있는가 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언제 들어도 어렵고 지금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앞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주님을 따라야만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주님을 따르는 데 자기나 자기 목숨이 방해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주님을 따라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께 갈 것이고, 지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가겠지요. 

그리고 그래야 우리는 목숨을 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고 잃지 말아야 할 목숨이며, 반대로 사라질 이 세상의 어차피 없어질 목숨은 잃어야 할 목숨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어려운 것이 실은 뜻이 아니라 실천일 것입니다. 저세상에서 살기 위해 이 세상에서 죽는 것, 저세상의 삶을 이미 여기서 살기 위해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심리학에서 정신 건강을 간단하게 테스트하는 것이 있답니다.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 두 가지 음식이 있고 둘 다 먹어야 하는데 무엇을 먼저 먹느냐에 따라 정신이 건강하고 약한 것이 갈린답니다. 

맛없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이 정신이 건강하고 그 반대의 사람은 정신이 약한 사람이라고 한답니다. 

정신이 건강하다고나 할까 강하다고나 할까 그런 사람은 현재의 싫은 것이나 고통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곧 미래의 기쁨이나 행복을 위해 견디는 힘이 강한 사람이라는 거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내 알 수 있습니다. 미성숙하고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조그만 고통도 견디지 못하고, 나중에 어떻게 되건 당장 좋은 것만 하려고 합니다. 

어제는 미사 가방, 수도복, 컴퓨터 등이 들어서 무거운 가방을 메고 귀가하는데, 무겁고 힘들어도 그리고 무릎이 안 좋아도, 건강을 위해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인, 힘든 것을 피하지 않고 이겨내는 내가 되기 위해 계단을 걸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젊은이 거의 모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렇게 쉽게 그리고 단숨에 위로 오르던 젊은이들이 인생길에서 수없이 만나는 어려움을 어떻게 맞닥뜨리고 견디어내며, 또 어떻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지 노파심에서 염려가 되었습니다. 

목표를 아예 또는 이내 포기하지 않을까? 목표를 향해 가되, 가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가 되고, 스트레스가 쌓여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으로 건강을 잃지 않을까? 

이런 남 걱정을 하다가 이내 저를 돌아봤습니다. 그들보다 조금 더 정신적으로 강하고 그래서 당장의 고통을 그들보다 조금 더 잘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숙제를 미루고 당장 노는 것을 선택하는 아이처럼, 내가 죽는 것은 뒤로 미루고 당장 즐거운 것만 쫓는 나는 아닌지. 

내일과 모레 강론을 올리지 않겠습니다. 글피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봄의 숨결이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거시는 위대한 목숨을 만납니다. 목숨의 살을 먹고 목숨의 피를 마시는 우리의 오늘입니다. 목숨은 그래서 목숨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목숨을 부르시는 목숨의 복음을 듣습니다. 

주님의 목숨을 통하여 하늘의 목숨을 봅니다. 버려야 얻게되는 복음의 삶입니다. 버려야 참된 것을 만나게 되는 기쁨입니다. 주님의 목숨이 모순으로 가득찬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 모든 것을 내놓아야 모든 것을 얻게되는 영광의 신비입니다. 

목숨이 목숨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목숨입니다. 복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목숨입니다. 배신하는 목숨이 아닌 진심을 다해 사랑해야 할 하느님의 목숨입니다. 

하느님의 목숨은 사랑의 목숨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사람을 살리는 목숨, 그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님의 목숨에서 목숨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간절하게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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