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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3/02/19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3.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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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2023년 2월 19일 (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2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7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레위기 19,1-2.17-18)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제2독서
    (코린토1서 3,16-23)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오 5,38-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3년 2월 19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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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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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마태오 5장 38-48절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3년 2월 19일 (일)
추성훈 바오로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0:22

📌 강론시작 12:36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3년 2월 19일 (일)
김영우 스테파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9:05

📌 강론시작 19:43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3년 2월 19일 (일)
김태광 아우구스티노 신부 집전

 

📌 미사시작 04:45

📌 강론시작 14:2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용진 요셉 신부

 

꽃이 향기를 내는 것은 그것이 꽃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것은 영성체 전에 우리가 반복하는 기도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몸과 우리의 인생을 형제들이 먹고 마실 양식으로 내주지 못함을 고백하면서, 주님의 영과 정신으로 이것을 실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많은 경우 세상에서 관계는 이른바 ‘상호성’에 의존합니다. 흔히 말하는 ‘교환 정의’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상대방이 웃으면 나도 웃고 상대방이 화를 내면 나도 화를 냅니다. 우리의 정의가 교환과 저울에 근거한다고 믿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우신 분이시라고 판단합니다. 선인에게 상을 주시고 악인에게 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가진 정의에 대한 생각으로 하느님의 정의를 판단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정의는 세상의 통념과 다른 새로운 정의입니다. 이 새로운 정의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정의입니다. 그것은 상대의 반응에 매이지 않고,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에 근거한 정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을 닮은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꽃이 향기를 내는 것은 그것이 꽃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꽃은 밟아도 향기를 뿜어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합니다.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의 정의를 따라 사는 사람과 다릅니다. 우리의 부모를 생각해 봅시다. 내가 그분들을 괴롭혔을 때 그분들은 어떻게 하셨나요? 우리는 왜 부모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까요? 교환 정의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가 우리에게 준 조건 없는 사랑 때문입니까? 

우리는 오늘도 주님을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해 주시기를,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사랑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발로 그려도 저 정도는 그리겠다.

 

고등학생 때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을 미술 시간에 선생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빛의 파면을 자유롭게 담아낸 입체파 화가의 놀라운 작품이라고 선생님께서는 설명하셨고, 이 작품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친구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장난삼아 우스꽝스럽게 그려놓아도 ‘피카소’라는 이름 덕분에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했다. 
 
“내가 발로 그려도 저 정도는 그리겠다.” 
 
미술에 대한 조예가 없으니 이렇게 생각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훌륭한 화가의 그림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우리가 피카소를 만나서 “왜 이 따위로 그렸습니까?”, “나는 도대체 당신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라고 따질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잘 모르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면서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우리가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일을 보기에 때로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고통과 시련을 왜 만들어서 사람을 힘들게 하시는지, 왜 내가 청하는 기도는 다 외면받고 있는 것인지, 전지전능하시면 나 하나 부자 만들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닐 텐데…. 그래서 계속해서 불평불만입니다. 
 
“왜 이따위로 세상을 끌고 가십니까? 나는 당신의 그 모습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런 불평불만이 과연 맞을까요? 완벽하지도 않고 전지전능하지도 않기에 우리는 함부로 주님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고 계신다는 굳은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깊은 묵상과 기도로 또 그밖에 다양한 방식으로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은 불평불만보다는 감사의 기도를 더 많이 바칩니다. 주님을 아는 자기 수준이 높아져서 주님을 이해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오른뺨을 치면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고,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면 이천 걸음을 가 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더 힘든 일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우리 수준을 높이는 것이 됩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주님도 모욕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하느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직 수준이 낮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나의 수준은 어떤가요? 완전한 하느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명랑한 미소를 지어 준 것뿐이지만, 그 미소는 밤을 산산이 흩어지게 하고 그날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날로 만들어 주었다.

- 스콧 피츠제럴드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용서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런 말을 들으면 원수가 있는 사람들은 “당신도 똑같이 당해보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거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으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하느님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한 고정원 씨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개신교에서는 대표적인 사례가 손양원 목사입니다. 손양원 목사는 자기 두 아들을 총살한 안재선의 사면을 위해 애썼고 그가 사면되자 그를 양아들로 삼아 같이 살면서 신학교에 보냈습니다.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와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는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러한 용서와 사랑이 어떻게 하면 가능했을까요? 그분이 두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밤새 울며 기도한 다음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 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믿음’입니다. 우선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나에게 저지른 일이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수준이 높아져야 합니다. 

아기가 누군가에게 자기 장난감을 빼앗기면 그 누군가를 원수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 장난감을 빼앗아 간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건 우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듯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장은 이전의 자기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을 가지고 자기를 쫓아오는 길거리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알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었소!”

그렇습니다. 용서하려면 이전의 나는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기 때 빼앗긴 장난감이 나에게 더는 의미가 없는 이유는 그것이 의미 있었던 이전의 자신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로마 6,4)

우리는 세례 때 이미 이전의 자신은 죽어서 묻혔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내 안에서 사실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용서하려면 자기 정체성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복수하는 심판관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도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내가 죽었다는 믿음은 용서는 할 수 있지만, 사랑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로마 12,20)라고 말합니다. 손양원 목사가 자기 아들들을 죽인 원수와 함께 식사했고 그것은 마치 자갈을 먹는 맛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인간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인간으로 받은 상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쓸모 없어진 인간의 육체에 상처를 낸 인간들을 용서하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바라보듯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바라보기에 불쌍히 여기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창조자이고 창조자는 부서진 물건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었다는 믿음이 아니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을 찌른 아들의 부러진 손톱을 어머니가 죽어가면서도 삼킨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른 게 아닙니다. 어머니니까. 우리가 하느님이라 믿지 않으면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낳은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만이 상처를 잊게 하고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하고 심지어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까지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프란치스코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뜻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올바른 실천은 악인에게 맞서지 않고 우리가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주는 기쁨이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랑이라는 놀라움이 빚어만드는 관계입니다. 

악인도 원수도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출발점은 언제나 하느님께 기도하는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참된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때 하느님의 사랑에 놀라게 됩니다. 

사랑은 먼저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느님을 통하여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기적인 자아를 버리기에 온전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조건을 두지 않는 사랑은 조건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사랑의 순리입니다. 공동체는 하느님을 첫자리에 두며 기억하고 기도드리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기쁨이 없는 곳에 기쁨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온전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변덕스러운 인간의 사랑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온전하고 완전하신 하느님 사랑에 의탁하는 사랑의 주일입니다. 사랑은 사랑할 때 하느님 나라가 되는 사랑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사랑의 순간 완전한 순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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